[오피니언] 다시 읽고 있습니다 ③ [도서/문학]

데미안을 다시 읽다
글 입력 2021.12.2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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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한켠에는 언제부터 꽂혀있는지 모를 누렇게 바랜 책들이 있다. 내가 구매한 책은 아닌 것 같은데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있어 이젠 그냥 내 방의 일부 같다.


그 중에 하나가 <데미안>인데,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데미안은 나온 후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중학교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는데,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표현들이 어려워 고전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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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아침에 학교에 갈 때 마다 조금씩 읽었더니 금새 다 읽어서 읽은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사실 저번 책인 어린왕자보다도 데미안을 먼저 읽었다. 생각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걸려 미뤄두었던 것을 이제야 천천히 정리해보려 한다.

 

 


제 1장.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



따뜻한 세계와 어두운 세계, 선과 악,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 어린 싱클레어는 인접해있지만 정반대인 두 세계를 기이하게 여긴다. 싱클레어는 선한 세계가 정당하고 옳다 여기면서도 악한 세계를 동경하고, 따뜻한 세계에 소속되고 싶어 하면서도 금지된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 데미안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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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카인의 표지 이야기를 통해 싱클레어에게 절대선과 절대악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싱클레어는 성서의 이야기조차 재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악인이 완전히 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데미안의 이야기에 설레면서도 우월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자기에게 금지된 것을 제 자신의 힘으로 찾아내야 하는 거야. (중략) 너무나도 안일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기의 판단자가 되지 못하는 그러한 사람은 결국 있는 그대로의 금령에 당장 복종하는 법이지.”



데미안은 선과 악 사이에서 방황하던 싱클레어에게 스스로 자기의 판단자가 되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이는 비단 싱클레어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어릴 적 누구나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배운다. 전래동화에서조차 착한 일과 나쁜 일을 구분하여 배운다. 하지만 지금에 와 돌아보면 주인공의 행동이 온전히 선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를 구분하는 일은 언뜻 보기에 간단하고 단순해보이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대개는 이제껏 배웠던 것들이 모두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는 데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나는 대학에 와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내가 ‘진실’이라 믿었던 것들이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한 가설일 지도 모르며, 결국엔 누군가의 시점으로 바라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이다.

 

대학에 막 입학해서 들었던 전공수업에서 교수님은 모든 것이 결국엔 ‘매트릭스’에 불과하다고 열변은 토하셨다. 영화 <매트릭스> 속 가상세계에 갇힌 인간들처럼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판단력을 잃곤 한다.


카인은 정말로 형제를 죽인 악인이었을까? 데미안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판단자가 되어야겠다.

 

 


제 2장.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데미안을 떠나 여전히 방황하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서 쪽지를 받는다. 아프락사스는 신인 동시에 악마였다. 그는 아프락사스에 대한 정보를 찾아 헤매던 중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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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는 선도 악도 아닌 것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방황했고, 가정이라는 따뜻한 세계, 동년배 사이의 즐거움을 알고 있음에도 다시는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느꼈다. 이때의 싱클레어는 사실 방황이라기보다는 남들과 다른 사실을 알고 있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그 사실에 취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때에 만난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에게서 끊임없이 반복되던 꿈을 해석해주며 내면의 가치를 보는 법을 알려주었다.


 

“자네를 날게 한 비약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의 특전이지. 그것은 모든 힘의 근원과 연관된 감정인데, 그럴 때에는 누구나 곧 불안하게 되는 법이라네! 그러므로 대개의 사람들은 아주 흔쾌히 날기를 단념하고 법의 규정을 따라 보도를 걸어가는 편을 택하는 것이지.


그렇지만 자네는 그렇지 않아. 자네는 점차 스스로 그것을 제어하게 되고 자신을 휩쓸어가는 보편적인 위대한 힘에 대하여 하나의 섬세하고 가냘픈 자기 자신의 힘이, 즉 하나의 기관이, 하나의 키가 맞서게 된다는 신기한 일을 발견하게 된 거지.”

 


싱클레어는 그제야 껍데기 밖의 세계로 머리를 내민듯한 기분을 느꼈다. 어린 날에 데미안이 알려주었던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 사이의 판단자는 법의 규정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제어하고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부레(물고기의 평형기관)’를 갖게 된 것이다.


어릴 적에 다니던 학원에서는 하나같이 ‘자기주도적 학습’을 강조했다. 아이에게 물고기를 주어선 안 되며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교훈을 귀 아프게 들었다. 그러나 모두가 나에게 물고기를 가져다주었다. 내가 잡아야 하는 물고기를 가르쳐주었고, 나를 그리로 데려다 주었다.

 

그래서 대학에 간 후 매우 당황스러웠다. 한 번도 쥐어본 적 없던 방향키가 손에 쥐어졌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진실들이 사실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충분히 당황스러운데 그 사이에서 나에게 허용된 것들을 찾고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찾아내야 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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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는 ‘표지를 가진’ 사람만이 방황하며 스스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러한 고민은 선택받은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들여다보기 위해 방황하게 되며 방황 속에서 내면의 가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전쟁 속에서 데미안은 떠났지만 끝내 단단해진 싱클레어의 내면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소설의 끝에 이르러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자신의 분신이며, 자신을 이끄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예민하고 유약하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집안에서 심리적 안정을 주는 가족들과 살면서도 끊임없이 방황하고 흔들린다. 그런 모습은 왠지 인간실격의 요조를 떠오르게 했다. 하지만 싱클레어와 요조는 조금 달랐다. 싱클레어가 자아를 찾기 위해 방황했다면 요조는 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속에 자신을 잃어갔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느꼈다.

 

싱클레어는 전쟁 속에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당시 청년들의 모습이면서도 현재에 이르러 우리 모두의 모습을 표방하고 있다. 처음 데미안을 읽었을 때는 싱클레어의 감정들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방황은 탈선으로 느껴졌고, 스스로를 제어하고자 하는 모습은 오만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데미안을 다시 읽으며 싱클레어의 많은 감정들에 스스로를 대입하고 공감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흔들릴 때, 이 책을 다시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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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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