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한 편의 폭풍 같은 꿈 '게르니카의 황소'

글 입력 2021.12.24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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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제 내게 남은 일은,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내 머릿속에 경계선을 그을 수가 없으니

 

거꾸로 완전히 지워버리는 건 어떨까?

- 148쪽
 

 

이 정도의 흡입력을 가진 소설을 오랜만에 만났다.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인데,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특히 첫 부분부터 클라이맥스까지의 몰입감이 대단했다. 한이리 작가의 몰아치는 텍스트는 책의 주요 소재인 ‘황소’ 그 자체인 것처럼 나를 이리저리 이끌고, 몰아세우고, 숨을 참게 했다.


<게르니카의 황소>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림을 모티브로 하고 주인공의 직업도 화가이지만, 예술 그 자체보다는 광기와 꿈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하는 ‘심리 스릴러’다. 그만큼 폭풍처럼 몰아치는 전개에 반전도 있어 한 번 책을 잡으면 쉬이 놓기 어렵다.

 

하지만 책을 덮고 숨을 몰아 쉰 다음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천천히 음미해도 새로운 맛을 또 느낄 수 있는 것은, 작가가 글자들 사이에 꼭꼭 눌러 담은 여러 상징과 복선, 그리고 감각적인 표현들 덕분이다.

 

특히 주인공 케이트가 어린 시절 생일 선물로 <게르니카> 복제 그림을 받고 그것을 바라보는 장면은 책 전체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을 만한 부분이다.

 

 

[크기변환]gernica.jpg


 

시간의 변화에 따라, 햇빛의 각도와 온기에 따라 그림이 변하는 광경을 묘사한 그 부분은 정말 내 방 안에서 <게르니카>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을 주었고 <게르니카> 한 구석의 그 황소가 정말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은 섬뜩함과 동시에 강렬한 끌림을 주는 오묘한 부분이었다.

 

마치 타임랩스 영상을 보는 것처럼 생생한 이미지가 그 앞에 앉아 하염없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던 케이트에게 완전히 이입하게 했다. 흑백의 글자에서 이미지를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 얼마만이었는지. 개인적으로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 편이라 더 예민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또한 작가가 ‘황소’가 가진 여러 상징적인 의미를 영리하게 활용해서 더욱 다채로운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황소는 에너지 그 자체다. 에너지는 어느 방향으로든 향할 수 있다. 광기가 그러하듯 말이다. 황소는 잔인한 폭력성으로 내달릴 수도 있고, 소설에서 직접 언급된 것처럼 그 뿔은 정력과 성적 욕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반은 인간이자 반은 황소인 미노타우루스는 선과 악,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비유한다. 마치 미술 작품 속 하나의 도상에 여러 상징과 메타포를 겹겹이 씌워보며 그 의미를 분석하는 것처럼 이 작품 속 황소에도 여러 겹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는 것을 파헤쳐가며 읽어내는 재미가 있었다.

 

 

이 춤을 조금만 더 출 수 있다면, 열 번째 아니 스무 번째 그림을 그릴 때까지만이라도 멈추지 않고 계속 출 수만 있다면,


- 120쪽

 

 

게르니카 속 황소를 보며 자라난 광기를 케이트가 천재적인 예술 창작의 에너지로 쓰기 시작하면서 점점 광기에 잠식당하고, 이를 ‘조종’하려다 결국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과정이 숨막히게 그려진다.

 

꿈을 조종하고 꿈속의 ‘에린’을 이용하여 굉장한 작품들을 가볍게, 신나게 그려내는 케이트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언제 그 미칠 듯한 행복이 끝날지 모르는 위태로운 유혹 앞에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는 기분 또한 그와 함께 느꼈다.

 

“많이 들떠 있는 것 같구나, 케이티. 혹시 약을 거르고 있는 건 아니니?”

 

언제 케이트의 아버지가 불쑥 이렇게 물어올까 덩달아 조마조마하면서. ‘천재 예술가’의 클리셰 같은 이러한 묘사가 뻔하다고 느끼면서도 역시나 아주 매력적이라고도 생각했다. 한편 이 천재 화가를 환영하는 뉴욕의 미술계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게 읽었다. 뉴욕 미술계를 주름잡는 ‘하느님’ 같은 갤러리스트 드바인은 소설 속에 아주 잠시, 그것도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데에 그치지만 그야말로 ‘씬 스틸러’였다.

 

창고에 쌓인 그림을 단 몇 초 만에 훑어보고 등급을 매기는 동물적인 감각을 가졌지만 동시에 속물스럽고 탐욕적인, 역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갤러리스트’의 전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천재’란 결국 없지만 늘 천재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미술계와 대중의 한 일원으로서 공감하고 또 냉소하게 되는 부분이었달까.

 

 

[크기변환]basquiat_gary-oldman.jpg

(이 소설이 영화화된다면 갤러리스트 드바인 역할은 꼭 개리 올드만이 맡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묵직한 가죽 냄새와 달콤한 감귤 향기’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초콜렛 크림 케이크’ ‘”왜?” “왜?” 하며 우는 새의 소리’ ‘손끝으로 느껴지는 캔버스에 박힌 타카의 감촉’

 

그러나 한이리 작가의 강점은 무엇보다 오감을 가리지 않는 풍부한 감각적 묘사인 것 같다. 감각은 케이트의 꿈과 현실을 가로지르며 경계를 완전히 뒤섞어버리고 그의 정신에 침투한다.

 

꿈에서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꿈 속에서 어떤 감촉을 소름끼치게 생생히 느껴 본적이 있는가?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의 묘한 느낌을 알 것이다.

 

<게르니카의 황소>는 바로 그 기분을 텍스트로 옮겨 놓은 듯한 소설이다. 이왕이면 현대 음악의 거장 필립 글래스의 극적인 음악과 함께 읽어보길 권한다. 나처럼 몰입의 기쁨을 느껴본지 꽤 오래된 이들이라면 더더욱.

 

 

[크기변환]게르니카의 황소.jpg

 

 

 

채현진.jpg

 

 

[채현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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