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백석의 높고 차고 쓸쓸한 말로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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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힘
어떤 집단을 맹목적으로 결합해내는 수단으로 작용하곤 했던 것이 바로 ‘언어’다. 그리고 우리는 언어가 일련의 메시지를 위해 묶인 집합체를 문학으로 부른다. 그런 힘을 가진 문학이 사회 현실을 반영해야 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는 오랜 논쟁거리였다. 다만, 이 논쟁이 가능한 건 문학의 자유가 전제되었을 때다. 종종 문학가의 언어가 아닌 국가의 언어로 문학 작품이 배출되는 경우가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언어는 혁명을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하곤 했다.
그 처지에 놓였던 이 중 하나가 백석이다. 월북보단 재북에 해당하는 그는 어느 문학 형태 보다도 주관적으로 정서적 체험에 의존해 창작해야 하는 서정시의 대표주자다. 서정시에는 더더욱 개성이 자유롭게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특히 분단 직후 북한의 문학계는 경직성의 극단에 치달아 있었다. 그렇다면 지극히 탈이념화된 영역에서 작품을 썼던 그가, 이념으로 점철된 작품을 써야 하는 환경에 놓이게 된 것이다.
원래의 백석, 개인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백석의 언어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한다. 평안도 정주에서의 유년시절 즐겼던 놀이나 음식을 회상하고 추억한다. 커서 바라본 차가운 현실은 쓸쓸하고 섧은 자신의 감정으로 풀어낸다. 개인사는 결국 같은 시대를 공유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고, 그렇기에 독자는 백석의 문학에 보편적 감정을 덧씌워 바라본다.
그의 작품에선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회고하기보다는, 과거의 한 시점에서 그 상황을 기술하는 현장성이 느껴진다. <여우난골족>에선 어린이들이 했을 놀이들을 나열하고, 명절에 모인 가족들의 행위를 하나하나 서술하며 그 당시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한편으론, <수라>나 <선우사> 등 동물이나 음식에 인격을 부여하며 동심에서 기인한 상상력을 펼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민족과 공동체를 보여주면서도 어떤 사상적 색채를 띠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살아왔던 유년시절을 사랑하고 주변을 이루는 작은 것들에도 애정을 품을 뿐이다. 분단 전 그의 작품 대부분이 서정시로 분류된다. 전통과 동심을 이야기하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감상을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세계는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그렇기 떄문에 모두에게 공감받고 사랑받는 시를 써내릴 수 있었다.
입 막힌 백석, 더이상 자신의 언어가 아닌
몇 개의 키워드로 정의가 가능했던 분단 전 백석의 문학세계와는 달리, 분단 후 그의 시세계는 다면적으로 나타난다. 어느 시에선 노동의 ‘혁명적 열기’와 북한 사회의 ‘공산주의적 낙관성’을 선전하는 문학노동자의 모습을, 어느 시에선 여전히 동심적 세계를 추구하는 동화시인의 모습을, 아동문학이론가이자 시론가로서의 모습을, 마지막으론 문학 번역가의 모습을 보였다. 재북 문인이기에 분단 후 그의 행적이나 문학활동을 면밀히 파헤칠 정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정체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기린아,
아프리카의 기린아,
너는 키가 크기도 크구나
높다란 다락 같구나,
너는 목이 길기도 길구나
굵다란 장대 같구나.
네 목에 깃발을 달아 보자
붉은 깃발을 달아 보자,
하늘 공중 부는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라고,
백 리 밖 먼 데서도
깃발이 보이라고.
- 백석, '기린' 전문
당시 백석이 썼던 동시 중 하나다. 나름대로 문단에서 요구하는 대중 감화의 메세지를 끼워 넣으면서도, 그게 억지스럽지 않으려 노력한 티가 난다. 붉은 깃발이란 소재는 애당초 원래의 백석이라면 정말 유년 시절 쓰던 스카프 즈음으로 해석해야 겠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사회주의 정권을 강조하는 요소라 추론할 수 있다. 이것도 백석답진 않지만 나름의 타협이었다. 기린이란 소재로 동시의 동심지향성을 지키면서도, 국가가 원하는 정치적 메세지도 함유해냈다. 그러나, 북한 문단은 이거로 만족하지 못했다. 오히려 기린의 추상성을 지적하며, 이 때문에 혁명이란 메세지가 가려진다는 비판을 내놓았다. 백석은, 대안을 어떻게든 찾아보려했지만 북한 문단에 쉽게 녹아들지 못했다.
유년 화자를 통해 회상과 향수를 불러 일으키던 백석은, 이제 유년 화자를 혁명성을 보여줄 대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기존 그의 시세계는 어린 아이를 주인공인 작품에서조차 종종 쓸쓸함과 서러움을 나타내곤 했다. 유년화자는 다면적 심리구조를 가진 존재였다. 차가운 현실 속 아이의 운명을 그려낸 <팔원-서행시초3>이 그 예다. 그러나, 단적인 예로 <멧돼지>라는 작품을 살펴보면, 화자 ‘나’는 당당하고 거리낌이 없지만, 그 양상이 지극히 단면적이다.
분단 전 어느 시에서도 명확한 사상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가 원수를 향한 충성을 동시에서 드러낸 것도 찾아볼 수 있다. <송아지들은 이렇게 잡니다>의 ‘송아지들은 어려서부터도 원쑤에게 마음을 놓지 않으니까요.’가 그 예다. 인격체가 아니라 대상으로서의 아동을 그려내는 것에 골몰된 탓에 서정시에서조차 정치적 메시지를 강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의 시에 전통을 불어넣었던 방언도 사라졌다. 추상적이지만 어떤 묘한 토속성과 서정성을 이끌어내던 시어들도 사라졌다. 직설적이고 문단에서 요구하는 혁명성을 충족하려는 듯 투쟁과 의지가 불타오르는 시도 보인다. 우리가 사랑했던 백석의 모습은 아니었다.
백석의 언어를 기리며
모두에게 비극적인 시인의 말로는 안타까웠나 싶다. 김연수의 <일곱해의 마지막>은 동시마저 혁명성 부족으로 지탄받자 러시아 문학 번역일로 돌아선 시인 백석의 이야기를 다룬다. 더이상 자신의 작품을 쓰지 않는 시인. 그럼에도 실제 역사보다 따뜻한 방향으로 백석의 끝을 다룬다. 러시아 문학과들과 엮여들며 자기 얘기를 할 수 없게 된 시인이 다시 정체성을 찾아나가게 되는, 어쩌면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차갑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를 쓰던 그가 북한 정부의 언어로 작품을 쓰려고 하니 서투르고 어설퍼질 수밖에 없다. 북한 문단 권력이나 주변 문인들은 백석의 시를 새로운 시도로 보면서도, 여전히 혁명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독자는 이념으로 가득한 백석 시에 어색함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백석의 이름을 빌린 다른 이의 언어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쓸쓸함이 느껴져서 더욱이 서글프다. 어린시절과 민족과 토속을 떠나서 거미 하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작은 것마저 사랑하던 시인이 이제는 사랑하는 것에 대해 한 톨도 쓰지 못하게 되었을 때의 심정이 참 애달프게 느껴진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래도 한 편의 글이라도 더 남길 순 없었을까하는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김가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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