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잡지, 나의 과거 나의 미래 [도서]

잡지에 스며든 나의 이야기
글 입력 2021.12.16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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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몇 살 때쯤이었을까. 아주 옛날, 한 다섯 살 아니 여섯 살 정도였던 것 같다. 누울 만큼 컸던 소파와 커다란 브라운관 TV. 입에 가득 넣고 먹었던 버터 쿠키의 달콤함. 투명한 글라스에 담긴 얼음과 따라 마셨던 델몬트 100% 오렌지 주스. 그리고 책장 한구석에 쌓인 <여성동아>와 <우먼센스>까지.


 

 

최초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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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엄마와 미용실을 가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엄마가 파마하는 시간 동안 미용실 아주머니가 주는 과자와 오렌지 주스를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집에 있는 TV보다 훨씬 큰 화면으로 투니버스 채널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엄마가 미용실을 자주 가기를 바랐는데, 그래서 일부러 아직 곱슬기가 충분한 엄마의 머리를 매만지며 눈을 크게 뜨고 “엄마, 미용실 갈 때가 되지 않았어요?” 하며 은근슬쩍 엄마의 의중을 떠보곤 했다. 그런 애교 전략 덕분인지 아니면 그냥 엄마가 파마를 자주 했던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기억 속엔 엄마와 함께 갔던 미용실에 대한 기억이 꽤 많이 남아 있다.

 

그날도 난 평소처럼 엄마의 미용실 방문을 따라나섰다. 미용실에 도착하자마자 난 왼손으론 과자를 오른손으론 리모컨을 집어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내가 보는 애니메이션의 방영 시간이 바뀌어 버리고 만 것이다. 풀 죽은 얼굴로 TV를 보다, 어느새 흥미를 잃은 나는 열심히 혼자 놀아봤지만 그래도 시간은 잘 가지 않았다. 뭔가 재미난 게 없을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중,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잡지로 향했다. 한창 글자 읽는 재미에 빠져 있던 그즈음의 나는 잡지로 손을 뻗었다. 아마 여섯 살의 눈에 잡지는 ‘엄마가 파마하며 읽는 커다란 동화책’ 정도로 보였을 테니 망설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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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난 처음, 여섯 살배기의 자그마한 손으로 두꺼운 <여성동아>를 넘겼다. 그 순간의 기억은 특이하게도 무척 선명한데, 적당히 묵직한 무게감과 스노우지 특유의 빳빳한 질감이 어린 내겐 정말 인상적이었다. 조심스레 잡지를 넘기며 나는 그 종이를 가득 채운 광고와 사진 그리고 활자를 탐독했다. 주방 인테리어와 화장품, 잘 모르는 여자 연예인들의 화보와 인터뷰까지. 화려하고 반짝이는 세계의 일면을 엿본 것 같아 나는 잡지의 마법에 정신없이 홀려버리고 말았다.

 

그날 이후 나는 엄마와 미용실에 갈 때마다 책장에 쌓인 잡지를 읽었다. 한 권을 다 읽을 때마다 맨 왼쪽 책장에 놓인 잡지를 맨 오른쪽 책장에 옮겨 꽂았고, 장장 6개월이 걸려서야 모든 잡지를 옮길 수 있었다. 이제야 느끼는 거지만 비록 그림과 사진 위주의 독서였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잡지 일독(一讀)이었고, 이 경험은 앞으로의 나의 행보에 적잖은 영향을 줬다.

 

초등학교에 진학하며 이사를 한 나는 더는 엄마와 함께 미용실에 같이 가지는 않았지만, 하교 후 학원 버스를 기다리며 미용실에서 먹었던 쿠키와 오렌지 주스 그리고 잡지의 세계를 떠올리곤 했다. 그런 기억들은 그때의 내게도 무척 아득하게 느껴져 돌아가고 싶은 일순들로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가장 뜨거웠던 순간에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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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의 공백기를 거쳐, 잡지가 내 인생에 들어왔던 두 번째 사건은 고등학교 시절 벌어졌다. 당시 17살의 한 남자 고등학생의 머릿속엔 농구밖에 없었고, 점심시간과 저녁 시간엔 체육관으로 달려가 공을 던졌다. 목표는 체육대회 때 열릴 반 대항 농구대회의 우승. 농구대회를 앞두고는 신경전이 대단했는데, 평소 친하던 아이들도 서로 말을 안 할 정도였다. 대망의 결승전 날, 우리 팀은 원맨팀이었던 상대 팀 에이스를 집중 마크하며 마침내 우승할 수 있었다. 한창 우승의 기쁨에 취해 있을 때, 나의 눈에 코트에 풀썩 주저앉아 있던 상대 팀 에이스가 보였다. 오가며 안면은 있었는데, 친하지는 않은 애였다. 안쓰러운 마음에 일으켜주려 다가가 손을 내밀었지만, 그 애는 내 손을 잡기보단 벌떡 일어나 농구장을 떠나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며칠 뒤가 그 애의 생일이란 소문을 들었다. 나는 오랜만에 서점에 가, 월간 [ROOKIE]를 한 권 샀다. 그 애가 가장 좋아한다는 농구 선수 르브론 제임스의 포스터가 담긴 호였다. 잡지를 건네자 그 애는 피식 웃으며, 이건 벌써 샀다고 말했다. 그러냐며 아쉬운 마음에 돌아서려는 내게 그 애는 이따 점심에 같이 농구나 하자는 말을 던졌다. 그리고 그건 바로 7년 지기 소울 메이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함께 농구 잡지를 보며 NBA에 대해 밤새도록 떠들었던 시간. 함께 간 여행과 그때 먹었던 술. 아직도 연락이 끊이지 않는 우리. 아마 평생을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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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첫사랑의 순간도 잡지와 함께였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 옆자리에 앉았던 그녀는 유난히 눈썹이 진하고 눈이 맑았다.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하얀 편이었는데 영화 보는 걸 무척 좋아했다. 말을 걸어본 적은 없었지만, 친구들과 대화하는 걸 슬쩍 들었을 때 인생 영화가 ‘이터널 션샤인’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날부터 난 한쪽 팔에 <씨네21>을 끼고 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90년대 씨네 키드들이 <키노>와 <스크린>을 들고 다녔던 것처럼. 그렇게 난 열심히 <씨네21>을 읽고 영화를 보며 그녀와 말할 기회가 생기기를 고대했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수능도 끝나겠다, 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수능 끝난 고3에게 남는 건 시간밖에 없었고 난 노트북을 가져와 영화를 봤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같은 최루성의 일본 멜로를 보고 있을 무렵, 그녀가 처음 말을 걸어왔다.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고. 그렇게 우리는 대화했다. 영화 이야기를 하고, 좋아하는 소설과 드라마, 만화 이야기를 하며 밤새 통화했다.


영화도 같이 봤다. 짐 자무시 감독의 ‘패터슨’이라는 영화였는데, <씨네21>에 나온 평론가의 비평을 함께 읽으며 각자 영화의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얘기했다. 물론 난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영화 얘기에 저렇게 열중할 수 있는,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녀가 가장 좋았지만 말이다. 술 한잔을 하며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는 대사를 유쾌하게 던지는, 그런 사람. 비록 그녀와 연인이 되진 못했지만 잡지는 내게 또 한 번 귀중한 연을 선물해줬다.


 

 

지금, 여기의 나 그리고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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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대학에 간 내가 학보사, 그중에서도 문화부를 택했던 것은 아마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그동안 잡지로 길러온 활자에 대한 친숙함 그리고 다양한 문화에 대한 관심이 날 그 길로 이끌었을 테니까.

 

학보사에 들어가고 나서도 기사 주제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때마다 나를 도와줬던 것은 역시, 잡지였다. 학보사에선 방학 한 달 동안 혹독한 ‘방중 회의’ 기간을 거치며 기삿거리를 뽑아낸다. 다들 야심 차게 방중 회의에 임하지만, 시작한 지 3주 정도가 지나면 이제 더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이래선 안 되겠다며 일탈처럼 떠난 경주 여행. 그곳에서 난 새로운 취향의 세계를 열어준 두 잡지를 만났다. 오가며 탔던 KTX에서 읽었던 [KTX 매거진], 경주의 한 갤러리에서 발견한 <월간 미술>은 내게 ‘사찰 여행’과 ‘방치된 공공 미술’이라는 두 특집 기사에 대한 힌트를 줬고, ‘나 홀로 여행’과 ‘전시회 관람’이라는 취미는 덤으로 얹어줬다. 덕분에 무사히 방중 회의를 끝마친 나는 이후에도 종종 잡지를 보고 영감을 얻으며, 슬기롭게 학보사 생활을 헤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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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생활 2년을 그렇게 문화부, 학보사에 쏟으며 좋은 글과 취향의 세계에 몰두했다. 2년의 세월을 보내며 느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단어 하나하나의 소중함. 그런 단어들이 문장을 이루고 하나의 글을 만든다. 마침내 종이에 인쇄되어 나온 글을 볼 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가슴에 맴돈다. 그래서 그냥 바라본다. 종이와 잉크가 버무려져 나는 고소한 냄새, 활자와 자간의 규칙적인 모양. 이런 물성을 가진 것들이 자연스레 느껴질 때 드는, 그 기분 좋은 고양감.

 

전역 이후 무료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요즘의 나는 문학 계간지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다. <문학동네>, <릿터>, <창작과 비평> 속 시와 소설을 읽다 감상에 젖을 때면, 나도 무언가를 만들고 지켜나가고 싶다는 소망을 한다. 활자 매체의 위기, 아니 이제는 정말 종말이라는 당면한 현실에서 망국의 신하처럼 그 자리를 지키는 마지막 사람이 되자는 목표. 나는 그런 삶을, 생활을 살고 싶다. 잡지, 신문, 활자, 글, 단어, 문장의 세계에서, 그런 것을 만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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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는 아직 모르겠다. 결혼은 할는지, 어떤 집에서 살는지. 서점에 가면 만날 수 있는 [KINFOLK], <마이웨딩> 같은 잡지를 보며, 이런 삶은 어떨지 상상해본다. 잡지 속에선 백색 도화지 같은 내 현재에 밑그림이 될만한 삶을 만나곤 한다. 그래, 내 삶 속 중요한 순간엔 언제나 잡지가 있었다. 과거에 그랬듯, 지금 보고 있는 잡지 속에서 난 항상 무언가를 발견할 테니. 다가올 미래를 향해 눈길을 돌린다. 그곳엔 잡지를 한 아름 안고 있는 내가 웃으며 서 있을 거다.

 

 

[정주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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