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작사가 조동희의 '사랑을 사랑하게 될 때까지' [도서/문학]

삶과 사랑의 노랫말이 반기는 최소우주에 입장하셨습니다.
글 입력 2021.12.06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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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못 소란스러웠다. 음악을 사랑하게 될 때까지 일련의 시간이 그러했다. 클래식 피아노 애호가이신 어머니는 필자가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라셨다. 당신께서는 당신을 닮은 아이가 건반 앞에 앉아있노라면 더없이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셨다. 그녀의 사랑이 필자에게 이식되었다.

 

거부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짐짓 행복한 미소를 짓는 자신을 발견해서야 깨달았다. 필자는 피아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부터였다. 대중음악을 가득 넣은 MP3 플레이어를 주머니 속에서 손으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반목과 재고를 거듭한 끝에 피아노와 작별했고 예술에 회의를 느꼈을 무렵 문학을 만났다. 감정을 요하는 일을 결코 선택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어느새 시와 소설을 애정하게 된 필자를 보며 자신을 부정하고 싶었다.

   

형용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직면한 후에야 글을 쓰며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다. 애증의 대상이었던 피아노와 문학과 예술을 그저 과거에 두지 않기로 했다. 청자로서 음악을 듣고 독자로서 노랫말을 곱씹는 자연스러운 여정에 작사가 조동희가 있었으며 지금도 존재한다.

 

 


멈출 수 없음을 멈출 때까지



 

……

때묻은 내 마음은

깨끗하게 씻기네.

시력이 좋은 두 눈과,

아직 튼튼한 두 다리로

나는 언제든 떠날 수 있지

그 어디라도

바람이 내게 말하네

모든 건 흘러간다고

난 멈출 수 없어

이제 다음 발걸음을 옮기네

 

- 조동희, <행복한 여행자>, 2011

 


눈을 감고 오로지 엄지손가락의 감각에 의존하여 책장을 짚었다. 이야기를 이루는 모든 글귀가 중요하지만 다 기억할 수는 없어 단 한 줄이라도 오래 보듬고 싶었다. 우연이라는 장르를 구축해서라도 말이다.

 

좌측 동공에 다다른 빛이 조명한 구절은 “난 멈출 수 없어 / 이제 다음 발걸음을 옮기네.”였다. 스물넷의 나이로 장필순 5집에 수록된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를 작사한 그녀의 책을 읽으며 스물넷을 앞둔 필자는 버둥거렸기 때문이다.

 

<행복한 여행자>를 향한 답장을 띄워본다. 걸음을 떼는 까닭은 현재에 머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건 사그라드니까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두 다리는 근손실을 면치 못했고 두 눈은 주변을 살필 일견을 허락지 않았다. 행복은 언제든 내 마음에 묻어 있는데 떠나야만 가질 수 있는 거라 여겼다.

 

‘행복을 미루지 마요’, 우측 눈동자에는 필시 필자를 위한 화답이라 간주하고 싶을 만큼 간절한 심사가 담겼다. 진정 그윽이 각오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한 면 사이로 나란히 공존하는 문장들이 마치 필자를 꿰뚫듯 공명케 했다. 눈이 감기는 반사가 의식적으로 느껴졌을 만큼이나.

   

이유를 불문하고 무엇을 멈추지 않는 태도는 열정이란 단어로 갈음하기에 부족하다. 겨우내 비축한 동력을 소모하고 적금 만기일까지 저축한 예금을 소비하며 무한한 것은 어느덧 자라 있는 손톱뿐이라고 자조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잠시 멈추어 음악을 들어보자. 그 순간만큼은 무한할 거라 잠시 착각해보자. 소생할 수 있을 것이다.

 

 


멈추는 것을 멈출 수 없을 때까지


 

 

……

온몸에 스며든 너의 입자 모두

저 바람이 데려갈 때까지

저 시간이 훔쳐갈 때까지

그렇게 다시 빈 몸이 될 때까지

 

온몸에 스며든 너의 입자 모두

저 바람이 데려갈 때까지

저 시간이 훔쳐갈 때까지

사랑을 사랑하게 될 때까지

 

사랑을 사랑하게 될 때까지

 

- 조동희, 『사랑을 사랑하게 될 때까지』, 2021, 224면

 

 

못갖춘마디라서 완전해질 수 있다. 결핍의 처음이 충족의 마지막과 박자를 맞추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타인을 자신의 영역으로 들이는 결정적인 동기는 공간에서 기인한다. 당신과 나의 차이가 서로의 공백을 메우기를 고대하는 동시에 빈틈의 상한선을 넘지 않기를 바란다.

 

도돌이표는 두려움이다. 경험칙은 과오를 답습하는 자신을 증명한다. 개인의 궤적은 모든 이를 품을 수 없어서 관찰과 측정이 조악할 수 있다는 한계에도 말이다. 즉, 사람이 변하기란 퍽 순조롭지 못하다. 상대를 친애하는 건 온몸을 흐르는 혈류의 태생일까.

 

다음 악장이 기다려진다. 훗날을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미지의 설렘을 지탱하는 축은 앎임에도 불구하고. 기호하는 노래를 반복해서 듣듯이 윤색된 사랑의 일면만을 간직하려 한다. 온전한 사랑을 사랑하게 되려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야 한다.

 

‘언니, 사랑이 뭐예요’, 흡사 웅크리듯이 턱 밑으로 끌어당긴 다리를 두 팔로 감싸 앉은 사람의 삽화 뒤로 영원히 단언할 수 없는 물음이 놓여 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쥐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손에 쥐어봐야 알기 때문에, 영원히 알 수 없기에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멈추는 것을 멈추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숱한 선택 가운데 피로를 이겨내지 못할 낡은 맥박이 멈추지 않을 때까지. 숨이 멎기 전에 사랑하는 정경을 사랑해야겠다.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는 조동희 작사가는 마음의 모양을 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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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모두 인사해도 내겐 그저 12월의 하루일 뿐”, 조동희 작사가는 특별한 날에도 무채색은 곧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혼자여야 안전한 작금에 고독으로 앓는 여럿에게 고하고 싶다. 비로소 홀로인 삶을 무방하다 느낄 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진부하지만 진심이다.

 

지금껏 겪어온 크리스마스보다 다가올 것이 좀 더 남아 있기를 바란다. 스무 번 남짓한 필자의 지난 성탄절을 회고하다 문득 부모님께 허락될 각별의 그 날은 스물다섯 해를 거듭할 수 있을지 헤아려본다. 내 곁에 있는 사랑을 사랑으로 인식한 별안간의 사건이었다.

 

“더욱이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조금씩 더 떨어져 있는 와중에는 (중략) 각자 자신의 우주를 돌아가게 한다고 생각해요.”, 조동희 작사가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완전한 우주를 이루는 개인 모두를 ‘최소우주’로 일컬었다. 어제의 음률을 오늘 새로이 수용하듯 몇 곱절의 연대를 관통하는 우리 모두는 우주임이 분명하다.

 

사뭇 궁금하다. 그녀의 최소우주는 무엇으로 상징되는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사랑과 사람이라는 그녀의 입김은 겨울밤의 냉기를 가시게 한다. 조동희 작가의, 작사가의 우주는 따뜻할 것이다. 소유에 초연한 사랑이 있을 테니까. 상대의 행복이 내게로 전이되듯 온도도 전해질 테니까.

 

삶을 다 살아내게 될 때까지, 나의 최소우주를 사랑하게 될 때까지, 모두 안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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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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