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노장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 복서와 소년

글 입력 2021.12.09 14:10
댓글 3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크기변환]포스터.jpg

 

 

 

글을 열며

 

아기 코끼리 한 마리가 있다. 그 코끼리의 발목에는 말뚝에 연결된 가는 줄이 묶여있다. 아기 코끼리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것을 뽑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아기 코끼리는 어른 코끼리가 되었다. 덩치도 커지고, 몸무게도 늘었고, 힘도 강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말뚝 주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학습된 무기력과 관련이 있다. 특수교육학 용어사전에 따르면, 학습된 무기력이란 피할 수 없거나 극복할 수 없는 환경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경험으로 인하여 실제로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 있거나 극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러한 상황에서 자포자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2021년 서울의 대학로, 코끼리 두 마리가 출몰했다.

 
 
연극, <복서와 소년>

 

 

서울 외곽 허름한 요양원. 억울한 누명으로 학교폭력 가해자가 되어, 사회봉사 활동을 명 받은 고등학생 셔틀이 요양원 가장 안쪽 구석 독방에 페인트칠 봉사를 하러 온다. 독방에서 생활하는 이는 파킨슨 환자 행세를 하는 왕년의 복싱 세계 챔피언 붉은 사자. 서로의 존재가 불편하고 불쾌한 두 사람은 작은 일에도 사사건건 대립하며 날을 세운다. 어느 날, 붉은 사자가 복싱 챔피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셔틀은, 진짜 학교 폭력 가해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붉은 사자에게 복싱을 알려달라 부탁하고, 이에 붉은 사자는 셔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는데……


- 시놉시스

 
 
<복서와 소년>은 한국 전쟁, 베트남 파병, 민주화 운동과 같은 굵직한 현대사 속 흐름을 온 몸으로 받아낸 전직 세계 챔피언 '붉은 사자'와 또래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싶은 철없는 마음때문에 일진 대신 사회 봉사 명령을 받게 된 셔틀의 우정을 다룬다. 사회에서 누구 하나 관심을 주지 않는 블랙독들의 우정 앞을 나이도 돈도 심지어 저승사자도 막을 수 없다.
 
이들의 새로운 도전을 막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그들 자신이다. 계속되는 실패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까지 사회적 잣대를 들이민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엉망진창에 제 멋대로인 이들이 손을 잡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둘은 서로가 가장 약해져 있을 때, 가장 큰 용기를 주고 자신이 가진 것들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기하며 상대가 살 수 있도록 격려한다. 서로가 서로를 구원한 것이다.
 
 
 
무도로서의 '복싱'

 

무도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무도란 보통 무술을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자세를 뜻한다. 이때, 복싱은 올드스쿨 무도의 상징이다. 시간이 지나며, 많은 무도장들이 생겼다. 주짓수도 무에타이도 종합 격투기도 하나씩 늘어났고, 불량 청소년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곳에서 이 무도는 여전히 스테디셀러다.

 

내가 그것을 최초로 인지한 것은 가네시로 가즈키의 'Go'다. 소설의 주인공은 재일한국인이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조선총련계 학교에 다니다가, 한국으로 국적을 바꾸고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한다. 북한에도 한국에도 일본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던 그는 어느 집단에서든지 배척당한다.

 

그러나, 그는 여러 사건을 겪으며 몇 가지를 깨닫는다. 그중 하나는 나는 그저 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괄편집_go 스틸컷.jpg

▲ 영화, [Go]

 

 

덧말) 이 소설은 현재 내 책장에 없다. 2019년, 과외를 하던 중학생에게 선물해 줬기 때문이다. 당시 남들보다 조금 더 아픈 사춘기를 겪고 있던 녀석이었다. 나의 가장 소중한 책이 그 친구의 책장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두 번째는 김려령 원작의 영화 <완득이>다. 내용적 측면에서 완득이도 Go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장르적 유사성 때문이다. 다만,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Go가 개인적 성장에 대해 다룬다면, 완득이는 더욱 사회적인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일괄편집_완득이.jpg

▲ 영화 <완득이>

 

 

<복서와 소년> 속 붉은 사자는 의 아버지와 <완득이>의 동주를 정확히 절반씩 닮았다. Go에서 주인공이 자신에게 도전해오는 일본인들을 모두 때려눕힐 수 있었던 까닭은 아버지가 프로 복서였기 때문이다. <완득이> 속 동주는 몸은 그다지 강하진 않지만, 남들이 불량 학생이라고 낙인찍은 완득이를 품어낸다.

 

<복서와 소년>의 붉은 사자는 이 둘의 장점을 적절히 섞은 하이브리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 사자의 등장은 우습다. 극은 휠체어에 탄 붉은 사자가 입에는 편지 뭉치를 물고 사지를 떨며 등장한다. 이러한 말은 붉은 사자가 다른 노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구분 짓기의 기저에는 "붉은 사자는 여타 노인들과는 달라."라는 마음이 있다. 구분 짓기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다시 구분을 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자신의 능력을 한정 짓고 스스로 자기만의 방에 갇혀 버린 할아버지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굳이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극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붉은 사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극의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더욱 문제가 있다. 약자를 희화화하며 얻은 웃음에는 죄책감이 묻을 수밖에 없고, 이는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웃고 즐길 수 없게 만든다.

 

2012년 <복서와 소년>의 음악은 정재일이 감독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한다면, 익히 알고 있을 이름이다. 그는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에서도 음악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단순한 멜로디의 리코더 소리가 인상적인 <오징어 게임>의 주제곡 'Way Back then'을 작곡했다.

 

2021년의 <복서와 소년>은 정재일이 만든 2012년의 그 음악을 그대로 가져온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흐른 만큼 그것들이 다소 올드하게 느껴진다. 몇 마디 더 첨언하자면, 10대가 힙합을 좋아한다는 것은 어른들의 착각이다. 페북 픽이란 단어를 생각해보자. 이유는 모르겠으나, 의외로 요즘 애들은 노란 장판과 소주 냄새가 짙게 나는 발라드를 좋아한다.


 

 

그 많던 노인과 아이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노인과 불량 청소년. 이들의 아지트는 동네 근린공원이었다. 근린공원은 낮에는 멋쟁이 할아버지께서 지팡이를 기대어 두고 벤치에 앉아 계셨으며, 밤에는 학교에도 집에도 있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낄낄거렸다. 그리고 낮이나 밤에나 자욱한 담배 연기는 덤이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을 뒤덮은 이후, 공원은 텅텅 비었다. 그들의 실종을 눈치챈 것은 많지 않았다. 언제나 늘 조용히 배경처럼 주변부에 존재했지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알아달라고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낼 수 없었다. 자칫하면 '진상', '일진'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다며 손가락질받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부끄러운 초상이다.

 

 

 

신동하.jpg

 


[신동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3
  •  
  • 쥬쥬
    • 따뜻함을 느끼고 싶은  시기에  같이 나누고 싶어지네요~^^
    • 0 0
  •  
  • 바람의파이터
    • 지나가는 파이터로써 흥미로운 글이네요 추천합니다
    • 0 0
  •  
    • Go참 좋은 소설입니다.
    • 0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