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음을 대하는 자세 [영화]

죽음도 결국 삶의 일부다. 롭 엡스테인, 제프리 프리드먼 <엔드게임: 생이 끝나갈 때>
글 입력 2021.12.02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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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나 이룬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벌써 21년의 마지막 달이 찾아왔다. 연말이 되면 으레 올 한 해를 뒤돌아보고, 이루지 못한 것을 반성하며 새해의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내년에는 무엇을 이뤄야겠다.' 내지 '앞으로는 이렇게 살아야겠다.'와 같이. 나 또한 내년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대학교 4학년으로 복학하여 졸업 전에 어떤 것들을 더 준비해야 할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무엇인지, 그곳에서 필요로 하는 역량은 무엇인지. 또 금연, 금주, 다이어트와 같은 진부하고도 식상한 다짐까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여기서 한 가지 의문. 우리는 왜 '어떻게' 혹은 '잘' 살아가려고 노력할까. 그저 남들이 그렇게 살아가니까? 혹은 어려서부터 그것이 좋은 삶이라고 배워와서? 나는 아마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에 '죽음'이라는 개념이 스리슬쩍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죽음을 마주했을 때 후회 없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노력한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네 삶은 더욱 가치 있어진다.  언젠가 다가올, 피할 수 없는, 반갑지 않은. 그 죽음이 적어도 내게, 가까운 미래에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한 채.

 

그렇다면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이들은 과연 어떨까. 후회 없는 삶을 살았노라 만족하고 죽음을 받아들일까, 아직 하고 싶은 것이 많다며 받아들이지 못할까. 롭 엡스테인, 제프리 프리드먼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엔드게임: 생이 끝나갈 때>는 죽음을 목전에 둔 인물들을 담담하고 담백하게 조명한다. 죽음을 멈출 순 없지만, 다룰 줄 아는 그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내가 생각하는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엔드게임 사진1.jpg

 

 

"전 모르겠어요. 미트라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포기하려고요? 돌보기 힘들어서요?"

 

"딸이 고통받는 게 싫어. 너무 힘들어하잖아."



 

"어느 부분이 힘드세요? 부검 때문인가요? 아니면 따님이 죽는다는 생각에 괴로우신 건가요?"

 

"부검. 저라면 하겠지만, 자식이라 어떡할지 모르겠어요. 쉽지 않네요. 너무 마음 아픈 일이라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다른 엄마들은 이런 고통을 안 겪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차마 내 딸을..."

 

영화 <엔드게임: 생이 끝나갈 때> 中

 

 

한 사람이 죽는다. 자연의 섭리이고, 자연으로 돌아간다.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가 아닐까. 남겨진 자들은 그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안고 살아가야 하기에.

 

불치병에 걸린 미트라의 남편 하미드는,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한 줌 희망을 놓지 못한다. 기적을 바란다. 헤어짐, 마지막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나 그의 장모 미트라의 어머니는 미트라가 고통받는 모습을 더 이상 보기 힘들다며 치료 중단을 주장한다. 그렇게 그 둘은 양극단에서 대치한다.

 

죽음을 다루는 환자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그들이 두고 떠날 가족의 이야기를 먼저 해보고 싶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만 하는 그들의 처참한 심정을 누가 감히 측량할 수 있을까? 치료를 중단하면 수 일 내로 삶이 끝난다. 치료를 계속하면 수 주 내지 수개월은 그 삶을 연명할 수 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 나는 고통스러운 수 주, 수개월보다 원하는 곳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맞이하는 죽음이 환자에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가족이잖는가. 이렇게 차갑고도 객관적인 평가가 그들에게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 또한 내 가족이 그 상황에 처한다면 그전부터 확고하다고 생각해온 죽음관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미드와 장모의 말을 다시 곱씹어 봤다. 하미드의 말을 들을 때에는 내가 하미드였고, 장모의 말을 들을 때에는 내가 장모였다. 참으로, 인간의 죽음과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는 구원 없는 이야기이다.

 

나의 어머니는 응급실 수간호사로 근무했던 적이 있다. 3차 병원이었고 규모도 컸기에 응급실에선 하루에도 몇 명씩 생을 오갔다고 한다. 가까스로 죽음을 피해가도 온갖 튜브에 의존해 의식 없이, 기약 없이 그저 '살아만'있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그러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산소호흡기를 달아야 할 때가 된다면, 달지 말아라." 그녀는 존엄하게 생을 마감하겠노라 말했다. 나는 알겠노라 말했다. 후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는 그 순간이 오면 나는 그 말을 후회할까, 후회하지 않을까.

 

 

  

죽음을 다루다.


 

엔드게임 사진4.png

 

 

"호스피스는 작별하는 곳이라는 편견이 있는데 엄밀하게는 과정을 돕는 곳이죠. 간호사로 40년을 일했어요. 입원했다가 그대로 죽는 환자도 있어요. 전 그렇게 죽기 싫어요."



 

"저는 시도해 볼래요."

 

"암도 버거운데 화학 요법까지 하면 많이 힘들 거예요."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암은 밤하늘에 떨어지는 소행성 같아요. 큰 돌덩이들이 저한테 쏟아지는데 하늘을 보며 놀라 이러는 거죠. '빗나갔네'. 절 못 맞췄어요. 전 아직 살아있어요. 죽을 수도 있었는데 여전히 버티고 있죠."

 

영화 <엔드게임: 생이 끝나갈 때> 中

 

 

병원에서 40여 년을 일한 한 간호사 킴은 불치병에 걸려 치료를 거부한다.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가길 선택한다.  반면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팻은 불치병에 걸려 화학 요법을 받기를 원한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버티고 있다며. 불치병에 걸린 두 사람은 반대되는 결정을 한다. 각자의 가치관에 맞게.

 

킴은 자택으로 돌아가 3주 후에,

팻은 화학 치료를 받기 전에

생을 마감한다.

 

킴은 원하는 방식으로 마지막을 맞이한다. 그러나 팻의 이야기에서 인간 삶의 허망함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하루하루가 귀하고 모든 날이 소중하다, 매 순간이 선물이다, 살아있는 게 선물이다며 생의 열정을 불사르는 팻이 고통스럽지만 살겠다고 결정한 그 화학 요법을 받기도 전에 생을 마감했다는 것. 죽음을 각자의 방식으로 다루고자 했지만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패한다. 죽음을 다룬다는 말이 어쩌면 너무나도 오만방자한 말이 아닐까. 죽음을 멈출 순 없지만, 다룰 줄 아는 그들의 이야기라고 소개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스럽겠지만 인간의 사망률은 100%다. 사람은 누구든 언제든 죽는다. 늦출 수는 있어도 죽음이라는 것을 완전히 피해 갈 수는 없다. 영화에서 이들이 죽음을 다루는 법이라고 말한 것은, '나의 죽음, 나의 마지막을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겠다.'가 아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다룬다'가 아닐까. 그리고 이 '죽음을 다루기' 비단 죽음 바로 앞에 선 이들이 아닌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형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으니까. 죽음은 우리 개인에게 무지다. 무지는 곧 공포다. 죽음을 인지하자. 죽음을 알아가자.

 

 

 

죽음과 관계를 맺다.


 

엔드게임 사진6.jpg

 

 

"숙제를 주셨잖아요. 죽음과 친구가 되라고 했죠. 숙제를 못 했어요. 실패예요. 전 살고 싶어요. 못 받아들이겠어요."

 

"친구가 되긴 어렵겠죠. 하지만 관계를 맺으라는 숙제였다면 어때요? 죽음을 알아가는 거죠. 꼭 친해질 필요는 없어요. 알면 덜 무서울 거예요. 모르는 채 가둬두고 쳐다보지도 않고 만지지도 않는 것보다는.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 같아요. 내가 통제할 수 없고요."

 

"죽은 뒤가 어떤지 알 방법은 없죠. 우리 힘으로 그것을 바꿀 수 없다면 익숙해지는 것도 방법이겠죠. 그러니 죽음에 관한 한 우리의 목표는 익숙해지는 거예요. 그 수수께끼를 안고 사는 데 적응하는 거죠. 그게 더 현실적이에요. 수수께끼를 푸는 것보다."

 

영화 <엔드게임: 생이 끝나갈 때> 中

 

 

죽음과 친구가 되어라. 죽음을 향해 내몰려진 이에게 내리는 숙제 치고는 다분히 잔인하다. 누가 죽음과 친해지고 싶겠는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아다녔고 옛날 옛 적 한 부모는 아픈 아이를 위해서 찬물 떠다 놓고 살려달라 기도한다. 의료가 발달한 것은 죽음을 늦추기 위해서이다. 죽음과 친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든 죽음을 대면하고 싶지 않다. 다만 지금 흘러가는 이야기의 인물들은 이미 죽음의 실루엣을 어렴풋이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다. 뒤로 갈 수 없고, 천천히 앞으로,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의사인 B.J 밀러의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되기에, 모르지 말자는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간다.

 

죽음이라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그것이 좋은 결과를 야기할지 아닐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죽음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몇 년 간 많은 가까운 사람들과 이별했다. 이후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은 무던해진 느낌이 든다. 마냥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죽음이라는 수수께끼의 해답은 나도 마찬가지로 전혀 모르겠지만 그저 죽음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물론, 나쁘지 않은 쪽으로.

 

 

 

죽음도 삶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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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죽으면 시신 주변에 모두 모여 시신에 꽃을 뿌려요. 정말 아름답고 소박하죠. 한 사람이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예식이죠. 슬픔 속에서 보는 고인의 마지막 모습은 꽃이 놓인 평온한 얼굴이에요. 뭐랄까... 아름다운 슬픔을 뿌린 것 같죠. 슬픔은 힘들지만 가슴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감정이에요. 우리는 죽음에서 달아나려고 하지만 죽음도 삶의 일부입니다."

 

영화 <엔드게임: 생이 끝나갈 때> 中

 

  

죽음을 다루게 된 그들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다. 처음에 이야기했듯 이 영화는 죽음을 목전에 둔 인물들을 담담하고 담백하게 조명한다. 어느 죽음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치료를 거부한 것도, 치료를 선택한 것도, 어떤 선택도 내리지 못한 채 고민하는 것도, 그들 나름대로 죽음을 다루는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의 마지막 모습은, 모두 꽃이 놓인 평온한 모습이다.

 

의사 B.J 밀러는 말한다. 우리는 죽음에서 달아나려고 하지만 죽음도 삶의 일부라고. 삶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죽음도 삶의 일부라면, 죽음도 마음먹은 대로 원하는 순간에 드라마처럼 찾아오진 않을 것이다.

 

장자는 삶과 죽음을 자연스러운 자연의 변화로 인식하라고 했다. 아침이 지나 저녁이 오고, 저녁이 지나 밤이 오는 것처럼. 내가 원하지 않아도 저녁은 오고, 밤은 깊어간다. 죽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죽음을 지금 내가 살아온 삶의 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죽음에 대한 거부감과 공포만 쌓여갈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여러분은 죽음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 과연 죽음은 삶의 일부인가? 삶의 끝인가? 죽음은 거부해야 하는 걸까, 순응해야 하는 걸까. 여러분의 죽음을 다루는 각기 다른 태도들이 궁금해지는 12월의 어느 날이다.

 

 

 

 아트 인사이트 에디터 테그.jpg

 

 

[최원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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