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심장을 주세요, 여기에도 사람이 있으니 [도서/문학]

글 입력 2021.11.28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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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4일, 경남 거제의 한 대형조선소 내 50대 하청업체 노동자가 '감전'이라는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하지만 원청과 하청업체는 원인불명으로 몰아가며 산재 신청을 승인하지 않았다. 최근 대우조선해양의 발판업체 진우기업은 조선업 일감이 줄어들자, 혹독한 임금삭감과 대량해고로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을 생존의 극한까지 내몰았다.

 

조선소 노동자들의 사망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지적은 반 세기동안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얽혀 있는 여러 문제들 중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되고 있지 않다.

 

조선소에는 하청 노동자가 대부분이다. 하청노동자들은 업체를 많이 이동하게 되면서 생소한 환경에서 작업한다. 충분한 안전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사고가 반복된다.

 

이들은 출근시간 8시에는 모든 일할 준비를 마쳐야 한다. 점심시간 1시간, 오전 오후로 10분씩 휴식시간이 주어진다. 잔업이 있는 경우 9시 퇴근 시간 전까지 쉴틈 없이 강도 높은 업무가 이어진다. 하청업체에서는 빨리 물량을 처리해서 이익을 내야 하기 때문에 안전보다는 생산 위주의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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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장편소설 『제비심장』은 조선소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 속에는 조선소 하청 노동자들의 삶이 담긴다.

 

『제비심장』에 대한 기대감은 당연했다. 소설 『철』에서 이미 한번 다뤘던 ‘조선소 노동자들’에 대한 문제를 다시 다루는 소설이었고, 김숨은 한 번 쓴 이야기를 별 이유 없이 다시 쓰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김숨은 무언가 쓰지 않고, 견딜 수 없는 것을 오래 숙성 시켜 두었다가 때가 되었을 때 그만의 언어로, 타자들의 목소리를 옮긴다. 나는 김숨의 소설을 읽을 때면 문학과 소설가의 사회적 자리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되었고, 그 자리의 무게에 경탄하는 동시에 그녀의 소설에 무한한 애정을 느낀다.

 

소설을 다 읽은 뒤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무언가를 고발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지. 기자도, 학자도, 판사도 아닌 소설가라면 진정 이러한 방식을 취해야지.

 

 

 

윤리적 듣기와 읽기


 

피해자들의 이야기일수록 더 정제된 문장으로, 처절함도 문학적으로 풀어내는 게 예의”라는 김숨의 말에서 볼 수 있듯 그녀의 재현은 치밀하고, 생생한 묘사를 넘어선다. 조선소 노동자의 공간, 그들의 노동 행위를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표현한다. 그녀의 소설 속 문장들을 보면 처절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요즘 대부분의 문학, 비문학 도서는 작가에게 만만찮은 윤리적 책임과 민감한 감수성(인종, 성별, 종교 등에 대한)을 요구한다. 그중에서도 ‘피해자’, ‘피해생존자’라고 부르는 이들과 관련한 글은 특별히 강한 윤리적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특히 그들의 인권과 관련한 글이라면 말이다.

 

평단과 독자들의 예민한 시선은 단순히 창작자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검열이라 볼 수 없다. 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검열로, 창작자라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김숨은 『한 명』(현대문학,2016),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현대문학,2018),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2018), 『흐르는 편지』(현대문학,2018), 『듣기 시간』(문학실험실,2021)에 이르기까지,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고집스럽게 천착하였다. 나는 그녀처럼 집요하게 한 가지 문제에 몰두할 수 있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로 오래 소설을 써온 김숨은 다른 창작자들보다 더한 윤리적 책임을 자처해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현재의 문제이자 미래의 문제이기도 한 것은, 그것이 여성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인권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과 일본, 두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로 인식해야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피해자들이 자신들과 같은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베트남 여성들이나 콩고민주공화국 전시 성폭력 피해자 여성들, IS 성노예 피해자들에게 손을 내밀고 연대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 또한 그것에 있지 않을까.
(...)
지금이라도 우리는 윤리적인 듣기와 읽기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젠더, 민족,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축이 교차하는 접점에서의 수많은 차이와 경계를 넘어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과 실천의 의지로 연결된 연대로 확장된 ‘위안부’ 운동이 민족주의나 진영논리, 반일 감정에 갇혀 얄팍하게 축소되지 않도록. 그리고 길게는 칠십 년에 걸쳐 회복한 피해자들의 인권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또다시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 김숨, 『윤리적 듣기와 읽기를 해야 할 때』

 

 

김숨의 글 『윤리적 듣기와 읽기를 해야 할 때』에는 일련의 ‘위안부’ 피해 증언 소설의 창작자로서, 작가가 겪은 윤리적 갈등과 고민이 담겨 있다.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내가 그녀를 소설가로서 신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철배라는 환상의 사물을 만들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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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심장』의 배경이 되는 공간을 먼저 보자.

 

이곳은 빛 한 줌, 바람 한 줄기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철상자’다. 철상자는 조선소에서 만드는 거배한 철배의 조각이다. 무게가 3t쯤 나가는 철판을 병풍처럼 이어 붙여 더 큰 철판을 만들고, 그 철판을 짜 60t쯤 되는 철상자를 만든다. 이러한 철상자 300개를 조립하면 철배가 탄생한다.

 

노동자들은 철 상자를 ‘철배의 심장(129p)’이라고 부르지만 실상 철 상자는 철배의 미세한 부속품의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소설 속 조선소 노동자 중 그 누구도 철배를 본 적은 없다. 그저 눈앞에 있는 오늘의 일을 해내며 철배라는 환상의 사물을 만들어낸다.


 

“철배는 없다. 우리 중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으니 우리에게 철배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철배는 없지만 철배를 만드는 철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살보다, 뼈보다 철을 더 많이 만진다. 우리는 철배가 없다는 생각을 못 하는데 우리는 그것의 심장이 될 철상자 속에서 종일 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종일 철을 망치질로 때리고, 페인트를 칠하고, 철을 자르고 붙이고 다듬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것을 만드느라 불구가 되고, 병이 들고, 죽기도 한다.”

 

- 『제비심장』 (95p)

 

 

이들의 노동이란 ‘무’를 향한 몸부림이다. 이들은 무의미함을 견디기 위한 싸움을 지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소 노동자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존재들은 그들의 눈에도, 독자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고, 따라서 이들은 허구의 존재를 미워하며, 혹은 그래서 미워할 수조차 없이 오늘의 노동을 한다. 그들이 무엇을 만드는지도 모른 채.

 

 

 

이토록 비현실적인 현실


 

‘철상자’ 내부에는 3천여 명의 사람들이 노동하고 있다. 지하 20여 미터인 철상자 허공에 발판을 놓고 일한다. 무거운 작업화를 신어야지만 중력을 거슬러 파워그라인더 작업을 할 수 있다. 사다리를 타고, 5분을 올라가야만 햇빛을 보거나 바람을 쐴 수 있다. 작업 중간에 화장실을 갈 수 없으니 물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한다. 쇳가루는 계속 내려 쌓이고, 철상자 어디선가 나사못, 망치, 페인트, 발판, 작업화 따위가 무작위로 떨어지기도 한다.

 

‘철상자’는 중력이 없는 우주적 공간처럼 그려진다. 길을 잃은 사내를 ‘우주인처럼 차려입었다’(50)고 묘사하는 점이 그러하다. 또 이들의 시적이고, 아름다운 대화는 이 공간을 환상적으로 그려내는 데 한몫을 한다.

 

동시에 이곳의 폐쇄적이고, 위험하며, 그래서 두렵기까지 한 공간적 특징은 낯설기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조선소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은 거짓말보다 더 거짓말 같은 현실이다. 따라서 작품 전반에 맴도는 환상적 분위기와 묘사는 독자들에게는 낯선 ‘철상자’ 내부를 그리는 데 적절하다.

 

이토록 끔찍하고, 비인격적인 노동 환경은 믿을 수 없게도 작금의 현실이다. 2021년 현재에도 다양한 직군의 노동자들은 창문조차 없는 열악한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한다. 선진국이라는 대한민국은 중대재해처벌법 하나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청 노동자들은 산재처리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파다하고, 이주노동자들의 고용허가제 문제는 10년째 해결되지 않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 가까운 현실이 또 다른 이들에게는 너무 멀리 있어 비현실적인 사건이 된다는 것은 양극화된 이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나를 포함해 소설 속 세계를 비현실적이라 느끼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너희들은 이 세계를 아느냐? 모르느냐? 도대체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 작가는 우리를 몰아세우고, 윤리적 독법의 세계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하루살이 하청 업체 노동자들이여, 침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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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철상자는 ‘물량팀’ 노동자들의 일터다. ‘물량팀’은 무엇일까. 정규직-하청업체-물량팀으로 나뉘는 다단계 하청 구조에서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노동자들을 뜻한다. 조선소에서 하청 업체에 하청을 주는 것은 노동자들을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데다 인건비가 적게 들어서(48)다. 하청 노동자들은 산재 피해 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없고, 보험 대상자가 될 수도 없으며,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의 권리 또한 없다.

 

조선소에는 오늘만 있거든. 오늘이 가면 오늘이 오지. 오늘이 있지.”(253)

 

그래서인지 이들은 자신들을 ‘하루살이’ 노동자라 칭한다. 소설에서 목소리를 내는 화자들은 모두 10년 넘게 조선소 파워공(파워그라인더 작업을 하는 하청 노동자)으로 살았으나 한 번도 조선소 노동자였던 적이 없다.


 

“0은 구멍이야.”

“0은 거울이야.”

“0은 없음.”

“0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무도 없어.”

 

- 『제비심장』 (250p)

 

 

조선소 정문 전광판에는 ‘무재해 무사망 392일(249)’이라고 적혀 있다. 조선소에서 누가 다치거나 사망하면 0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조선소에서 일하다 다쳐도 함부러 산업재해 신청을 할 수 없다.(249) 무재해 무사망 0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을 기업이 두고보지 않는다. 하지만 열흘 일거리를 닷새 만에 끝내라고 독촉하는 이곳에서 무재해 무사망은 불가능한 요구다. 결국 392라는 숫자는 누군가의 사고와 죽음을 묵인한 침묵의 기간을 상징한다.

 

조선소 하청 노동자들의 자리는 공백으로 남겨진다. 이들은 언제라도 죽을 수 있고, 죽어서도 침묵해야 한다.


 

“철상자에는 아무도 없어,”

“철상자 속 우리는 있으면서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의 죽음도 없어.”

“하지만 고통은 있어.”

 

- 『제비심장』 (217p)

 

 

철상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있으면서 없는'(217)존재들이다. 소설의 중심 화자인 ‘혜숙’은 스스로를 ‘조선소의 유령’이라 칭하기도 한다. 소설 속 화자들인 정자 언니, 분희, 복주 언니, 앵무새 여자, 최 씨, 늙은 망치공의 겹쳐지고, 어긋나는 목소리들은 정말 유령의 발화처럼 들린다. 투명한 동시에 흐릿하게 소설 속 자리를 차지한다. 사람의 말이 아닌 것처럼 추상적인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시적이고, 아름답다.

 

철상자의 3천 명의 노동자들은 ‘0’의 존재로, 이들의 목소리는 어딘가 가닿지 못하고, 흩어진다.

 

 

 

그림자들의 섬에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소설 <제비심장>에서 다루는 소재 중 ‘그림자(203)’의 함축적 의미는 인상적이다. 화자인 ‘혜순’의 아들은 그림자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부엌칼 그림자는 쥐.”

“의자 그림자는 염소.”

“감자 그림자는 달,”

“해바라기 그림자는 망치.”

 

- 『제비심장』 (202p)

 

 

한진중공업 민주노조의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들의 섬>에도 1980년대의 조선소 노동자들의 노동 현실이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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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투쟁을 하는 이들, 노동 운동을 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 눈물겨운 투쟁을 하는 노조의 구성원들, 이들 모두는 무참히 목소리를 잃었다. ‘있으면서 없는’ 존재인 소설 『제비심장』 속 인물들의 목소리처럼. 오랜 시간 들리지 않았던 한진중공업 민주노조의 목소리는 그림자로 떠돌다 몸을 불려 섬이 되었다. 따라서 그림자를 볼 수 있는 아들은 조선소 노동자인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뭉게구름 그림자는 버스, 버스 그림자는 하모니카, 하모니카 그림자는 사다리, 사다리 그림자는 배추벌레. 아들이 보는 대로라면 이 세상 만물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그림자를 매개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모양과 색깔이 제각각이지만 바늘로 꿰매 이어붙인 양말 기차처럼.(204)

 

또 아들은 그림자를 통해 세상 만물의 연결성을 보기도 한다. 그 연결성은 대부분 비참한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소 주인이 되고(97), 조선소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소 노동자가 되는 것과 같이. 슬픔과 고통이 연결되는 사회구조와 같이.

 

하지만 어떤 연결은 희망적이다.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잃었(289)다 말하는 소설 속 노동자들의 연대가 그러하다. 깊은 철상자 구멍에서 들려오는 이들의 노랫소리와 아름다운 대화 소리가 그러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사랑을 잃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를 더 꽉 껴안는다.

 

 

 

철상자에서는 따뜻한 피 냄새가 난다



 

“난 뭘 봐도 마음이 슬퍼.”

“난 뭘 봐도 마음이 차가워, 딴딴해. 내 심장은 쇠인가 봐.”

“노래를 불러. 그럼 온기가 들며 심장이 물러질 거야. 너무 긴 노래 말고. 괜히 노래 부르다 숨차서 쓰러지면 안 되니까.”

 

- 『제비심장』 (63p)

 

 

심장이 멎으면 그제야 인간은 쇠처럼 강해(228)진다는 묘사에서 보았을 때, 단단한 심장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들은 죽지 않기 위해 노래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잘 슬퍼하고, 잘 감동하고, 잘 감탄하고, 잘 사랑한다.

 

마흔아홉 살 도장공 ‘미애’는 우즈베키스탄 남자와 살고 있다. 남자는 고향에 아내와 처자식이 있다. 미애는 말한다. “난 욕심 없어. 난 그이를 갖고 싶은 게 아니야. 나 자신도 가질 수 없는데 누굴 가질 수 있겠어.”(265) 그녀는 남자가 떠날 때면 언제든 보내줄 것이라고, 그이가 없는 것처럼 살겠다고 말한다. 미애는 정말 하루 살고, 죽는 사람처럼 인간사의 허무함을 꿰뚫고 있는 것 같다.

 

미애는 남자의 부인과도 연결감을 느낀다. “그 여자를 위해 기도할 때면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기분”(267)을 느낀다. 그리고 그 여자를 위해 울기도 한다. 미애는 삭막한 현실에서도 인간성을 놓지 않는다. 사랑을, 인류애를, 연민을 가슴 깊숙이 알알이 품고 있다. 미애는 남자를 돌보는 것이 “날 돌보는 것”(268)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그이가 잠들면 난 그이의 얼굴을 어루만져주지. 그럼 그이의 얼굴은 웃는 얼굴이 돼. 구겨져 있던 얼굴이. 그래서 울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 화내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 그이의 얼굴이 펴지는 걸 보고 있으면 내 손이 마술을 부리는 것 같아. 손톱들이 갈라지고 부러져서 마녀 손만 같은 내 손이……”

- 『제비심장』 (269p)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소설 속 조선소 노동자들과 나의 연결성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어떤 연결성이 나를 이토록 슬프게, 아프게 만드는지. 이 무참하고, 막막한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그림자들의 섬에서 흩어져나오는 잔해, 냄새, 기억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조선소 노동자들의 노동 현장과 우리네 삶과 노동 현장이 유사하다는 것은 단순한 비약이다. 그러나 노동하며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우리들은 존재조차 모르는 철배와 같은 환상의 사물을 만들기 위해 톱니바퀴의 부품으로 전락하며, 익명의 존재가 되기도 한다.

 

소설 속 조선소 노동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었다. 서로를 안아주었고, 생존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그들보다 더 아프고, 힘들고, 슬픈 이들을 보살펴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보지 못한다. 조선소에 노동자들이 있음을. 오래 생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들의 목소리를 대부분 듣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네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 만물이 그림자를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면 어떨까.

 

 

“새가 또 날아가네.”

“새야, 심장을 떨어뜨려 줘!”

 

- 『제비심장』 (17p)

 

 

철 상자의 쇳덩이에서는 따뜻한 피 냄새가 난다. 3000명의 노동자가 노동하고 있는 철 상자에는 3000개의 심장이 생동하게 뛰고 있다. 그러니까 철 상자는 거대한 심장이 된다. 3000개의 심장은 하나의 심박으로 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목소리를 듣는다.

 

“새야 심장을 떨어뜨려 줘!”

 

자, 우리는 이제 방향을 잡고, 심장을 떨어뜨리면 된다. 우리의 심장 박동을 그들과 똑같이 맞추고, 심장을 보내면 된다. 우리의 작은 심장은 더 거대한 심박으로 뭉치고, 불어나 세상에 외칠 수 있다.

 

“여기에도 사람이 있어요. 여기에서도 심장이 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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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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