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 안에 내재한 악을 마주보는 시간 - 리처드 3세를 찾아서

글 입력 2021.11.28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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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는 누구인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이아고'와 맞먹는 악인은 단연 '리처드 3세'다. '리처드 3세'는 마르지 않는 샘 같은 소재로, 연극, 뮤지컬, 무용 등 다양한 창작물로 재연되며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몇 년 전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를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나는 오셀로보다 이아고가 좋았고, 비열한 악인으로 그려지는 리처드 3세도 좋았다. 고전 희곡에는 선과 악으로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그 지점이 나에게는 매력적이다. 완전히 선하거나 완전히 악한 인물을 혹자는 얄팍한 설정이라 말한다. 하지만 과연 '완전한 악인'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이아고도, 리처드 3세도 완전한 악인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리처드 3세 캐릭터의 사이코틱한 성격, 잔인함, 열등감, 우월의식 등은 우리 안에 내재한 숨기고 싶은 감정들을 비대하게 늘려놓은 것이다. 그의 정신적 폐허는 내 안에 내재한 감정을 극단으로 빚어 놓은 양상이었고, 그러니 그의 행보를 보며 나는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

 

또 역사적 인물인 '리처드 3세'가 과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처럼 폭군이 맞는지, 그에 얽힌 다른 이야기가 있지는 않은지 상상하며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역사가 사이에서 그는 여전히 조카인 에드워드 5세를 죽인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오늘날 영국에서는 그가 에드워드 5세를 유폐만 시켰을 뿐이고, 폭군의 이미지는 승자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된다. 또한 리처드 3세는 튜더 왕조의 혈통과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리처드 3세의 지지자들은 말하기도 한다.

 

결국 나는 리처드3세를 악하지만 매력적이고, 신비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은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리처드 3세>가 골목길 느와르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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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의 유골은 5세기가 흐른 뒤 2013년에 발견된다. 이 연극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형을 탑에 가둬 죽인 자, 조카를 폐위시켜 왕이 된 자, 곱추, 모략가, 죽어선 묫자리 하나 못 얻고선 수도원 어딘가에 묻혀 버린 자, 그런 리처드 3세의 유골에 대해 비루한 마을의 주인들은 떠든다.

 

"흉측하고, 더럽고, 추악해. 그렇지만 매력적이고, 신비로워."

 

여기는 대한민국의 골목길이다. 리처드 3세의 유골에서 시작해 리처드 3세를 복원해낸다. 서로 다른 성별의, 서로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이.

 

작은 교회 앞 빨간 십자가 아래에서 살인에 관한 고백을 한다. 인물들은 미로를 헤매며 독백을 한다. 그렇게 한국의 골목길은 폭력적인 공간인 동시에 시적인 언어가 오가는 미학적인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서로 다른 리처드 3세는 결국 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나로 묶일 수 없는 개별적인 리처드 3세가 된다. 그리고 연극을 보는 관객 또한 각자만의 리처드 3세를 확인한다. 그 모든 작업이 <리처드 3세를 찾아서>의 목표다.

 

한국의 골목길이란 '권력 없음' , '비루함' 이란 단어와 가깝게 닿아 있다. 따라서 리처드 3세라는 권력적이고, 부유한 인물을 논하기에 이 장소가 적합할까에 대하여 생각했다. 하지만 골목길은 빛과 그림자로 양분된 세계를 펼쳐놓기에 좋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리처드3세를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갇혀 있지 않도록 만드는 데에도 한 몫 했다.

 

 

 

말하는 자와 이야기 사이의 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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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를 찾아서>의 특별한 지점으로 세 가지의 연출적 특징을 들 수 있다.

 

첫째, 좌우 정면 4개의 아날로그 모니터다. 검정색 옷을 입고, 라이브 카메라를 든 남자가 무대 위를 움직이며 배우들을 촬영한다. 묘하고, 감각적이며 그로테스틱한 영상은 아날로그 모니터에 전시된다.

 

서로 다른 리처드 3세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매력적이다. 배우들의 얼굴이 모두 같은 사람처럼 보일 때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시선의 확장'을 만들어낸다. 영상에 담긴 리처드 3세는 무대 위 리처드 3세와는 또 다른 존재처럼 그려진다.

 

또 영상은 무대라는 현장성을 벗어나 리처드 3세를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 놓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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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서로 다른 배우들의 리처드 3세 연기다. 젠더와 연령대가 다양한 배우들이 리처드 3세를 연기하게 된다. 가운을 입으면 리처드 3세가 되고, 발화를 시작한다. 마치 내재한 '악'의 모습을 지금 모두 쏟아내겠다는 듯 강렬하고, 열정적인 몸짓으로 단 몇 분 동안 리처드 3세가 된다. 말하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리처드 3세의 이야기에는 간극이 생긴다. 곧 리처드 3세는 누구나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셋째, 무대에 등장하는 어린 아이는 '보는 이'의 자리를 차지한다. 아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아직 이 세상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 연극을 보는 관객 또한 마찬가지다. 아이와, 관객은 같은 시선을 공유하며 다른 시간대로 향하게 된다.

 

이 작품은 리처드의 유골로 시작되어 한 인물을 복원해내는 작업이다. 관객은 자유롭게 리처드를 복원할 수 있다. 그것은 <리처드 3세>에 대한 각주다. 관객과 아이의 시선 또한 연극의 일부로 '움직이는 리처드 3세'를 복원하는 데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리처드 3세에게 내어줄 자리가 있나?


 

인간의 어떤 면면은 분명 악하다. 종종 악에 의해 조종당하기라도 하는 듯, 온갖 끔찍한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인간들을 보라.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선을 향해 나아간다. 악을 처단하고, 분노하고, 그 과정에서 고통에 신음하더라도 대부분의 인간은 선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인간은 과연 본질적으로 악할까? 그리고 죄책감을 동반한 '평범한' 악행만을 저지르는 우리는 리처드 3세에게 내어줄 자리가 있기나 할까?

 

역사적으로 누락된 지점도 많겠으나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 리처드 3세는 폭군이며 살인자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희미해진 그의 존재를 뒤쫓으며 5세기나 지난 지금에서야 그의 악함을 '매력적' 혹은 '신비함'으로 포장할 수 있다.

 

현실의 악인들은 나에게 그보다 끔찍해서 문학적 상상력의 여지가 전무하다. 나는 수많은 현실의 악인들을 비난하고, 증오하며 판에 박힌 존재로 읽을 수밖에 없다. 5세기가 지난 뒤 그들을 '리처드 3세'처럼 신화화하여 상상력을 동반해 그 인물들을 재해석한다고 생각하면 벌써 분하다.

 

동시에 일상적 악행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사소한 언행은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하며, 우리가 별 사유 없이 사용하는 플라스틱으로 지구 반대편의 거대한 섬은 물에 잠기고 있다. 단순히 '알지 못함'의 상태만으로 사회에서 배제되는  존재를 소외하기도 한다.

 

악은 지금, 여기에 파다하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우리는 그걸 모른다.

 

우리는 리처드 3세에게 내어줄 자리가 없다. 일상적 악행에 대해 사유할 여력이 없으며, 현실의 악을 증오하고, 비난하는 동안 마음이 닳아 버린다. 연극을 보는 내내 리처드 3세에게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었다. 평소 잘 들여다보지 못했던 마음의 면면을 살폈다.

 

"이전과는 다른 시각"의 리처드 3세 연극은 아니다. 지금, 여기, 한국의 골목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악의 행태와 리처드 3세의 악의 겹점을 찾을 것이라 기대했으나, 그저 과거의 리처드 3세에 고여 있다. 하지만 새로운 연출 방식으로 매력적인 극이 탄생한 것은 맞다.

 

리처드 3세에게 100분여의 시간을 내어주기를. 그리고 마음 속 악의 면면을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최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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