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와인, 라벨을 마시다 [미술/전시]

최상품 빈티지 와인 샤또 무똥 로칠드와 예술가들의 협력
글 입력 2021.11.2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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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겨울이 느껴진다. 올 해는 추위가 유독 늦게 온 탓에 더 자주, 더 많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새로운 경험이라면 와인을 몇 번 마신 일이다. 와인은 폼 잡는 어른들의 술이라고 생각했다. 문학작가나 잡지 편집자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퇴근 후 취미처럼 세련되게 마시는 술이라고 여겼다. 그래서인지 내가 와인을 마실 땐 마치 어른이 된 것 같아 살짝 쑥스럽기도 했다.

 

지난 주에도 와인바에 갔다. 좁은 공간에 친구와 넷이 나란히 앉아 와인 한 잔을 두 시간 동안 마셨다. 역시 소줏잔을 부딪힐 때와는 기분도, 느낌도, 심지어 몸가짐도 다르게 느껴졌다. 가게를 나오면서 진열된 와인을 구경하는데 다양한 라벨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숙성의 시간을 보낸 와인이 저마다의 향기를 뽐내는 것처럼 예술가도 창작의 고통을 겪으면서 인내라는 숙성과정을 거친 끝에 작품을 완성한다. 그런 면에서 와인과 예술은 잘 어울린다. 그리고 라벨 자체만으로 화제가 되는 건 술 중에는 와인이 유일하다.

 

와인의 라벨은 양조장에서 생산된 와인을 병에 담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중요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타 양조장과 구별하는 표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어 라벨(Label)은 프랑스어 에티켓(Etiquette), 이탈리아어 에띠께따(Etchetta), 독일어 에티켓(Etikett)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생산년도, 포도품종, 양조장을 기본으로 알콜함량, 등급, 수상경력 같은 다양한 정보가 담긴다. 동시에 라벨은 회사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어떤 때는 라벨이 소비자가 와인을 선택하는데 기준이 되기도 한다.

 

보르도 와인 중에서도 최상품 빈티지 와인으로 꼽히는 ‘샤또 무똥 로칠드’는 로칠드 가문에서 시작됐다. 로칠드 가문은 유대인 금융재벌로 세계 경제, 정치, 문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축적한 부를 기반으로 프랑스 와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포도농사가 대풍작이었고, 로칠드 가문의 필립 남작은 당시의 젊은 작가 필립 줄리앙에게 라벨 디자인을 의뢰했다. 이는 로필드 가문이 예술을 후원하고 예술가들과의 협력이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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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을 맞이해 승리를 상징하는 V자를 디자인으로 한 라벨

 

 

이후 당대 미술가들을 중심으로 한 아트 라벨 제작은 오늘날까지 계속되는데 피카소, 칸딘스키, 달리 등 이름만 들어도 ‘헉’ 소리가 나오는 거장들과 함께했으니 어떤 와인은 한 병 가격이 웬만한 고급 자동차를 사고도 남을 정도다. 물론 모든 와인이 그런 가격인 것은 아니지만 라벨 디자인에 대한 보수는 예상 외로 어처구니없다. 따로 책정된 금액이 있는 게 아니고 약간의 와인이 전부라는 게 재미있다. 예술가와 로칠드 사이의 관계가 우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예술은 온전히 창작자의 영감과 재능, 노력에서 나오지만 좋은 와인은 자연(땅, 기후)과 과학(양조기술) 그리고 인간(정성, 노력)이 어우러져야 완성되기 때문에 온전히 사람에게만 대가를 지불할 수 없다는 개념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어쨌든 라벨 의뢰를 받은 작가는 4가지 주제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해 그림을 그리면 됐다.

 

와인을 마시는 기쁨, 와인 지식, 로칠드 가문, 그리고 로칠드 가문의 상징인 양이다. 하지만 디자인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은 오로지 무통 소유주의 몫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상품디자인인가를 다루는 것도 재미있는 주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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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뛰즈의 라벨. 소녀의 누드라는 점에서 논란이 돼 실제로 판매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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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작가의 라벨

 

 

흔히 와인을 신이 만든 최고의 예술품이라고 한다. 여기에 인간이 만든 최고의 예술품을 더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단순히 와인을 음미하는 것을 넘어 예술가의 사유를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당대 최고의 예술가가 간접적으로 함께하는 식탁 위 모임은 색다른 만족감을 선사할 것이다.

 

와인을 마시면서 분명 누군가는 예술가의 삶이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것이고, 여기에서 이어진 다양한 작품세계에 대한 대화는 그 자리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마시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다. 한 병의 와인이 담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고 다양한 역사를 보여준다.

 

또 다른 와인의 매력은 매년 다른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생산될 와인이 어떤 향과 맛을 가지게 될 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상 새로운 것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마저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라벨을 통해 와인과 예술, 동양과 서양, 와인과 아트컬렉터가 연결되는 모습을 보며 내 삶과 예술을 연결시키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더불어 ‘나’라는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나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경험을 하게 할 것인가 생각해 봐야겠다.

 

 

[신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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