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연극 '슈미' - 현대인에게 묻다

우리 내면의 심연엔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
글 입력 2021.11.18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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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장 전에 촬영한 연극 <슈미>의 무대

 

 

연극이라는 장르가 이렇게까지 매력적인 줄 처음 알았다. 그동안 연극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낯설고 떨리는 마음으로 극장에 들어서니 어두컴컴한 불빛의 조명이 맞아주었다. 무대에는 긴 테이블이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양 끝에 소포와 화병이 놓여 있었다. 배우 다섯 명이 등장하는 연극에 딱 맞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무대를 바라보며 120분간 진행될 연극에 잘 집중할 수 있을 것인가 걱정했다. 심오하고, 약간은 난해한, 다섯 인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작품이었지만 배우 다섯 명의 흡입력과 적은 소품들이 만들어 낸 세계관의 현장감에 바로 몰입하여 감상할 수 있었다.

 

<슈미>는 노르웨이의 사실주의 작가 헨릭 입센의 고전 희곡 <헤다 가블러>를 한국을 배경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인간이 이상이라고 여기는 것의 허위와 그 이상마저도 이용하려는 지금의 시대를 고발하는 '사회 고발극'이자 나르시시즘, 긍정, 혼란, 파괴 등 다양한 자아들이 과장된 채 혼재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정신 탐구극'이다. 슈미(최희진), 경만(조형래), 애경(김시영), 유완(권일), 도규(장재호)까지 모두 동창이며 이 다섯 인물이 슈미와 경만의 신혼집에 모이게 된다. 그들의 각기 다른 다섯 욕망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항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는 슈미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전임 교수 임용을 앞둔 경만은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왔다.

 

이들의 친구 애경은 슈미와 경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영국에서 깜짝 귀국한다. 그리고 유완이 영국에서 책을 발표해 큰 인기를 끌었으며, 곧 나올 후속작은 자신이 집필을 도왔다고 이야기한다.

 

한편, 도규는 슈미와 경만을 호시탐탐 자극하며 슈미를 손에 쥐려 하는데...

 

- <슈미> 시놉시스 중

 

 

공연이 시작되고, ‘슈미’가 긴 테이블에 누운 채로 등장했을 때, 그녀의 표정이 생생하다. 슈미는 무언가 괴로움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울거나 소리를 질러야 할 것 같이 보였는데, 이어지는 대사와 행동이 지나치게 차분했다. 우아하게 느껴질 정도로 절제된 몸짓과 오만한 로봇 같은 말투에 가끔 희번덕거리는 광기가 서린다.

 

그녀는 커튼을 치거나 현관문을 여는 간단하고 당연한 일에도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모두 남편 경만이 하도록 한다. 다른 동창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철저하게 모두의 우위에 있는 양 행동하며 그들을 손에 쥐고 흔들고 싶어 한다. 그녀에게는 지배 욕구가 있다. 유완과는 전 연인 사이고, 현재는 경만과 결혼했지만 여전히 유완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어 한다. 필자의 눈에는 모두가 공주처럼 떠받드는 마녀 같아 보였다.


'경만'은 없는 형편에 슈미의 의견을 따라 6개월간 신혼여행을 하고, 친구 도규에게 돈을 빌려서라도 슈미가 살고 싶어 하는 집을 서울에 마련한 슈미의 남편이다. 자신을 부리는 슈미에게 그저 복종하기만 하는 그의 태도와 선택들은 결국 자신의 친구 '유완'을 자살로 몰고 가는데 일조한다.


'애경'은 극 중에서 가장 발랄하고 솔직한 인물이다. 부와 명예를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외교관과 결혼하고, 그 이후에도 '유완'을 마음에 품고 입주 교사로 지정하여 알코올 중독자인 그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은 속물적이면서, 동시에 안쓰러울 정도로 낭만적이다.


검정 양복을 빼입고 등장하는 '도규'는 능글맞고 거만하다. 슈미와 비슷하게 광기가 서려 있는 그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선을 넘을 듯 넘지 않는 태도로 일관하고, 욕망을 끝없이 겉으로 내비친다.  그의 모습은 계산적이면서도 동물적이다.

 

다섯 번째 인물, '유완'이 등장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욕망의 분출과 파괴가 시작된다.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던 슈미가 영감이 되어 자유의지에 관한 책을 집필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알코올 중독자인 자신은 이제 없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자신감 넘친다. 애경은 그런 그를 애정이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애경 또한 그에게 이용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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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애경, 경만, 슈미, 유완, 도규

 

 

슈미는 유완을 다시 완전히 파괴하여 자신의 영향 아래에 두려는 모습을 보인다. 어렵게 술을 끊은 그에게 계속해서 술을 권하고, 파티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 유완을 꾀 내 파티에 가게 한다. 그런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은 애경밖에 없다. 하지만, 이들의 복잡한 관계에서 진정으로 서로를 위하는 관계는 없다. 유완을 진심으로 위하는 것 같아 보이는 애경도 결국은 불륜일 뿐이다.


파티에서 술에 잔뜩 취한 유완은 원고를 떨어뜨린다. 망연자실 하는 유완에게 가장 자유로운 행위로 자살을 속삭이며 권총 한 자루를 건네는 슈미에겐 절정의 광기가 서려 있다. 유완의 죽음을 전해들은 슈미는 그가 마침내 자유롭고 아름다워진 것이라며 아이처럼 신이 난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아름다움을 그가 실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유완은 스스로 자신에게 총을 겨눈 것이 아니며 몸에 지니고 있던 권총이 오발된 것이었음을 안 슈미는 절망하며 분노하고, 도규는 그 권총을 빌미로 그녀를 손아귀에 쥐려 한다. 슈미는 결국 아름다운 자유로움을 위하여 권총으로 삶을 끝낸다.

 

*

 

슈미에게 있어서 자신보다 아름답거나 자신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그녀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현실감 없이 자신의 삶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언제나 주도권을 쥐고 있어야 하며 지배되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부자였던 부모님은 두 분 다 스스로 권총으로 목숨을 끊었으며, 친척들은 자산을 모두 가져갔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남편을 둔 것 같지만, 사실 남편인 경만은 슈미의 진정한 속마음은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경만은 자신이 정교수가 될 생각에 들떠있다.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 하는 슈미의 의견은 웃으며 무시되고, 그녀가 가장 아끼는 피아노는 배달되지도 않았다. 물론 그녀도 경만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르시시즘에 빠져 허덕이는 모습이던 그녀가 자기 자신은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필자의 생각에 슈미는 자신 그대로를 사랑하지 못했을뿐더러, 그 가까이에 가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주도권을 쥐고 싶어 했지만, 막상 자신의 삶에 주체성은 박약했다. 자기 자신을 방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에는 누구나 노력이 필요하다.


이 작품은 과장된 캐릭터들의 대사와 허상 가득한 그들의 머릿속을 보여주며 너의 내면 깊숙이에도 사실 '슈미'와 그 친구들이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는 나 자신을 긍정하고 타인을 긍정하고 있는가? 필자가 늘 들고 다니는 노트 제일 앞면에 긍정에 관해 써 둔 문장이 있다.


 

긍정이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긍정적인 태도란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한 뒤, 그 와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희망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산다는 것은 언제나 밝은 것이 아니라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용기 내 마주 보는 것이다. 연극을 보고 나서 이를 상기시킬 수 있었다. 현대인의 이중성과 속물 근성이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진정으로 나를 그대로 긍정했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긍정하였는가 반성하게 된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더 필요한 시대라는 작품의 연출가 하수민 씨의 말에 온 맘으로 공감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떠한가? 자기 자신과 타인을 긍정하고 있는가?

 

 

슈미 포스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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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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