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취향의 순간 - 퇴근하면 뭐 하세요?

별거 아닌 작은 취향의 순간들이 나를 설명하게 두고 싶다.
글 입력 2021.11.1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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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가 두목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목, 당신이 밥을 먹고 무엇을 하는지 말해주십시오.

그럼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게요”

 

 

 

취향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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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취향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팀원으로부터 퇴근 후에 뭘 하는지 질문을 받았다.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어제 퇴근하고 뭐했더라? 오늘은 뭘 하기로 했었지. 그는 요즘 삶이 별로 즐겁지 않다고 했다. 퇴근하면 기계적으로 하던 운동을 반복하고, 넷플릭스나 유튜브만 보다 잠드는데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재미도 없고 의미 없는 일만 반복하고 있는 기분이라 다른 사람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물어보러 다니는 중이란다.


나는 그제서야 뚝딱거리며 더듬더듬 대답을 이어나갔다. 퇴근하면 혼자 헬스장을 가거나 친구를 만나서 뛰기도 하고 어... 다음날 마실 커피를 콜드브루 브루어에 내려놓거나 밀크티를 만들기도 한다고. 책을 읽거나 어학공부를 하기도 하는데 밥만 먹어도 하루가 금방 다 가버려서 제대로 하고 있는 건 없다고. 이어서 퇴근하고 해볼만한 일과 작은 취미를 함께 나열해봤는데 막상 그 중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없어 뭔가 부끄러워졌다.


내가 뭘 하고 싶었더라? 작년 이맘때쯤의 나는, 지금을 어떤 모습으로 상상했더라. 마음만 앞서고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없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까지 까먹어버린 기분이다.


최근에 오랜만에 노래방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코로나 이후로 한 번도 간 적이 없다보니 속 시원하게 소리 지르며 생각 없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그리워진 탓이다. 새로 친해진 사람들과 격 없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런데 옆에서 노래방에 가고 싶다며 맞장구를 한참 치고 있다 보니 노래방에 가면 어떻게 놀아야 하더라.. 내가 어떤 노래 부르는걸 좋아했더라.. 하고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느 글에서 봤던 것처럼 노래방에 가서 부르고 싶은 노래 몇 곡 없는 재미없는 어른이 벌써 되어가는 것 같아 괜히 서글퍼졌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 퇴근해서 내 시간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것. 그런게 요즘은 참 중요한 것 같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보면, 혹은 학교를 다니거나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만 시간과 상황이 흘러가는 것은 아니고, 그럴수록 나의 시간이 절실해진다. 물론 회사에서나 학교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취향이란 결국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선호하고 선택하는지에 관한 거니까. 그것을 통해서 나라는 존재의 윤곽을 가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 인 조르바에서 앞에 인용한 문장과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밥을 먹고 나서 무엇을 하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고.


밥을 먹고 하는 일. 물론 첫 번째는 직업이겠지만, 그 이외의 시간이 요즘 나에게는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나는 누구일까. 이 질문은 나는 시간이 생기면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라는 질문이랑 비슷하게 다가온다. 점심메뉴를 고르는 일부터 중요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까지.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는 모든 일과 선호를 드러내는 일 역시 동일한 무게로 느껴진다. 그 취향의 틈새로 누군가의 존재를 훔쳐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최근에는 괜히 자기소개서를 쓰는 생각도 해보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나의 선택들로 나를 소개해도 재밌을 것 같다. 나는 사과와 바나나가 있으면 바나나를 더 자주 선택하는 사람이에요. 사실 사과를 더 좋아하지만 가격도 싸고 바나나의 칼륨이 나트륨을 배출시켜준다고 해서 짠 음식을 자주 먹는 저한테 더 건강한 느낌을 주거든요. 하고 시덥잖은 소리를 늘어놓으며 나를 소개하고 싶다. 별거 아닌 작은 취향의 순간들이 나를 설명하게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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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책 시리즈 중에 ‘아무튼, 000’ 시리즈가 있다. 아무튼 시리즈는 ‘생각만 해도 좋은, 설레는, 그런 한 가지가 있는가? 라는 캐치프레이즈 하에 다양한 분야의 저자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한 가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이다. 이 시리즈를 제일 처음 접한 건 임이랑님의 <아무튼, 식물-그들에게 내가 꼭 필요하다는 기분이 소중하다>였고, 제일 좋아하는 책은 정혜윤님의 <아무튼, 메모-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이다. 내가 이 시리즈 집을 처음 접할 때보다 지금은 훨씬 많은 이야기들이 출간됐다. 읽을 책이 없다고 느껴질 때면 검색창에 ’아무튼‘이라고 검색해 이 책들 사이에서 취향의 바다를 여행하곤 한다.


이 시리즈의 책을 쓰신 분들은 오랜기간 글과 가까운 삶을 사신 분도 있지만, 관련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인지 글솜씨나 글을 쓰는 방식이 제각각이라 모든 글이 내 취향에 맞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런 바로 무언가를 정말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분명 들어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책들은 나의 그런 믿음을 더 굳건하게 만들어줬다.

 

나는 이토록 강렬한 취향을 가진 이들이 부럽다. 취향이야말로 그 사람을 감각하게 해주니까. 내가 좋아하는게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나에 대해서 잘 안다는 것이다.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한다는 뜻이고, 내가 원하는 것으로 나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요 며칠간 취향에 대해 고민했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어떤 취향을 가졌는가 만큼 어떤 취향을 가지고 싶은가도 중요한 듯하다. 우리는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이 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내가 퇴근 후에 책을 읽는 사람이고 싶다면, 운동을 하는 사람이고 싶다면, 혹은 어떤 방식의 것을 선택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뜻이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는 것. 내가 되고 싶은 것. 나의 선택과 이끌림이 모여 취향이 된다. 취향은 알아가는 것도 즐겁지만 그 변화를 감각하는 것도 즐겁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얼마나 다른 존재가 되었는지. 취향을 인지하는 것은 곧 나와 나를 변화시키는 삶의 주변을 느끼는 일이다. 오늘 밤은 나의 취향을 조금씩 더듬어본다. 나는 어떻게 내가 되었나.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인가.


보이지 않는 새벽을 향해 달려가며 나는 취향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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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신모래 님의 그림을 사용했습니다.

 

 

[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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