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질감에 대한 이해로 만들어진 '듄' [영화]

'사막'이란 공간성, 상징, 그리고 질감.
글 입력 2021.11.13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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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인 영화’란 어떤 것일까.


 

간혹 스토리가 뚜렷하지 않거나 유독 영상미가 좋은 작품들에 대해 ‘감각적이다’라는 표현이 붙곤 한다. 개인적으론 감독의 심오한 세계관이 어렴풋이 느껴지긴 하지만 나의 능력부족으로 명확히 설명할 순 없을 때, 내가 ‘남발’하는 표현이라고 고백해본다.


이 ‘감각’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다.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리는 것(사전적 정의). 눈으로만 보고 귀로만 들었음에도 그 냄새가 맡아지고 맛이 느껴지고, 실제 그 감촉이 느껴지는 것. 2차원 영상만으로 3차원적 무언가를 ‘경험’하는 것.


그만큼 ‘생생’하다는 거지? 리얼리티를 잘 살린 영화도 감각적이라는 거지? 한다면 요상하게도 그건 좀 아니다. 이 생생함은 ‘촉감’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리얼하다는 ‘인식’이 아니라 그 ‘느낌’ 자체를 신체적으로 ‘체험’했을 때. 아마 그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촉감, 체험, 순간. 이것들이 총체 된 영화적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감각적인 영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얕은 결론을 내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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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빌뇌브의 <듄>은 지극히 감각적이다. 프랭크 허버트의 장편 대하소설 전체를 충실히 구현하겠다는 욕심보다 그 세계관의 ‘인상’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영상은 절제되었고, 공백의 미를 실천한다. 이때 모든 화면을 아우르는, 직유와 은유를 넘나들며 가장 자주 출연한 무언가가 있다. 바로 사막. <듄>의 감각은 온통 사막과 모래로부터 쏟아져 나온다.


사막의 성질. 황폐하고 삭막하며 흐린 색을 띄고 부서진다. 척박한 모래는 생명을 죽이고 푹 빠트려 집어삼킨다.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을 궂혔음에도 비명은커녕 극도로 적막하다. 자연적으로 형태를 갖춘 모래능선은 매혹적일 정도로 둥글고 완만하다. 사막 너머로 보이는 건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의 공백. 지배 불가능한 두려움을 심어주는 무한하고 광활한 규모. 드니 빌뇌브의 <듄>은 이 사막의 ‘질감’을 통해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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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금속과의 대비


 

영화는 주인공의 이사로부터 시작된다. 눈을 감고 잠에 빠져있는 폴의 첫 등장, 그의 얼굴엔 창문 너머 비친 빗줄기가 일렁거린다. 고향 칼라단을 떠나기 전 풀숲이 무성한 언덕을 걸으며 물웅덩이에 손을 담근다.

 

차갑고 부드러운 물의 무중력이 기분 좋게 살갗을 압박하지만, 이후 이 손이 거쳐야 하는 건 베네 게세리트의 시험 상자와 아라키스의 사막이다. 물을 만지던 손은 교모로 인해 산채로 태워지고, 결국 건조한 모래만 만지게 될 뿐이다. 버석거리는 모래는 붙잡히지 않고 뭉쳐지지도 않으며 그저 손 틈새로 흘러내린다.


칼라단의 것들은 대부분 메탈(금속)이다. 까맣고 단단하며 틈이 없다. 아트레이데스 가의 군사창고나 우주선은 모두 구(원)의 모양을 한 정교한 금속체이다. 모래 한 줌 새어나오지 않을 것처럼 치밀한 메탈이지만 아라키스에선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 아무리 거대한 공산품이라도 샤이 훌루드(모래벌레) 앞에선 무력하게 사라지고 만다.


칼라단의 것이 통하지 않는 아라키스의 땅. 물, 금속과의 대척점을 가진 사막의 모래. <듄>은 주인공을 이동시킴으로서 전후 공간을 대비시킨다. 다양한 ‘촉감놀이’를 통해 아예 ‘성질’부터 다른 곳이란 사실을 재차 확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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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포식자, 사막


 

생명이 자랄 수 없는 삭막한 땅. 영화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목숨을 뺏는 극단적인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사막의 방식으로.


관객들 후기에서 빠지지 않는, 어떤 평론가는 마치 한 폭의 중세 회화 같다고 했던 레토 공작의 최후. 공작의 나체는 매끈하고 탄탄하며 그 자체로 아름답다. 잘 빚은 진흙덩어리처럼 윤기가 흐르지만 노출의 경위는 그렇지 않다. 한 가문의 수장을 모욕하기 위해 발가벗겨진 몸뚱어리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그대로 견뎌야 한다.

 

약물에 마비되어 입을 헤 벌린 채 눈물만 뚝뚝 흘리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신체. 흙을 빚어 만들었다는 인간의 몸이 죽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할 때, 영화는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그 생명을 짓밟는다. 레토 공작 또한 사막에 잡아먹힌 희생자가 돼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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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인 존재, 사막


 

무자비한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건 역시 모래벌레 샤이 훌루드다. 규칙적인 발소리를 쫓아 귀신같이 찾아오는 이것으로 인해 폴과 제시카는 춤을 추듯 걸을 것을 요구 받는다. 편안하고 일상적인 행위를 억지로 자제하게 만드는 것, 이는 생존을 위한 복종에 가깝다. 거대한 스파이스 수확기를 한 입에 빨아들이던 샤이 훌루드의 위력은 아군과 적군 모두를 긴장시키는 절대공포다. 사막의 힘, 그 자체를 상징하는 샤이 훌루드를 통해 인간의 무력함과 사막의 무자비를 보여준다.


생명을 앗아가는 사막이었지만 일면 생명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선택된 자, 퀴사츠 해더락에게 사막이란 각성과 정화의 공간이다. 폴이 운전하는 소비행선이 철근을 뚫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시속 800km 모래바람 속에 갇혔을 때, 폴은 스스로를 내려놓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그는 비행선 날개를 접으며 체념할 줄 알게 되고, 기꺼이 죽음도 응수하겠다는 용기를 보인다. 모래바람을 빠져나왔을 때의 폴은 더 이상 그 이전의 도련님이 아니다. 아트레이데스의 가주이자 어머니의 보호자, 제 운명을 견뎌보겠다는 장성한 청년이다. 사막은 극한의 상황을 발휘해 인물을 변화시키는 성장의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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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사막


 

뭉치지 않고 흩어지는 모래알들. 영화의 샷들은 그것과 형식적으로 닮아있기도 하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폴의 꿈. 프레멘 소녀 챠니가 나오는 장면은 별다른 이야기 없이 쪼개져 영화 중간 중간에 삽입된다. 파편화되어 흩어진 조각들. 분명 중요한 단서이지만 아직까진 합쳐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시퀀스.

 

영화는 화면 자체를 모래화시켜 바스러트리고 이곳저곳에 흩뿌려 놓았다. 드넓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듯 그 단서들을 회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그러모아 운명의 답을 찾아야 하는 게 바로 사막이 내린 임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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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의 모든 것은 사막과 닮아있다. 인물들의 사명, 갈등, 공포, 죽음은 모두 사막과 그 속성을 같이 한다. 이 은유들이 좋은 건 그것이 사막의 질감을 토대로 했기 때문이다. 황망한 사막 한가운데서 잡히지 않는 모래를 움켜쥐는 듯한 촉감은 곧 영화의 스타일이 되었다.

 

질감에 대한 이해로 만들어진 영화, 아마 <듄>을 감각적인 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박태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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