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낡아가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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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십 대의 절반을 지나기 전부터, 나는 서른 살에 죽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글쎄, 그렇게 생각했던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나이 때 나는 꿈은 있어도 미래가 그려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통령, 변호사, 국제회의전문가……. 장래 희망은 많았지만, 그 일을 하는 나를 그릴 수는 없었다. 어른의 내가 떠오르지 않으니 자연스레 긴 미래의 나도 간절하지 않았겠지.
이십 대의 나 역시 그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십 대와는 다른 이유가 생겼다. 늙어가고 싶지 않았다. 스무 살에서 스물한 살, 스물한 살에서 스물두 살. 나이 한 살 더 먹었다지만 여전히 어렸던 그 시기에, 나는 그 1년, 1년을 겪으면서도 내가 점점 늙어간다고 느꼈다. 나의 총명함의 불씨가 사라지는 게 느껴졌고, 나의 기억력이 쇠퇴하는 게 느껴졌고, 나의 머릿속에서 팽팽 돌던 이야기들의 동력이 희미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이십 대 중반이 넘었다. 서른까지 한 손가락에 꼽는다. 서른에 죽겠다는 게 아니다. 그건 그거대로 어려운 일이지. 서른에 죽겠다는 것과 서른에 죽어도 괜찮다는 건 다른 말이다. 그러나 문장의 정의를 명확히 해도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정녕 서른에 죽어도 괜찮을 삶을 살고 있는가? 서른에 당도했을 때, 죽어도 여한 없는 생을 보내고 있을까? 미래는 모르는 것이라면, 지금의 나는 그럴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대통령, 변호사, 국제회의전문가. 초등학생 때의 장래 희망들. 이때 내 장래 희망 ‘직업’은 이것들이었고, ‘꿈’은 평생 글을 쓰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 꿨던 꿈은 작가. 그러나 이런저런, 여러 어른의 말씀과 부모님의 말씀과 사회의 말씀에 따라, ‘작가’는 내가 설정하고 달려 나갈 목표의 직업이 되지는 못했다. 작가가 아니어도 평생 글을 쓸 수는 있으니 다른 장래 희망을 품는 것이 학업적으로는 더 좋았을 것이다. 내가 체화하지 못해서 아쉬울 뿐. 그래도 나는 글을 계속 썼다. 말했듯 작가가 꿈이 아니어도 글은 쓸 수 있으니.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
중학생 시절. 야구를 좋아하게 됐다. 스포츠 기자라는 꿈을 처음 꿨다. 그때는 초등학생 때 나열했던 직업들에 비해 훨씬 더 신나게 꿈을 꿨다. 글도 계속 썼다. 그렇다고 기자를 위한 글쓰기를 한 건 아니고, 언제나 그랬듯 문학을 썼다. 문예 창작 영재 활동을 하며, 자부심도 느꼈다가, 감탄도 느꼈다가, 벽도 느꼈다가, 열등감도 느꼈다가. 작가라는 꿈에 한 발 더 진지하게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내 나이 서른은 멋들어지는 결과물 하나쯤은 분명 가지고 있을 나이로 여겨졌다. 다른 직업을 가졌더라도 책을 한 권 냈다든지, 아니면 진짜 작가가 되었다든지, 아니면 진짜 기자가 되었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멋있는 직업을 가지며 멋지게 살고 있을 거라든지. 그 생각과 고민을 하는 나는 부지런했고,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꿈의 노력도 하는 사람이었다. 객관적으로, 정량적으로, 노력으로 비치지 않아도 내가 알면 되었고, 내가 알고 있었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내 머릿속엔 생기가 사라졌다.
어릴 때는 머릿속에서 생각과 상상을 할 때 계속 책의 문장으로 생각이 쓰여 이게 괜찮은지 자문할 때도 있었다. 생각함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문장으로 전개돼서, 내가 생각하는 건지 소설을 쓰는 건지 싶었다. 이십 대가 되었을 때는 작은 소재, 사물, 사건만 보고 느끼고 들어도 모두 스토리 라인으로 이어졌다. 이런 내용을 담은 작품 어떨까, 이런 성격의 캐릭터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 소재로 어떤 작품이 좋을까.
지금 내 머릿속은 생산적인 움직임이 없다. 나는 그저 자주 고민에 괴로워하고, 떠오르는 기억에 힘들어하고, 이런 상황의 반복에 무기력함을 느낀다. 내가 늙어가고 있고, 퇴화하고 있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다고 느낀다.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내 모습이 싫고, 지금도 싫은데 앞으로 늙는 건 더 싫을 것이고, 가뜩이나 늙어가는 내 모습을 견딜 자신이 없었는데 더 그런 마음이 고갈된다.
이렇게 나이 먹고 있으니까, 나 서른 돼서도 여한 없을 것 같은 삶일 리가 없을 것 같은 거지. 그렇다고 서른에 종말이 다가오는 것도 아닌데 하염없이 세월이 흘러가기만을 바랄 것도 아니고. 사과나무에서 사과 떨어지기만 기다리며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어찌 됐든 내 인생인데. 내 인생에는 가라앉고 있는 지금 내 인생도 있지만, 찬란했던 내 과거도 있는 건데. 내 과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난 내 미래를 더 가라앉게 둘 수는 없는 것이다.
한때, 결혼을 하지 않고도 평생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해 본 적 있다. 연애를 안 해보니까 인생이 너무 좋더라고. 친구들과 함께한다면 그보다 더 즐거울 순 없었다. 친구만 있으면 배우자는 필요 없겠다는 생각. 생의 반려가 꼭 배우자이지 않아도 되잖아? 연애 앞에서의 나보다 우정 앞에서의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같고. 난 항상 내 인생 우선순위에 친구가 있었으니, 평생 그렇게 사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
그러나, 단적으로 말해서, 타인은 나와 같을 수 없다. 어쩌면 이 당연한 문장을 나는 최근에야 비로소 실감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고, 타인도 나를 사랑해도. 부족함 없이 사랑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아플 때 너도 같이 아파줄 수는 있지만 대신 아파줄 수는 없다. 네가 죽을 때 나는 죽을 만큼 슬플 수는 있지만 같이 목숨이 끊어지지는 않아.
이런 깨달음. 발전이라면 발전이겠고, 성장이라면 성장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을 얻을수록, 이런 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수용할수록, 내가 하루하루 낡아가는 기분이 든다. 어떤 명랑함, 반짝임, 투명함 같은 것들이 티끌이 되어 조금씩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 그래서 점점 나를 구성하는 것들은 닳고 낡은 것들만 남게 되는 것 같아. 쌓아가고 싶은데 바래지는 것 같아.
나는 내 안의 것들을 밖으로 꺼내기를 좋아했다. 말하는 것, 글을 쓰는 것.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하고 싶어 근질근질했고,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안의 것들을 밖으로 내뱉는 것은 나라는 사람의 당연한 이치, 자연의 순리였으니까. 나는 항상 할 말이 있었고 표현하고 싶은 감정이 있었고 쓰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설령 그게 내 치부가 된다고 해도, 솔직하지 못한 것이 제일 싫었기에 모든 걸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말하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다. 말과 글은 내 안에서부터 나올 수밖에 없는데, 내 안의 것들이 다 너무 싫어서 입 밖으로 내고 싶지가 않아. 곱게 경험과 세월을 쌓아가고 싶었는데 벌써 다 거칠게 낡아가는 것 같아. 멋스럽게 늙어가고 싶었는데 이미 메마른 것 같아. 그런데 그렇게 세상에 내뱉을 수 없으니 나는 더 썩어간다. 나는 서른에 죽어도 여한 없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점점 더 문드러진다.
그러니 이런 마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말은 나를 더 비루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죽어가야 할까. 내가 서른에 죽는다면, 어떻게 해야 미련 없이 잘 죽을 수 있을까.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에밀리 브론테는 남들이 원하는 천국 따윈 필요 없다며 죽어가면서도 <폭풍의 언덕>을 썼다. 예상대로 당시 평단에서는 악마의 책 취급을 받았지만, 그녀가 죽은 뒤 세계 명작이 되었지. 철학자 김진영 선생님은 섬망 증세가 오기 직전까지 일기를 쓰셨다. 그 일기를 엮은 <아침의 피아노>는 오히려 희망을 느끼게 하고. 의사였던 폴 칼라니티는 본인도 폐암 4기를 판정받은 후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썼다. 여기서 폴도, 죽어가는 것 대신 살아가는 것을 택했다는 류의 말을 하지.
영화 <소풍>에서 할머니들은 두 손을 꼭 붙잡고, ‘난 다시 태어나도 네 친구 할 거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두 분은 함께 긴 소풍을 떠나는 선택을 하신다. 영화를 다 보진 않아서 깊게 말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난 그 마지막 장면에서 그분들의 후련함을 느꼈다. 내가 스스로 존엄함을 느끼며 죽는 것, 그것이 진정 존엄사 아닌가? 만족스러운 선택을 하셨을 거라 믿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야구에서 타격왕도 4할이 못 된다, 10번 중의 6번 넘게 실패해도 타격왕이라는 거. 배구에서 3:0으로 진 팀도 한 경기에 20점은 넘게 냈다. 주인공은 항상 굴곡이 있다. 후회보단 실패를 선택하겠다……. 이런 맥락 없는 말들만 붙들고 사는 게 답인지는 모르겠다. 하물며 언니한테도 괴물이 쓴 문장이라는 평을 듣고도, 폐렴을 앓으면서도, 꿋꿋이 시체를 끌어안는 글을 쓴 에밀리 브론테의 마음이 뭘까? 소위 요즘 언어로 세상이 날 억까해도 원영적 사고로 중꺾마를 실천한 그 마음은 어떤 심지일까. 열정이 모조리 재가 되버린 지금 내 기분으로는 알 수가 없지만.
글을 쓰지 않았던 적 없는 나의 인생에서, 내가 죽는다면 나도 결국 할 것은 글 쓰는 것이다. 나의 존엄함을 지켜왔던 나의 가장 익숙한 방식. 그렇다고 굳이 갑자기 희망적일 필요도 없겠지. 내가 무얼 해야 할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이 길에서는 더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지옥에서 절대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야 했던 오르페우스의 마음 정도는 괜찮을까? 수많은 의심과 고통과 혼란 속에서 결국 뒤를 돌아보고 인생의 모든 것을 잃게 됐지만, 그래도 또다시 또다시 반복하는 이야기처럼. 또 저주를 반복하게 되는 이야기를 쓰게 되더라도, 이것이 내 첫걸음이다.
[주영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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