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왜 믿음 깨진 사랑은 소급효가 안되나요 - 오로라

글 입력 2024.03.17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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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작가를 좋아한다는 말은 그만해도 될 것 같다. <단 한 사람> 리뷰 글에서도 절절히 썼고, 처음으로 같은 작가의 작품을 두 번이나 추천했다. 신작 소식을 늘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 텐데, 그게 맞다.


바로 직전 장편 소설인 <단 한 사람>의 메인 테마는 상실이었다. 단 한 사람만 구하는 것, 그것은 다르게 보면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세상을 상실하는 것이었다. 생을 구원하며 역설적으로 죽음의 상실을 경험하고, 타인의 삶을 구하며 반대로 본인의 삶은 잃어가는 모순적인 상황. 어쩌면 생과 죽음, 구원과 상실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으며, 이 모호한 경계들이 점철된 곳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라는 메시지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번 <오로라> 역시 상실의 내용을 담고 있다. <단 한 사람>보다는 가볍고 소설의 분량도 훨씬 짧지만, <단 한 사람>만큼 어려운 면도 있었다. 다만 드넓은 인류애적인 사랑을 말하던 최진영 작가가 이번에는 한 뼘 더 가깝고 친밀한 사랑을 이야기하며 공감대를 넓혔다. 그리고 사랑에 믿음이라는 개념을 추가시키며 한 뼘 더 나아갔다. ‘너’라고 지칭하며 주인공 본인의 이야기를 푸는 방식도 새롭고 독특했다.


 


사랑을 묻어요, 묻어야 살아요



<오로라>의 부제는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이다. 이 문구는 책 내용에도 있고, 표지에도 적혀 있으며, 표지의 띠지를 걷어내면 그 아래에 답변까지 함께 적혀 있다. ‘사랑을 감출 수 없어요.’라고. 비밀을 들키면 사랑을 감출 수 없다는 ‘너’이자 주인공의 말은 슬프다. 사랑을 감추기 위해 비밀을 묻으려 비밀을 더욱 만들고 있는 너이기에. 그런 너에게 그는 말한다.


 

누구나 감추고 삽니다. 한 명쯤은. 아무도 모르게. 어둠 속에서. 홀로 사랑합니다. 그러니 당신도 묻어버려요. 마음에. 심장처럼. 그럼 들키지 않고 그는 당신이 됩니다.

죽어야 묻지.

묻어야 살아요.

 

p57

 


이 대목이 정말 좋았다. 몇 문장 안 되지만 한 문장, 한 문장 다 뜯어서 좋은 점을 말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사랑을 감추는 아픔에 허덕이는 너에게 그가 의연하게 누구나 다 그렇게 산다고 말해주는 것도 좋았고, 그러니 감추려고 하지 말고 그 사랑을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묻어 그 사랑 자체가 되라는 말도 좋았고, 상대방이 죽지 않으면 그 사랑을 묻을 수가 없을 것 같은 그 힘든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는 너도 좋았고, 묻어야 산다는 그의 말도 좋았다.


누군가 너무 미우면 그 사람을 사랑해버린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처음 들었을 때 정말 띵했다. 너무 미워서, 미워하는 것조차 미워서, 그래서 나의 일부로 품어버린다… 사랑으로 품어버린다는 것. 영원히 감춰야 할 사랑을 마음속에 묻으라는 말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평생 내 마음속에 꼭꼭 묻어서, 그래서 완벽히 감추는 것. 그 사랑은 내 안에만 있고, 그래서 나에게도 영영 사라지는 것.

 

<헤어질 결심>도 생각났다. 이 소설의 배경에 바다가 있기도 하고, 사랑을 평생 박제하는 방법은 그 상태 그대로 묻어버리는 것이니까. 너무 가슴 아픈 사랑, 너무 사랑한 사랑, 너무 싫은 사랑, 너무, 너무한 사랑.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사랑. 정말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사랑 무덤 하나쯤 묻어두고 살까? 인생을 더 살아보면 알 수 있으려나, 정말 궁금하다.


 

 

믿을 수 없겠지만, 믿음 없는 사랑



믿음 없는 사랑은 가능한가, 사랑 없는 믿음은 어떤 모습인가, 그게 완전히 없을 수가 있는가. 이런 질문을 생각하며 작가는 글을 썼다고 한다. 실제로 이소라의 ‘믿음’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책에 수록되어 있기도 했고. 책을 다시 읽으며 노래를 들으니 영원히 사랑한다는 마음을 고백하며 사랑의 힘이 되어달라는 호소의 노래이기도 했다.


 

너는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라는 경구를 떠올렸다. 믿음은 둘째 또는 셋째구나. 어쨌든 첫째는 될 수가 없구나. 믿음은 사랑보다 슬프겠구나……

 

p6

 


너는 ‘믿을 수 없겠지만’이라고 시작하는 친구의 말을 듣고 친구의 제주도 한 달 살기 숙박권을 양도받아 제주도에 오게 되었고, 끝까지 그는 너의 이름을 잘못 알고 있고, 너의 이야기도 거짓말로 시작된 이야기였다. 제주도에서 너는 모든 게 거짓이었다. 꼭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과가 그러하다. 딱히 싫을 것도 없다. 애초에 그러려고 간 여행길이니까.


그러나 거짓의 벌판에도 믿음이라는 모래성이 쌓일 수 있는 것이다. 믿음 없는 사랑은 가능한가? 그 사랑이 알고 보니 내 믿음을 배반했다면 그 사랑은 없어질 수 있는가? 믿음이 없어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게 되는가? 다 아니다. 사랑 앞에서 믿음의 사실과 믿음의 객체들은 무용지물이 되곤 한다. 사랑이 진행될 때 믿음은 사랑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사랑 후의 믿음 없음은 사랑의 힘을 빼앗지는 못한다. 사랑은 늘 첫째니까. 믿음은 사랑보다 후순위니까.


참 아쉽게도, 짜증나게도, 비합리적이게도. 사랑에서 믿음이 깨졌다고 해도 그건 소급효가 안 된다. 믿음이 깨진 걸 알아도 사랑을 시작하기 이전 시점부터 다 없었던 일이 되지 못한다는 거다, 우리 마음이. 마음은 법리처럼 합리적익지 않고, 객관적이지 않고, 약속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사랑해버린 마음은 그 상태가 되는 거다. 

 

 

그것만이 네 결백을 증명할 수 있지만, 결백이 무슨 소용인가? 이미 사랑해버린 것을.

 

p49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믿음이 없어진 사랑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믿음 없는 사랑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믿음이 없어진 사랑에 질질 끌려다니며 아파하는 사람이 바로 너라면, 반대로 지금 그와의 새로운 사랑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 참 아이러니하고 모순적인 게 믿음과 사랑의 관계다.


 

믿음, 믿음, 믿음 중얼거리다 보니 믿음과 미움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도 같았다.

 

p6

 


그러니 너는 믿음이 미울 만도 하다. 사랑에 넘어갈 때는 홀랑 힘을 발휘하면서 배신으로 다가올 때는 누구보다 아프게 다가와 널 멍청하게 만드니까. 믿음이 미움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니, 정말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는데. 사랑에서 믿음은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 믿음, 끝까지 지푸라기라도 믿고 싶어 하는 그 믿음만 없어도 다들 좀 덜 아프고 살 수도 있을 텐데….


 

 

너의 사랑 고백, 나의 믿음 무덤



작중 주인공은 끊임없이 ‘너’의 이야기를 하듯 나의 이야기를 한다. 본인의 이름을 아무도 묻지 않는데 자신의 진짜 이름이 아닌 ‘오로라입니다’를 말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연습한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너’라고 칭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그 누군가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끊임없이 너의 이야기, 너의 상처, 너의 아픔을 물어봐 주고 너의 존재를 물어봐 줄 존재가 필요했을지도. 왜냐면 그녀 스스로도 결백하지 못하다는 가책이 있기 때문에.


 

어떤 믿음에는 이기적인 구석이 있지. 너는 믿음에 깃든 이기심을 되새긴다.

 

p23

 


믿음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희망찬 단어인가. 그런데 이 소설은 믿음의 이면을 생각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던져주어 흥미로웠다. 사랑에서 믿음에 배신당해본 일, 그럼에도 사랑을 끊어내지 못한 일, 아픈데 남에게 쉬이 위로받을 수도 없는 일. 생각보다 정말 흔하고 많은데, 또 대놓고 위로받을 수는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팠겠다고, 힘들었겠다고, 대놓고 위로해주겠다고.


 

사냥하듯 사랑하지 마.

 

p63

 


최진영 작가의 암청빛 색채도 좋아하지만, 심금에 와닿는 문체 역시 너무나 사랑한다. 사냥하듯 사랑하지 마. 절박하고 위태롭고, 억울하고 처연한 이 느낌이 너무 좋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수많은 감정을 압축해낸 최진영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짧은 소설 안에 좋은 문장들이 너무 많았다.


 

새뿐이겠는가. 숱한 죽음이 묻혔을 것이다. 땅속뿐이겠는가. 우주 또한 생명 없음으로 가득하다. 아래위 무한한 죽음 사이에 실오라기 같은 대기권이 있고, 거센 바람이 분다.

너는 휘청거린다.

 

p54-55

 

 

그리고 최진영 작가 특유의 전지구적, 인류애적 사랑과 삶에 대한 사유. ‘너는 휘청거린다’에서 나의 모습이 투영되어 함께 보였다. 죽은 새를 묻은 주인공 ‘너’는 종국에 심장처럼 사랑을 묻는다. 끝에서 한 걸음을 나아간 그녀가 부러웠다.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일까 봐. 믿음에 대한 배신은 비단 사랑이 아니더라도 인생에 큰 상처를 남기는 일이고,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아픔이 남을 수밖에 없는데. 나는 계속 휘청거리고 주저앉아있기만 할까 봐.


‘너’가 자신의 이름을 자신이 원하는 ‘오로라’로 짓고, 제주도에서 그 오로라로 살아보려고 한 것에서 드라마 <도시남녀의 사랑법>도 생각났다. 앞서 말했듯 이 짧은 책을 읽으며 다양한 작품과 생각들이 많이 떠올랐는데, 그만큼 공감대가 넓고 저릿한 작품이었다. 최진영 작가의 책 중 가장 대중적 접근성이 높지 않을까. 여러 번 읽을수록 이 이야기와 문장의 진가가 더 느껴진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읽을수록 더 좋았는데, 이 글을 쓰며 또 더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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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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