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랑이 원래 사람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인가 - 로테, 운수

희대의 로맨티시스트가 아닌 희대의 범죄자
글 입력 2021.11.0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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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두팔(가명), 베란다에 걸린 남자 옷, 현관에 놓인 군화. 미디어에서 대수롭지 않게 언급되는 이것들은 여성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발악이다. 자신이 남성인 척 혹은 남성과 함께 지내는 척 속이는 것이다. 혼자 사는 것을 알고 집에 침입할까봐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배달 음식을 받는 순간에도 두려움이 여성의 마음속에 도사린다. 이 두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우리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로테, 운수>는 이런 물음으로부터 출발한 연극이다.


<로테, 운수>는 어릴 적부터 학습해 온 남성주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운수 좋은 날>을 비트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현대적이고 페미니즘적으로 재해석된 이야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불쾌하면서도 통쾌하다.


김로테는 젊은 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은 미술사학과 부교수다. 고전 소설 속에서 베르테르가 일방적인 구애를 펼쳤던 ‘로테’는 스토킹 범죄 피해자 ‘김로테’로 재해석된다. 병원에 상담을 받으러 온 로테는 자신이 왜 불안증을 겪게 됐는지 이야기를 풀어낸다.

 

오랜 기간 남자친구와 잘 만나고 있던 로테, 남자친구가 출장을 간 어느 날 집 앞에서 의문의 꽃 한 송이를 발견한다. 그녀는 집 안에도 물건 위치가 바뀌어 있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다. 불안이 그녀를 잠식해갈 때 즈음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수사가 어렵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경찰은 그녀에게 ‘인기 많아서 좋겠다’는 말을 전한다. 불쾌한 경찰의 대사는 어딘가 익숙하기에 소름이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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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행정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안 로테는 스스로 방어막을 설치한다. 집 앞에 CCTV를 설치하고, 며칠 후 그녀를 스토킹한 범인이 잡힌다. 범인은 생판 모르는 남이 아니라,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베르테르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가 아직 어려서 실수를 했다고 선처를 부탁하지만, 강단에 서기 어려울 정도로 정신이 망가진 그녀는 부탁을 거절한다. 베르테르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자신의 행동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로테를 협박하지만 통하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사후 그의 자서전은 ‘세기의 사랑’이라는 말로 달콤하게 포장돼 베스트셀러에 등극한다.


운수는 택시 기사 김첨지의 아내다. <운수 좋은 날> 소설에서 설렁탕을 먹지 못한 채 싸늘하게 식어간 ‘김첨지의 아내’는 ‘운수’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 더불어 신체적, 언어적 폭행을 당했지만, 이내 적극적으로 상황을 타개하려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운수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남편 살인 용의자다. 병원을 싫어하는 남편 때문에 아파도 집에서만 끙끙 앓던 운수는 남편이 설렁탕을 포장해 온 날 그를 살해한다. 누워서 꼼짝하지 못하는데도 ‘남편이 집에 왔는데 나와보지 않는다’며 그녀의 머리채를 잡은 행동에 더는 참지 않는다. 뚝배기로 그의 머리를 강타한다. 그녀가 쌓아 온 설움만큼, 반복해서.


법정에 선 운수에게 검사는 묻는다. 왜 진작 김첨지와 이혼을 하지 않았냐고, 왜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그의 머리를 내려쳤냐고. 사실 가정 폭력으로 신고는 여러 번 했다. 운수의 상처 치료가 끝나기도 전에 김첨지는 풀려났고, 그녀는 보복을 당할까 벌벌 떨었다. 어떤 날은 김첨지가 자신을 신고하기도 했다. 경찰과 이웃들은 ‘가정’의 일이니 그들끼리 해결하길 바랐고, 그녀가 뻗은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었다. 돈은 있었지만 도망칠 수는 없었다. 김첨지의 세계에 살고 있던 운수가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하려면 짐작하기 어려운 결심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상처는 계속해서 곪았고, 머리를 맞은 순간 톡, 하고 터져버렸다.


로테는 의사에게 과대망상과 히스테리 기질이 다분한 여자라 평가받고, 운수는 판사에게 유죄를 선고받는다. 남성의 시선으로 풀어낸 원작보다, 여성의 입장에서 서술한 이야기가 더 비극적이다. 하지만 누가 더 비극적인 상황에 처했냐 겨루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원작에서 왜곡한 부분을 밝혀내는 것이다. ‘고전 명작’이라는 껍질을 벗겨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다. 베르테르와 김첨지는 사랑을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스토킹, 주거침입, 가정폭력 등의 범죄를 저질렀고, 범죄자라고 재평가를 받아야 마땅한 인물이다. 그들의 실체를 마주하자, 비로소 왜곡된 시선으로부터 스멀스멀 자란 두려움이 뿌리 뽑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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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내용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로테, 운수>는 무대 미술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극은 적극적으로 무대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더는 덜어낼 것이 없는 새하얀 벽과 바닥, 소품도 책상과 의자, 물감통이 전부인 무대이지만, 로테와 운수의 심정대로 무대가 새까맣게 칠해진다. 로테는 서 있을 곳을 잃고 구석 의자에 쪼그려 앉아 괴로워하기도 한다. 소재 자체는 기시감이 들었으나, 연기와 연출로 새롭게 탄생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여성에게 반복적이고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범죄의 심각성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공연에는 스토킹 범죄와 가정폭력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극 시작 전, 이런 문구가 나타난다. 스토킹 범죄와 가정폭력, 연극이 끝난 후엔 이 단어의 무게감이 온전히 전해져 발걸음을 떼기 어렵게 만든다.

 

 

[임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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