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선희는 누구인가 [영화]

'우리 선희'에 대해 정의하는 세 남자
글 입력 2021.11.0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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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요?



영화과 졸업생 선희(정유미)는 미국 유학을 앞두고 교수의 추천서가 필요하다. 추천서를 부탁하기 위해 최 교수(김상중)를 찾아가는데, 이어 과거의 남자들-전 남자친구 문수(이선균)와 선배 재학(정재영)까지 만나게 된다.

 

선희는 ‘추천서’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이 누군지 정의해줄 수 있는 ‘말’이 필요하다. 당신이 누군지 말해줄 사람(최 교수)을 찾아갔고 추천서라는 매개가 없는 문수와 재학에게도 선희는 세 남자에게 똑같은 물음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누구인가요?’

 

<우리 선희>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주인공(선희)의 내레이션이 등장하지 않고 인물에 대한 줌 또한 확연히 덜 쓰였다. 이는 우리가 주인공의 속내가 아닌 등장인물들의 입을 따라 선희의 모습을 바라보게 됨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세 남자가 말하는 선희는 누구인가.

 

 

 

세 남자는 선희에 대해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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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남자(최 교수, 전 남자친구 문수, 선배 재학)가 선희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선희를 잘 아는 것처럼 보인다.

 

ㅡ 최 교수-‘너는 사람하고 부딪히면서 뭔가 만드는 걸 힘들어하잖니.’, 문수-‘내 모든 영화는 너에 관한 거야. 넌 내 인생의 화두야.’, 재학-‘좋아하는 걸 해. 너 그거 다 핑계 같아.’ 세 남자는 과거에 선희와 크거나 얕은 이성적 교류가 흘렀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또 하나, 그들은 지금 선희를 앞에 두고 ‘선희, 너는 너무 예뻐.’를 주술처럼 넣으며 선희 당신 앞에서, 당신을 정의함으로써 ‘우리 선희’ 즉 본인과 선희가 친밀한 관계임을 은밀히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세 남자, 말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그들은 선희가 없는 채로 본인들끼리 만남을 가지기도 하는데(문수-재학, 최 교수-재학) 그들 대화를 듣고 있으면 어딘가 반복되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를테면 ‘끝까지 파봐야 한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마치 자신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고, 믿지 않으면서도 남의 말을 옮겨 뱉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타인에게 반복적으로 ‘끝까지 파봐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들 자신은 그렇게 행동하고 있지 못하다. ㅡ 최 교수-‘난 가끔 네가 부럽다.’, 문수-‘나 학교 마치면 어디 딴 데 좀 가 있고 싶어.’, 재학-‘내가 그럴 자격이 없잖아.’ 그들의 입에는 자신의 실체와는 다른-무의미한 말들이 붙어있다.


마지막으로 창경궁에 남겨진 세 남자가 입을 모아 규정한 ‘우리 선희’는 내성적이지만 용감하고 안목 있고 가끔은 또라이 같지만 착한 여자다. 그러나 영화에서 선희가 그렇다 할만한 성격을 목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선희의 실체를 아는 남자는 없는 것인가. 결국 <우리 선희>는 선희를 둘러싼 말들은 선희의 실체를 포착하는 것에 실패하고 마는, 말의 오류와 한계를 시사하는가.

 

 

 

선희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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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 남자도 선희의 실체를 목격하고 정의 내린 것은 아니다. 애초에 추천서를 부탁받은 최 교수의 대답처럼 (“그래, 나는 너를 아는 만큼 쓸 거야.”) 세 남자는 각자의 ‘우리 선희’에 대해서 아는 만큼 썼을 뿐이다.

 

세 남자가 창경궁에 모여 씁쓸하게 대화 나누는 장면은 (문수-‘나도 선희가 무슨 생각 하는지 잘 몰라요.’, 최 교수-‘뭐 자기 편한 대로 사는 거지.’, 재학-‘남이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그들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그 누구도 선희의 실체에 대해서 알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선희는 세 남자의 말을 통해 자신이 누군지 알고 싶었다. (문수에게-내가 이상하지?’, 최 교수에게-‘제가 그렇게 내성적이에요?’, 재학에게-‘제가 용감해요?’) 선희는 당신 스스로도 실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세 남자로부터 자신에게 내려지는 정의(말)를 구한 것처럼 보인다. 말은 명확하므로 때때로 뭉개진, 모호한 실체를 보호해 준다는 점에서 말이 실체를 구해주기도 한다. 선희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최 교수의 추천서를 얻어냈으므로 그녀가 누군지 정의해 주는 ‘말’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렇다 한들, 선희 자신은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됐을까. ‘선희’는 누구인가. 세 남자를 남겨두고 창경궁을 유유히 빠져나오고 있다.

 

 

[박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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