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안에 사는 괴물, 또 다른 나 [공연/연극]

기억은 반드시 떠오른다, 연극 <인사이드>
글 입력 2021.11.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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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마주할 기억이 당신을 더 힘들게 할지도 몰라요"



연극 <인사이드>는 영국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인 일명 '오필리어 살인사건'의 진짜 범인을 쫓아가는 미스터리 심리스릴러 연극이다. '오필리어 살인사건'이란 이름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에서 등장하는 여주인공 오필리어처럼 원피스를 입은 다수의 여성이 살해당한 후 물에 빠진 채로 발견되어 이름 붙여졌다. 과연 이 기괴한 살인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

 

모든 기억을 잃고 낯선 곳에서 눈을 뜬 주인공 맷은 이곳이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그리고 자신이 왜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 이곳은 병원이며 자신을 담당 의사라고 소개하는 박사와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두 사람은 기억을 되찾는 단서로 맷의 꿈을 이용하기로 하는데, 이상하게도 꿈을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기억들이 서로 충돌하며 또 다른 기억을 불러내고 만다. 하지만 그런 맷에게 박사는 이곳엔 우리 둘뿐이라고 강조하며 충돌하는 맷의 기억을 부정하려 한다. 결국, 맷은 박사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충돌하는 기억들 때문에 너무 괴로운 나머지 병실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병실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흔히 '다중인격장애'라고 알려진 '해리성 정체 장애'를 소재로 한 연극 <인사이드>는 동일한 소재로 2016년 선보인 바 있는 뮤지컬 <인터뷰>의 연극 버전 작품이다. 정확히는 뮤지컬 <인터뷰>의 프리퀄 버전이라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 같다. 뮤지컬이 서사 중심으로 진행됐다면, 연극은 좀 더 주인공의 내면에 집중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때문에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뮤지컬 <인터뷰>를 관람하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다. 아마 연극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짧은 시간 내에 이야기의 흐름을 매끄럽게 압축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 펼쳐진 각각의 장치들은 극이 진행되는 내내 작품의 이해도를 높이는 데 좋은 역할을 한다. 조명 장치를 활용해 깨진 조각들을 만들어냄으로써 맷의 흩어진 기억을 표현할 뿐 아니라 흐르는 물소리, 스산한 기계음 소리 등의 음향 효과로 관객들의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또한 무대 곳곳에 설치된 '물'이라는 소재는 천장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바닥에 고여있기도 하고, 때로는 배우들의 행위를 통해 변형되기도 하면서 주인공의 무의식을 나타내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특히 '물'에서 건져 올린 가지각색의 단서들이 맷의 기억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기억이 수면위에 떠오르는 모양'을 시각적으로 느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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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중 사랑으로 사랑한다"



오랜 추적 끝에 맷은 자신의 기억 조각 속에서 누나 조안을 찾아낸다. 남매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끔찍한 학대와 폭행을 당하며 서로만을 의지한 채 살았다. 하지만 맷은 누나 조안이 문학 선생님인 싱클레어 고든과 함께 자신을 떠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절규한다. 자신에게 평생 유일한 존재이자 세상 그 자체였던 누나 조안이 자신을 떠나려 한다는 게, 맷에게는 마치 죽음과 같은 공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깨끗이 지운 채 또 다른 인격을 만들어내고 모든 기억을 깊은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혀 두었을 것이다.

 

우습게도 연극이 끝나고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시인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애너벨 리> 중 "사랑 중 사랑으로 사랑한다" 는 구절이었다. 아마 맷과 조안의 관계를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구절임과 동시에 단어의 반복 속에 녹아있는 아이러니가 재밌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극 중에서처럼 극도로 두려운 상황에 그토록 믿고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난다면, 과연 나는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영원히 함께하자던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의 문제일까, 약속을 어긴 사람의 문제일까?

 

 

오래고 또 오랜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

여러분이 아실지도 모를 한 소녀

애너벨 리가 살고 있었다

나만을 생각하고 나만을 사랑하니

그 밖에는 아무 딴 생각이 없었다


나는 아이였고 그녀도 아이였으나

바닷가 이 왕국 안에서

우리는 사랑 중 사랑으로 사랑했으나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날개 돋친 하늘의 천사조차도

샘낼 만큼 그렇게 사랑했다


- 애드거 앨런 포, 애너벨 리 [Annabel Lee] 中

 

 

실제로 '해리성 정체 장애'를 겪는 환자들의 주요 원인은 유년 시절에 받은 육체적, 성적 학대로 알려져 있다. 환자의 95~100%가 근친상간이나 학대를 받은 경험이 있으며 이러한 충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또 다른 인격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물론 이것이 그들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낸 인격들이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감출 수가 없다.


예전부터 쓸데없는 곳에 기억력이 좋은 나는 때때로 잊고 싶은 기억이 잊히지 않아서 괴로울 때가 있다. 특히 충격적인 사건이나 경험 또는 사람에 대한 기억은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시간이 흘러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인물, 사건, 배경 심지어 그 당시의 온도와 습도까지도 기억해내는 나를 보며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기억하냐고 묻곤 한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그 잊히지 않는 기억 속에 스스로 잠식되어 훨씬 더 괴로웠던 것 같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괴로운 기억에 잠식되지 않는 나만의 노하우를 찾아냈다. 비록 어두운 기억보다는 힘이 약하지만, 내 안의 좋은 기억을 더 오래 떠올릴 수 있도록 생각 근육을 키우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적절한 때에 좋은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아 마음이 무척 조급했다. 그러나 여러 번의 연습이 거듭될수록 나는 확신하게 됐다. 당장은 잘 떠오르지 않더라도 천천히 침착하게 내 안을 들여다보면 어두운 기억을 모두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좋은 기억이 내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어두운 기억이 나를 찾아오면 더는 조급해하지 않고 그저 잠잠히 기다린다. 조금 느려도 내 안의 기억은 반드시 떠오를 테니까.

 

 

[서은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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