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유의지의 두 얼굴 : 선과 악 [도서/문학]

선함과 악함의 양면, 그리고 윤리적 선택의 강제
글 입력 2021.11.06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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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모든 순간순간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나의 ‘자유의지’로 말이다.

 

아침으로 토스트를 먹을지 먹지 않을지와 같은 사소한 것부터 길을 가다 발견한 굶주린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챙겨줄지 말지, 혹은 밤을 지새워 다음날 있을 발표를 준비할지,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동기들과 술자리를 가질지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에 따른 결과에 책임을 진다. 너무나 당연한 그 ‘자유의지’가 없는 삶은 상상하지도 못한다.

 

나만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자유의지를 행사한다. 세상의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 산속에서 자연인처럼 살아가는 이도, 살면서 벌어온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이도, 잘 다니던 대기업을 나와 세상을 여행하거나,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이도, 모두.

 

이렇게 보면 자유의지란 인간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긍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자유의지가 있기에 지금의 사회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에.


그러나 동전도 양면이 있고, 골판지도 앞뒤가 있다. 자유의지의 행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선한’ 자유의지가 있다면 ‘악한’ 자유의지 또한 있으니까. 잠을 방해했다며 선생을 폭행하고, 집단이 한 사람을 괴롭힌다. 부모의 돈을 훔치고, 믿음을 준 이에게 사기를 친다.

  

매우 그릇된 방향이지만, 그런데도 그들 또한 자유의지를 행사한다. 물론 그들은 법에 따라 처벌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어차피 나와서 같은 짓을 저지를 사람이야.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아’라는 식으로 생각하곤 한다.


여기서 문제. 만에 하나 모종의 방법을 통해 그들이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고, 오로지 선한 행동만 할 수 있도록 강제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가?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를 소개한다. 그리고 소개를 마친 후 다시 묻고 싶다. 당신은 그러한 방법에 동의하는지, 동의하지 않는지.

 

 

*

책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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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조심해라. 왜냐하면 너도 잘 알듯이 다음번에는 더 이상 소년원 행이 아니란다. 다음에는 철창신세일 테고, 그러면 내가 공들인 모든 일이 다 수포가 되는 것이지. 만일 고약한 네 자신을 위하지 않을 거라면, 최소한 너를 위해 땀 흘려 노력한 나를 좀 생각해 주렴......”

 

“저는 해서 안 되는 일을 한 적이 없어요. 경찰 놈들도 저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형씨. 아니 선생님.”

 


소설의 주인공 알렉스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눈살을 찌푸릴 만큼 잔인한 악행을 밥 먹듯이 해오는 개차반이다. 일말의 죄의식조차 가지지 않고 장난으로 남을 해친 후, 마약을 탄 우유를 마시며 동료들과 시시덕거리는 그런 청소년이다. 자신을 위하는 소년원 담당자를 조롱하고 농락한다. 경찰들을 무시한다. 알렉스는 이 모든 행위를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사한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어떤 사건을 계기로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가게 된 알렉스는 감옥에서의 생활이 몸서리칠 만큼 싫었는데, 정부에서 주도하는 ‘루도비코 치료법’을 받으면 바로 출소할 수 있다는 말에 임상시험에 참여한다. 약물 주사를 맞고 옴짝달싹할 수 없게 묶인 채 잔인하고 성적인 영상들을 강제적으로 시청하며, 점차 그러한 행위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는 몸으로 변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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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 주머니에 있는 면도칼에 손을 뻗쳤을 때, 내 마음속에는 놈의 입에서 붉은 피를 줄줄 흘리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울부짖는 모습이 떠오르는 거야. 바로 이어서 메스꺼움과 갈증과 고통이 몰려와서는 나를 압도하게 되었어. 그때 난 이 썩을 놈에 대한 생각을 아주 잽싸게 바꿔야만 한다는 걸 깨닫고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나 이쁜 쩐을 더듬어 찾았지. 그런데, 형제들, 그런 것이 없더군. 소리치고 울면서 내가 애원했지. “담배를 주고 싶지만, 형씨. 하나도 없는 것 같네요.”

 

……치솟는 고통과 메스꺼움을 피하기 위해서 모욕과 아픔을 주는 그놈에게 착하게 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말했지. “제발 댁을 위해 뭐라도 하게 해주세요.”

 


개인의 선택은 존중되어야 한다. 자유의지는 억압되어선 안 된다. 우리는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개인의 자유의지와 선택이 다른 이들에게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야기한다면? 소설 속에서는 그런 범죄자에게 루도비코 요법을 실시해 악한 선택을 할 ‘의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개인의 자유의지를 박탈하고, 강제적으로 선한 행위를 하도록 강제한다.

 

여기서 한 가지. 개인의 의지로 악한 행위를 하는 것과 윤리적 결정을 내릴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나쁜 것일까?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차이점 중 하나가 바로 자유의지인데, 그것을 없애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우리는, 악한 행위를 한 이의 자유의지를 박탈할 권리가 있을까?


쉽게 결정 내릴만한 사안은 아닌 듯하다. 사회의 공리 측면에선 반사회성 행동을 하지 못하게 강제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만, 개인의 권리 측면에선 결국 그런 반사회성 행동도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기에.

 

*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범죄를 저지른 자는 교도소에 다녀와도 다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만 처벌하는 것이 좋을까, 높은 확률로 일어날 수 있는 범죄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 좋을까.


다시, 만에 하나 모종의 방법을 통해 그들이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고, 오로지 선한 행동만 할 수 있도록 강제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가?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심오하고 어려운 질문들이구나……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제거당하겠다는 선택을 내릴 때, 넌 진짜로 선을 선택한 것이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구나. 신이 우리 모두를 돌보시겠지.”

 

 

[최원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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