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빚지지 않는 관객

좋은 관객이란 무엇인가
글 입력 2021.11.04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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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홈즈>시리즈에 빠져 있었던 어린 시절, 나는 셜록의 파트너인 왓슨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타고난 추리 능력으로 평범한 이들은 엄두도 못 내는 두뇌게임을 즐기는 천재의 활약을 최전방에서 지켜볼 수가 있다니. 물론 건방진 천재의 뒤치다꺼리는 실로 쉽지만은 않아 보였지만, 동료라는 명목 아래 접할 수 있는 미스테리 극의 방구석 1열 급 특권이 참 부러웠다.


기왕 탐을 낼 것이라면 셜록의 천재적인 두뇌를 부러워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소박하게도 나는 그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곳이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웠다. 애초에 타고나길 정형화된 주인공의 틀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기에 그 자리에는 욕심이 딱히 없기도 했고, 일단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고 무척이나 즐거웠기 때문이다.


<셜록홈즈>는 왓슨 박사의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전개된다. 소설의 시점에 대해 배우기 시작할 때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도 역시나 이 ‘1인칭 관찰자 시점’이었다. 서술자 ‘나’는 주변인물로서의 부차적 인물에 불과하지만 주인공 가까이에서 관찰자로 그의 행동을 시종 관찰한 바를 그대로 기록해낸다. 이 시점은 1인칭 관찰자의 시선에 포착된 순간만을 그리기 때문에 1인칭 주인공 시점에 비해 객관성을 지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관찰자 그리고 관객. 이 둘은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분명히 공유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관찰하고 기록해낸다는 사실이 비슷하고, 자기 시선의 체에 거른 주관적인 해석이 이뤄지되 대상에 대해서는 객관적 묘사가 진행된다는 점이 그러하다.


주인공 대신 좋은 관찰자를 꿈꾸던 나는 문화예술에 있어서도 자연히 창작자보다는 좋은 관객을 꿈꾸게 되었는데, 오래도록 관객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궁리해보았으면서도 ‘좋은 관객이란 무엇일까’란 이 질문에는 멈칫하게 되었다. 아마도 ‘좋은’이라는 추상적인 단어가 불러오는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좋다는 것의 기준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며 그 정도도 상대적이다. 내가 생각한 기준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닌 만큼 좋은 관객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과 자격요건도 떠올리는 사람마다 상이할 것이기에 무엇인지 선뜻 정의내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 시대의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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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관객이라는 다소 엄숙함이 느껴지는 단어에 관해 떠올려보기 앞서 인터넷 창에 ‘관객’을 검색해보았다. 관객. 사전적 정의로는 ‘운동 경기나 공연, 영화 따위를 보거나 듣는 사람’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는 ‘따위’라는, 앞의 것과 같은 종류의 것들이 더 있음을 나타내는 이 의존명사에 집중하고 싶다. 관객이 더 이상 일방적인 수용자가 아닌 능동적인 참여자의 형태로도 자리하는 지금의 시대에 단지 운동경기나 공연, 영화를 보고 듣는 것으로만 관객을 한정 짓기 에는 분명 아쉬운 부분이 있다. 경기장, 무대, 스크린, 그밖에도 갤러리 등 다양한 장소에서 창작이 이뤄지고 있는 만큼, 관객들도 여러 곳에 존재하며 다채로운 방식으로 창작자와 교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튜브의 플레이리스트만 해도 그렇다. 여러 아티스트들의 음악들은 그 음악이 담고 있는 메시지나 분위기에 따라 지어진 제목의 플레이리스트로 한데 묶인다. 사람들은 제목을 보고 음악을 재생시키고 자신들의 감상을 댓글로 작성한다. 댓글 창에는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문학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풋풋한 첫사랑의 기억 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종종 음악에서 받은 영감을 토대로 쓴 단편 소설을 남기고 가는 사람까지 존재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음악을 통해 지난 추억을 떠올리고 자신만의 내밀한 경험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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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튜버 떼껄룩

 

 

길면 1시간, 짧으면 10분 남짓의 이 플레이리스트에는 음악을 만든 창작자뿐만 아니라 그 음악에 대한 애정을 담아 만든 플레이리스트의 창작자와 그것을 감상하는 소비자까지 복잡하게 얽혀있다. 누구나 쉽게 콘텐츠를 생산해낼 수 있는 1인 미디어 시대에서 우리는 창작자와 소비자의 경계를 손쉽게 넘나들며 적극적으로 소통한다. 중요한 점은 이렇듯 불분명한 경계에도 관객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그들이 창작물에 크든 작든 언제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플레이리스트에서 재생되는 곡들의 각 정거장을 거쳐 마침내 관객이 추억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했을 때. 영화관 스크린 속의 주연 배우에 이입하여 삶을 한 번 더 살아보았을 때. 무채색의 일상들은 다시 찬란한 빛깔로 채색된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 속에 서서히 스며든 예술은 삶이 척박할 때 툭툭 말 걸며 무궁한 가능성의 세계로 인도한다.

 

 


빚지지 않는 관객



이렇듯 내 삶에 울림을 준 예술작품들이 오래도록 나의 일부를 크게 차지했기 때문인지, 한때는 내가 좋은 작품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받은 것은 많은데 줄 거는 없어서 어쩌지. 내가 고심해서 준비한 선물이 전혀 의미 없는 것이면 어떡하지. 손해를 보면 보더라도 빚지고 사는 것은 아무래도 성미에 맞지 않아 고민의 순간들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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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나는 도서 <보건교사 안은영>의 안은영과 꼭 닮았다. 영험한 기운을 지닌 주인공 안은영은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낯설고 위협적인 존재들과 겨루며 살아가는데, 그가 살기에 세상은 너무도 각박한 곳이라 정기적으로 기운을 충전할 만한 곳이 필요하다. 대체로 그녀는 사람들의 소망이 깃든 명승지의 돌탑이나 남산타워의 자물쇠 등을 쓸어 만지며 기운을 충전하곤 한다. 명승지까지 가지 않더라도, 짧게나마 소원을 빌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화살기도에 얼마나 커다란 열정과 진심이 압축되어 있는지. 안은영은 감히 그것들을 손짓 한 번으로 쉽게 가져간다. 그리고 그것들로 자신의 기운을 순식간에 끌어올린다.


예술로서 건조한 삶이 단숨에 물을 머금어 촉촉해짐을 느낄 때, 스크린 속 주인공의 몇 마디의 대사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음을 실감할 때. 그럴 때면 꼭 나는 내가 손짓 한 번으로 누군가의 열정과 소망들을 너무 쉽게 가져가버린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것을 향유하기까지 들인 수고도 손짓에 발짓 몇 번 더 추가한 것이 다였다.

 

다행스럽게도, 위의 책에서는 소원 탑에 손을 대다가 기운을 얻는 것을 들킨 주인공에게 한 스님이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얻어 가시면 좋은 곳에 쓰셔야 합니다.”


그는 비가시적인 것들이 삶에 끼치는 영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다시 위안을 얻었다. 그래, 이건 내가 삶을 사랑하는 얼마 안 되는 방식이라 결코 포기할 수는 없구나. 그리곤 다시 다짐해본다. 이 귀중한 것을 얻어갔으니, 나도 잊어버리기 쉬운 이것들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겠다. 양심도 없이 훔쳐가지만은 말아야지. 다시 좋은 기운을 담아 누군가에게 전달해야겠구나. 라고.


어떻게 이 기운을 잘 활용할 수 있을까? '빚지지 않는 관객'이란 창작자의 의도를 분명히 파악해내고 그가 할 말을 꼭 짚어주는 관객만은 아닐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이 단순히 하나로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것은 이젠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애초에 관객에게 해석을 위임하고 각자의 경험과 지나온 날들에 따른 다양한 해석을 보며 기쁨을 느끼는 작가들도 있는 만큼, 정답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작품에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고 관객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향유하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기기에 알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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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것을 ‘감응하는 관객’이라고 칭하고 싶다. 감동은 단순히 나의 안에서 울림을 느끼고 머무는 행위지만, 감응은 감동에 응해 나아감을 뜻한다. 나아감의 방식은 다양하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들과 같이 글로 리뷰를 작성하기도 할 것이며 혹은 영감을 받은 대상에 대한 그림을 그리거나 자신의 방식으로 콘텐츠를 생산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하고 편한 언어를 이용하여 감동의 순간들과 함께 손을 잡고 밖으로 뛰어 나가는 모든 행위가 바로 ‘감응’인 것이다.


감응하는 관객은 작품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자기 내부의 이야기와 결합시키고 변용시키며, 자신만의 해석을 내어놓는다. 한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같은 시대적 배경의 작품들을 감상하기도 하며,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방식으로 나아간다. 자신이 감동을 느낀 작품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기도 하며 그것에서 얻은 기운을 다른 곳에 펼쳐놓는다. 그 감상이 언제나 호평이 아니어도 괜찮다. 관객의 적극적인 피드백은 건강한 문화예술 생태계가 유지되는 것에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단, 여기서는 주의할 점이 있다. 감응이라는 뜻이 감동에 응한다는 뜻이라고 해서, 감동을 눈물을 흘리는 감성적인 이미지로만 한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감동’의 사전적 정의가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을 뜻한다는 사실에 집중하여 여기서는 마음이 동하는 모든 행위를 감동으로 칭하고 싶다.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느낌이 들 때도 마음이 움직인다. 그럴 경우, 감응하는 관객은 내면에 공고히 자리 잡은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작품을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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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는 전 세계 도시의 거리와 건물 외벽에 남긴 그래피티 예술로 세상에 만연한 불평등과 폭력을 풍자하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뱅크시의 전시가 개막했다. 그러나 초기에 '오리지널(원본) 포함 150여 점'을 내세운 것과 달리 오리지널 작품은 27점이며, 나머지 120여점은 레플리카(복제본)였던 것이 큰 논란이 되었다. 후에 주관사는 ‘오마주 전시’라며 급하게 말을 바꿨다. 이런 경우마저도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조건적인 수용을 하는 것은 감응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관객은 근사한 포토존과 화려한 외관에 현혹되지 않고 본질과 의미를 들여다보아야 하며, 저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창작자의 존엄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2002년부터 시작된 국내 최대 규모의 국제아트페어 KIAF가 20회를 맞이했다. ‘아트’와 ‘제테크’를 합친 ‘아트테크’라는 말이 자주 들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올해 키아프는 유독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키아프의 갤러리들은 작가의 발굴과 성장에 도움이 되며 미술 시장이 활발히 일어나기에 아트테크는 분명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무언가 염려되는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시장의 흐름에 따라서만, 대중의 기호에 맞춰서만 가다 보면 조명 받지 못하는 작가들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현상이 심화될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미술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늘어나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그에 따라 소비자들도 자신만의 안목을 갖고 소외되는 작가들에게도 관심을 가지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며, 이런 이면들에 대해서도 신중하고 용기내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일도 관객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작품은 사람들의 삶에 울림을 주고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주고, 나아가 감동하게 하며 감동에 응하여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한다. 그리고 창작자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시선을 선물한 것에 대한 보람을 느끼며 또 다른 영감을 얻는다. 이런 순간순간들이 모여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상생을 이뤄내고 소통의 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감히 생각한다. 건강한 문화예술 생태계를 위하여, 메마른 삶을 촉촉이 적셔주는 예술작품들에게 빚지지 않기 위하여, 오래도록 감응하는 관객이 되자고 다시 한 번 꿈꾸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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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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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임성진
    • 현재 제가 필요한 자신감을 잃어버렸읍니다...아님 없던가요?...오늘도 옛 피시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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