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무도 사랑을 알려준 적이 없기에, '화차' [영화]

글 입력 2021.10.2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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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어떨까. 요리조리 뜯어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 투성이지만 막상 다른 사람으로 산다고 생각하면 모든 게 어색하고 아쉽기까지 하다. 기회가 된다면 하루 정도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는 싶다. 다른 얼굴로, 다른 생활로, 아무도 모르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떻게 다른 세상이 펼쳐질지 궁금하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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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차>의 차경선은 어느새 강선영으로 사는 게 익숙해졌다. 경선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기로 한 원인은 가족, 그중에 아버지. 그리고 연좌제처럼 그녀를 따라다니는 아버지의 빚이었다. 처음 결혼해서 생긴 가족은 빚을 갚으라는 횡포에 실패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빚을 갚다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도망쳤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가 생겼고, 그 아이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에게 더 이상 뵈는 게 없었던 게 이상하진 않다. 살인에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설득력이 있게 느껴질 때쯤 연민이란 게 생겨버린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지나치다가 살인을 한 것과는 다르다. 큰일이다. 연민은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


경선에게 <오징어 게임>의 초반부처럼 몸으로 때우고 돈을 버는 일이 있다는 제안을 받았다면, 그녀는 충분히 그걸 선택했을 수도 있다. 처음엔 당황할지 몰라도 꽤나 담담하게 오래 남아있었을 것이다. 가족을 위해 살아남아 그 돈을 쓰겠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서 벗어나 돈 걱정 없이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고 싶은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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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녀 같이 혼자인 선영을 찾아서 죽이고 그 사람으로 살기로 했다. 스스로가 사람이 아니고 쓰레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방법밖에 없고 돌아올 길이 없다고 믿기로 했다. 선영을 죽일 때 그녀의 피를 뒤집어쓰고 구역질을 하면서 도망 나왔다가도, 스스로 뺨을 때리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 짧은 장면이 내면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 갈지 상상하기 충분했다.

 

 

'아무래도 못하겠어. 벌써부터 후회돼. 이 사람을 죽여서 새롭게 살 수 있을까?'

'정신 똑바로 차려. 강선영은 이미 죽었어.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하지만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야. 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너는 무슨 잘못이 있어서 이렇게 살아? 아무 잘못 없이 산 네 인생이 얼마나 처참하게 망가졌는지 봐.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도 매일 죽어.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 잘 살면 되는 거야. 그게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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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는 선영에게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꿈꾸던 행복한 삶을 기대하게 했다. 적당히 둔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기 바빠서 그녀를 의심하거나 파고들 줄 몰랐다. 그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도 좋아했겠지만, 그는 어느 날 아침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했다.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자 돈 벌고, 돈 쓰고, 밥하고, 밥 먹고, 너 닮은 아이도 낳고. 그렇게 살자고 했다. 그녀가 원하던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삶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만 봐서 모르겠지만 그녀는 결혼하자는 말을 듣고 설레 하진 않았다. 그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는 선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믿어보기로 했다. 경선은 실패했지만, 선영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고, 실패하지 않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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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의 아버지는 근본도 없는 애를 데려왔다고 하시겠지만, 근본이란 게 대체 뭔가. 세상에 태어나는 건 부모님이 있다는 증거다. 좋은 집안이나 좋은 가족이 스펙이라는 이유로 결혼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으로 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선영에겐 아버지는 어차피 좋은 기억이 없는 사람이고, 새로운 가족이 되기 위해서 어머니의 마음에라도 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문호는 실없이 어머니들은 다 화사한 색깔의 스카프를 좋아한다면서 물어보지도 않고 확신에 차 있다. 모든 걸 샅샅이 알아도 시원찮을 판에 선영이 왜 그렇게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물어봤어? 어떻게 알아?'라고 물으며 오히려 그가 대충 넘어간다고 한다. 자세한 이유는 침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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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비밀이 있고 행복에도 불안이 따른다. 아무 걱정 없이 순간을 즐기기에도 모자란데, 어쩌다 찾아온 연이은 행운도, 별 다른 일이 없는 일상의 행복도 불안하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뭔가를 놓쳐서, 다가올 불행에 무방비하게 당해버리면 어쩌지 싶은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런 불길한 생각은 곧잘 들어맞는다.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상상이 그 반만큼이라도 들어맞았으면 세상 사람들은 제법 행복했을 텐데.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일수록, 그 불안이 행복을 좀먹는다. 그녀가 행복하기 위해서 선영을 죽이기 전에, 누군가를 죽이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더라면, 그녀는 그때도 선영을 죽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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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에 신경을 쏟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완전히 선영이 되진 못했다. 그녀의 재정상태를 알아보지 못해서 문호의 친구로부터 온 전화에 겁에 질려 도망갔다. 도망가는 와중에 온갖 짐은 치우고 지문은 철저하게 지웠다. 혼자였던 선영을 고른 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돈 문제였다. 문호도, 그와의 결혼도 뒤로하고 도망다니다가 그녀는 다시 다른 사람으로 사는 걸 시도해 보기로 했다. 혼자이지만 돈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 가족이 없다는 게, 진짜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 줄 중요한 사람이 없다는 의미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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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신이 막아준 결혼이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제 갈 길 가야 하겠건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문호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랑 외에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까. 영화 속의 문호가 감정 표현에 섬세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녀의 진짜 이름과 모습, 살인까지 알게 된 마당에도 다시 그녀를 만났을 때 잘 지냈냐고, 사랑하긴 했냐고 물어보는 걸 보면 사랑이 아닐 수 없다. 바보 같긴 하지만 사랑이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걸 어쩌겠나. 다른 사람의 사랑은 이야기하긴 쉽지만,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모든 감정을 따라갈 수 없다. 평생 남이었던 이와 결혼을 하고 가족이 되는 일엔 기상천외한 사연이 넘친다. 문호에게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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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득할 시간이 필요했다. 결혼을 앞두고 인사를 가던 길에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사라진 그녀를 경찰은 그러다 돌아온다며 별다른 연락을 주지 않았다. 연락도 하지 않고 살던 먼 친척이자, 전직 형사 종근을 찾아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제 발로 사라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충격적인 사실이 잇달아 밝혀졌다. 괴롭지만 그래도 계속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생각했던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게 없는지,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는지 괴리를 여실히 느끼면서. 매일 밤 곱씹고 그녀를 이해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그래도 그럴 순 없다는 생각 사이에서. 사랑한 시간만큼 이별하는데도 그만큼의 시간은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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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독한 사람이 못된다. 문호가 그녀가 다른 사람을 오늘 죽이지 않도록 막았지만, 그녀의 길을 막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너로 살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경선의 아버지를 실종 신고하고 파산을 해도 될 시점이 되었지만, 이미 그녀가 죽인 선영의 시체도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그녀와 결혼을 하거나 이야기했던 삶을 함께해 줄 리도 없다. 그는 선영을 사랑했지, 경선을 사랑한 게 아니었다. 둘이 같은 사람인데도. 끝까지 그녀의 진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가 너로 살라고 한 그때부터 그녀가 선영으로 살며 잊으려 했던 죄책감은 되살아났고, 종근은 그녀를 경선이라 부르며 그녀의 죄를 뒤쫓아왔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며, 이제 다 끝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는 자수하지 않았다. 수갑을 찬 모습을 보여주는 게 죽기보다 싫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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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게 그녀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못나고, 불편하고, 부끄러운 존재라면 사라져 버려서 짐이 되지 않는 게. 아무도 그녀에게 사랑을, 힘들 때 기대는 법을. 가족의 따뜻함을 알려준 적이 없다. 그래서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 그녀에겐 자연스러웠다. 전 남편인 승주가 자신의 빚 때문에 괴로워할 때는 아버지의 시체를 눈앞에 보여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했다. 새로운 가족이 되어주겠다는 문호에게는 자신에 대해 모든 걸 털어놓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종적을 감추고 나서 공중전화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말하지 못했다. 다시 만난 그가 사랑하긴 했냐고 물었을 때 고개를 저었고, 그녀가 떨어질까 소리치는 그를 보는 그 모든 순간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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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애를 써도 그녀는 벗어날 수 없다. 아버지가 넘겨준 가족이라는 굴레는 그녀의 삶과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들의 삶까지 고통스럽게 했다. 경선이 아닌 선영으로 새롭게 살 수도 없었다. 돈이 발목을 잡는 현실을 벗어나서 행복하고 싶은 소망은 욕심이 되었고, 선영을 죽였다는 죄책감, 승주와 문호에게 상처를 주고, 아이를 세상에 떠나게 한 미안함까지 더해졌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느새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이 되었고, 이 고통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될 것임이 분명했다. 온갖 일을 겪으면서도 그동안 행동에 옮기지 못했던 죽음이 이렇게 자유롭게, 가깝게 느껴진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게 경선에게도, 선영에게도, 문호에게도 제대로 된 끝이 될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한발 내디뎌 잠시 동안 하늘을 날았다. 그녀가 늘 좋아하고 꿈꾸었던 나비처럼, 선영의 삶을 빼앗을 때 날개를 파닥이다 피에 젖어버린 나비처럼.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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