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보기 중 청소년기의 적절한 동의어를 고르시오.[영화]

영화 <레이디 버드(Lady Bird, 2018)>가 한 소녀의 세계를 지켜보는 방법
글 입력 2021.10.22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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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피우는 이유는 그저 맛있어서가 아니다. 애연가들은 ‘내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피운다. 흡연의 요지란 연기를 삼킬 때의 맛이나 냄새같은 지각적인 쾌락이 아니다. 내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좋아하며, 담뱃대를 물고 놓는 그 수 분의 시간을 여러 방식으로 향유하는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건, 고독을 씹건 어찌하건 간에 그렇다. 흡연자는 사실과 시간을 피운다.


 
“가령 떠들썩한 술자리에서 빠져나와 혼자 문득 쓸쓸해질 때, 낮잠에서 깨어나 걸어 나온 베란다에서 저무는 석양을 바라볼 때, 옛날 유행가에 감전되었을 때, 바로 그때 우리를 휘감아버리는 흡연에의 광폭한 욕망은, 결국 ‘내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생산함으로써 눈앞의 풍경을 완성하고자 하는 욕망, 이른바 ‘사실에의 욕망’에 다름아닌 것이다. - <은둔 기계, 김홍중>
 


내 기억으론 사춘기들이야말로 가장 ‘담배 피우는 사실’을 피우곤 했다. 중고등학생 시절 우르르 몰려다니며 몰래 담배를 피우던 친구들을 떠올렸다. 담배를 피우며 또래보다 특별해진 자신, 어른의 행위에 한 달음 더 가까워진 나를 떨리도록 즐기는 소년 소녀들이다. 실은 담배가 아니라 그 무엇이든, 가지지 못한 특별함이라면 눈을 반짝였던 그 시절의 호기로움과 어지러움. <레이디 버드>를 보는 것은 그 비슷한 종류의 정서를 가만히 좇는 일이다.

 

 

 

성장은 기특하면서 사춘기는 왜?



세상은 결과만을 귀중히 여긴다지만 적어도 한 단어만큼은 모두에게 과정지향적이다.


성장.


우리는 항상 그 과정을 기특해한다. 청소년의 시기를 성장기라고 부르는 것은 그와 걸맞다. 한층 더 원숙한 자아를 쌓기 위해 혼란한 그 과정을 그대로 인정하고 지켜보도록 그렇게 이름 지었다.


사춘기.


그러나 사실 그렇게 더 자주 부른다. 우리에겐 성장이 빠져버린 단어가 더 많이 익숙하다. 한 바탕 내 세계를 주장하고 흩어지면 머잖아 내 방 벽 너머 들리던 엄마 아빠의 대책 모의. 사춘기라 그래, 좀 지나면 낫겠지. 이제껏 없었던 곤욕에, 당신들이 가진 수많은 지혜 중 꺼낸 하나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렇지만 감히 생각건대 어쩌면 그 모의는, 어른의 입장에서 사춘기들이 단지 말썽장이임을 대변한다. 사람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며 사춘기를 위험하고 불안한 단어로 사용한다.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돌발적인 자아를 단숨에, 얼른 지나 보내야할 질풍으로 정리할 단어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장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는 방식처럼, 사춘기 또한 생각해야할지 모른다. 지금 쓰고 있는 사춘기는 청소년들의 다채로운 서사를 다 설명해내지 못한다.

 

 

 

레이디 버드에게 고개를 끄덕이다



 
“처음 <레이디 버드>의 각본을 쓸 때, 뭔가 하나가 안풀린다는 느낌에 그것에만 매달려 있던 때가 있었다. 다른 건 모두 멈추고 빈 종이 위에 이렇게 썼다. ‘왜 날 레이디 버드라고 부르지 않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모두에게 이 이상한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게 하는 이 소녀를 난 꼭 이해하고 싶었다.”
 


그레타 거윅 감독이 남긴 인터뷰다. <레이디 버드>는 한 열일곱 소녀를 섬세하게 이해해가는 그 과정 자체다.


레이디 버드.

 

그 특별한 글자들을, 볼펜으로 따옴표를 그려 그 안에 써넣고 나서야 흡족해하는, 거울을 보며 자기가 새크라멘토 사람처럼 생겼을까 걱정하며 자기 정체성을 힘껏 부정하는 열일곱 소녀. 영화는 사춘기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단어로도 소녀를 정의내리지 않은 채 그 세계를 면면히 보여준다. 어떤 장치를 개입시켜 그 세계를 너무 위험하고 경솔하다고 이르거나, 결과와 대가를 부여해 무언가를 시사 하는 일은 없다. 다만 영화 끝에 주인공은, 그녀의 방식으로 성장한다. 그 성장을 보여줌이 관객들로 하여금 그 소녀를 가만히 이해하도록 돕는 방식이다. 엄마가 자신을 끝까지 레이디 버드라 부르지 않자 덜컥 달리는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던 소녀는, 훗날 문득 크리스틴이 참 예쁜 이름 인걸 깨닫는다. 그리도 벗어 나고 팠던 그녀의 일상들이, 하나 같이 빛나는 자신을 만든 근원이었음을 생각한다.


 
“엄마도 새크라멘토를 처음 운전할 때 감상에 젖어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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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보다는 더 오래 산 이들에게



청소년의 비행이 간과할 수 없는 사회 문제임을 알고 있다. 이 글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자는 그 얘기를 하고자 했다면 조금은 다른 강조들이 주를 이뤘 을지 모른다. 다만 여기선 섣불리 정의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많은 자아들이 훗날 자신의 사춘기 시절을 좀 더 아름답게 기억하도록 하려면, 사춘기의 의미를 좀 더 섬세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 불안정하고 예민한 호르몬 변화의 시기로만 가공하여 바라보기보다, 그 소년 소녀들의 감정과 행동 하나 하나의 서사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지를 관찰한다면, 그리고 그것에 공감을 표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비단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며, 청소년보다 오래 산 이들 모두가 생각할 수 있는 문제다.

 

 

 

 

[이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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