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과 죽음의 무게 [도서/문학]

마지막 의사는 벚꽃을 바라보며 그대를 그리워한다
글 입력 2021.10.2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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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울리는 알람을 두세번쯤 무시하고 부스스 일어나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온갖 잡생각을 하며 씻고 집을 나선다. 자동차 밑에 늘어져 자는 길고양이와 집 앞 골목을 빗자루로 쓸고 계시는 이웃분을 지나쳐 도서관에 도착한다. 저녁을 먹고 밤늦게까지 영화를 시청하며 맥주를 홀짝인다. 내일 할 일을 대강이나마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잠자리에 든다. 종종 서점에 들러 마음이 이끄는 대로 책을 구입해 읽는다.


지금부터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얼마 전 읽은 책으로 말미암아 이렇듯 평범한, 잔잔한 일상 속 작은 파문이 일어난 나의 독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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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야마 아츠토의 소설, ‘마지막 의사는 벚꽃을 바라보며 그대를 그리워한다’를 처음 서점에서 보았을 때, 분홍빛이 도는 책의 표지를 보고 ‘병원 속에서 일어나는 애달픈 로맨스가 아닐까’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책을 펼치면서 이내 그런 생각은 자취를 감췄다.


로맨스는 없다. 오로지 ‘삶’과 ‘죽음’만이 존재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생소하다. 물론 지식으로는 알고 있고, 주변 사람의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적도 있을 것이다. 다만 출근길 지하철에서, 지루한 수업 속에서, 즐거운 술자리에서 죽음을 떠올리기란 여간 쉬운 게 아니다. 그러나 한 번 떠올리면 꽤나 끈덕지게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삶이란, 그리고 죽음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이 계속 물음표처럼 마음 속 수면 위로 올라왔다.


삶과 죽음의 무게. 둘의 무게는 다를까? 혹은 같을까?

 

 

*

글에 책 내용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1장, 어떤 회사원의 죽음



 

저곳에서 방사선이 나온다. 지금 내 몸에 닿고 있는 걸까…… 세 번에 나누어 12그레이의 방사선을 쏜다고 한다. 만약 그 양을 한 번에 쬐게 되면 치사율은 100%라고 한다. 총 1,200만 시벨트…… 원전 작업자의 긴급 시. 피폭 한도의 족히 50배. 내장이 화상을 입어 문드러지는 정도의 방사선이다. 

죽음이 보인다.

하마야마는 생각했다. 눈앞에서 죽음이 느껴졌다. 죽음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지금 스스로 원해서 죽음을 온몸에 쬐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공포로 어금니가 덜덜 떨리고 눈 표면이 건조해졌다. 그래도 하마야마는 눈을 떴다. 방사선조사기기의 조사구를, 시커멓고 무감정한 부분을 마치 짐승과 대치하는 심정으로 노려보았다.

 

(마지막 의사는 벚꽃을 보며 그대를 그리워한다, 소미미디어, p.129)

 

 

항암 치료는 기본적으로 고통스럽다. 탈모, 구토, 구내염, 설사. 항암제는 혈관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가 혈중의 세포를 모조리 파괴한다. 얼굴, 손, 가슴, 배, 다리 그 모든 피부 아래에서 세포가 죽는다. 구토억제제를 먹어도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 위액만이 나와도 끊임없이 구역감이 밀려든다. 더 큰 문제는, 항암 치료가 성공할 ‘가능성’이 100%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패하면 더욱 강한 치료를 해야하고 더욱 큰 고통이 남는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 한없이 자기를 죽이는 것이라니, 이런 넌센스가 따로 없다.


내가 악랄한 질병에 걸려 죽어가는데, 완치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이유로 날 한계까지 죽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는데, 놀랍게도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매우 많은 경우의 수가 있기 때문일까? 생명 유지의 대가로 신체 일부나 감각 일부가 영구적으로 손상될 수도 있다. 지켜야 할 가족이 있을 수도 있다. 삶에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어디까지’ 고통을 감수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삶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시간과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일진데, 마지막까지 온갖 방법을 죽음을 늦춘다. 그 과정에서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면서까지. 그렇다면 죽음의 무게는 한없이 0에 수렴하고 삶의 무게는 한없이 무거운 것인가.

 

 

 

제2장, 어떤 대학생의 죽음


 

 

ALS. 마리에의 근육은 지금 서서히 소실되어가고 있다.

원인은 모른다. 치료법도 없다.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보았다. 아직은 당연하다는 듯이 움직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움직이지 않게 된다. 팔이 움직이지 않게 된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게 된다. 침대에 누운 채로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밥도 먹지 못한다. 얼굴을 닦지도 못한다. 조금 가려운 곳을 긁을 수도 없다. 화장실에 갈 때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마치 아기처럼 하반신을 전부 드러내놓고 엉덩이를 닦아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언어도 빼앗긴다. 말하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한다. 당연히 울 수도 없다. 

하지만 오감은 마지막 순간까지 정상적으로 기능한다고 한다. 파리가 내 쪽으로 날아오는 것이 보여도 쫓아내지 못한다. 목소리가 들려도 말할 수 없다. 흐물흐물한 유동식의 맛은 분명히 느끼고, 기저귀에 일을 보면 그 냄새가 코를 찌른다. 다른 사람이 만지면 그것은 인식하지만 내가 만질 수는 없다. 정신만 감옥에 갇힌 것처럼 바깥 세상에 간섭하는 능력이 사라진다. 단지 받기만 하는 존재가 된다. 호흡이 불가능해지면 인공호흡기로. 폐에 공기를 억지로 집어 넣어야 한다. 인공호흡기는 한 번 달면 다시는 뗄 수 없다. 인공호흡기를 떼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다른 사람이 떼면 살인죄에 해당된다. 그런 식으로 자꾸자꾸 몸에 튜브를 달게 된다. 산소를 튜브로 공급하고 음식물을 튜브로 주입하고 대소변을 튜브로 배출한다. 마리에의 몸은 튜브에 연결된 채 살아간다. 그것이 싫으면 죽는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없다.

온몸에 튜브를 다느냐, 아니면 죽느냐. 선택은 단 두 가지 뿐이다.

 

(마지막 의사는 벚꽃을 보며 그대를 그리워한다, 소미미디어, p.194)

 

 

창창할 것만 같았던 나의 앞날이 와르르 무너지고, 그 어떤 몸부림을 쳐도 가속도가 붙은 죽음이 다가온다면, 그 끝에 남은 선택지는 모든 생명활동을 의료기기가 대신하고 개념적으로 ‘살아만’있는 상태가 되거나, 그것을 거부하고 죽는 방법 뿐이라면 나는 어떨까? 살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고민이었다. 죽을래, 죽기 직전까지만 죽을래. 한 의사는 죽음을 받아들이라 말하고 한 의사는 끝까지 죽음과 투쟁하라고 말한다.

 

옳고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더 어려운 질문이었다. 내가 살고싶은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얼마만큼 살고 싶을까?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살아야 할 만큼의 가치가 나의 삶에 있을까?


고민 끝에 내린 나의 답은, ‘튜브를 달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 ‘이걸 하면 내 인생에 도움이 될까’ 등 등. 죽음은 염두해 두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걸 모두가 알지만 마주하기 전에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나 앞서 말했듯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끝이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끝이 언제인지 끝이 오기 전까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물론 식상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 바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필연이기에 그것이 내일 찾아오더라도 후회없을 오늘을 살자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쉽겠냐마는.


죽음이란 정말 신비롭다. 한없이 공허해 두려우면서도, 죽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삶이 조금은 특별해진 느낌이다.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는지가 그 사람의 인생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듯 하다. 여러분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한쪽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마지막까지 삶을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맞서 싸우며 죽음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사다.

다른 한쪽은 사신이라고 불리며, 더 이상 회복할 가망이 없는 환자가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고 능동적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로 상반된 지점에 있는 두 의사의 관점은 어느 한쪽이 옳고 어느 한쪽이 그르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만큼 죽음은 자비롭지 않다. 결국 죽음은 삶과 대립하는 것처럼 보여도 삶의 일부이고 죽음의 무게가 곧 삶의 무게이기 때문이 아닐까.

당신은 어떤 의사를 만나고 싶은가.

 

(마지막 의사는 벚꽃을 보며 그대를 그리워한다, 소미미디어, p.413)

 

 

[최원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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