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멋진 오징어 신세계 게임

글 입력 2021.10.1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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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아니 전 세계는 ‘오징어 게임’ 열풍이다. 넷플릭스를 시청하는 수많은 국가에서 스트리밍 1위를 당당히 차지했고, 1조 원 이상의 가치로 평가된다. 심지어는 아프리카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한국어가 울려 퍼질 정도이다. 평소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필자도 지난 추석, 가족들과 함께 앉은 자리에서 시청을 끝내버렸다. 도대체 ‘오징어 게임’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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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은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의문의 서바이벌에 참가한 사람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극한의 게임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시리즈이다. 쉽게 말해서 여섯 가지의 게임을 모두 승리한 최후의 1인만이 살아남아 456억 원의 상금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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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에 참여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선뜻 ‘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456억을 얻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것은 최후의 1인이 되었을 때만의 이야기이다. 455명의 죽음을 본 후인 것이다. 그곳은 죽음과 고통, 폭력이 만연한, 또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악한 모습들만 모아놓은 말 그대로 ‘지옥’ 같은 곳이다. 실제로 돈만 보고 게임에 참여했던 많은 참가자들이 첫 번째 게임이 끝난 후, 다른 참가자들의 죽음을 보고 두려움을 떨며 게임을 포기한다.

 

참가자들은 게임을 중단시키고, 지옥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90% 정도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다시 게임에 참여한다. 다시 돌아온 참가자들은 ‘현실이 더 지옥 같다’고 말한다. 현실에서는 꿈도 희망도 없는 반면, ‘오징어 게임’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또 게임을 잘하면 엄청난 성과가 기다리고 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고, 그 일을 열심히 해야 할 동기가 부여된다. 마치 그들의 ‘멋진 신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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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의 작품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유토피아도 비슷한 모습이다. 계급은 나뉘어 있지만, 그들은 완전하게 역할을 부여받고 또 만족하며 그 일을 해낸다. 사고를 할 요소들을 배제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역할에만 집중하게 한다. 나름의 평등 질서가 유지되며, 모두가 행복한 듯 살아간다. 실제로, 멋진 신세계 속에서 살다가 피치 못하게 떠나게 되었던 작품 속 ‘린다’는 멋진 신세계를 그리워하며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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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과 ‘멋진 신세계’는 이 밖에도 정말 비슷한 면이 많았다. 절대 공정을 추구하지만, 분명히 계급이 존재한다. 오징어 게임에서, 참가자들에게는 계급이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001번 참가자 오일남은 설계자였다는 사실에서 이미 공정하지 못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진행자들은 동그라미, 세모, 네모로 철저하게 분류되어 있었다. 멋진 신세계에서도, 태어날 때부터 엡실론 계급, 감마 계급, 델타 계급, 알파 계급으로 정해져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산다.

 

또한 대가로 희생을 바란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목숨을 담보로 게임에 참여한다. 게임이 진행되는 중에 조금의 실수가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임을 당한다. 게임에 패배하면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1명의 승리를 위해 455명의 목숨이 사라진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자유를 뺏는다. 뺏는다기보다는 자유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도록 만든다. 그들은 임신도, 결혼도 금지된다.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를 수도 없다. 사실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없기에 ‘어머니’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책도 읽지 못한다. 종교도 없다. 아예 생각이라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대가로 무엇을 지불하고 있는 지도 인식하지 못한다.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점 또한 공통된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기훈이, 멋진 신세계에서는 버나드 마르크스, 헬름홀츠 왓슨, 그리고 야만인 존이 그 역할을 한다. 그들은 체제의 비합리성을 따지고 반대하고 일어난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기훈은 끝끝내 오징어 게임의 설계자인 오일남과의 마지막 내기에서 승리하지만 멋진 신세계의 반역자들은 결국 굴복 아닌 굴복을 한다는 것이겠다.

 

결론적으로 오일남의 ‘오징어 게임’과 총통이었던 무스타파 몬드의 ‘멋진 신세계’는 많은 이들에게 천국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둘은 설립 의도에서 차이를 보였다. 진정한 유토피아를 설립하기를 원했던 무스타파 몬드와는 다르게 오일남은 단순히 ‘본인의 재미를 위해서’ 게임을 시작했다. 극 중 오일남은 인생에 지루함을 느끼고 비슷한 처지인 vip들을 모아 참가자들의 데스게임을 즐겁게 관람한다. 심지어는 설계자 신분을 숨기고 직접 참여하기까지 한다. 악의는 없어 보이지만, “악의가 없는 것이 더 나빠”라는 멋진 신세계 속 구절에 따르면, 오일남은 마치 사이코패스같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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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행위에 따른 결과는 비슷했을지 몰라도 그 동기는 달랐다. 그렇다면 생각을 더 뻗어보자. 선한 동기로 행한 행동은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그렇다면, 멋진 신세계 속 유토피아는 진정 유토피아일까? 반면, 오징어 게임은 그저 사람을 게임 말로만 보는 끔찍한 상황인 걸까? 만약 오일남이 진정 선한 마음으로, 즉 자신의 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게임을 계획했다면 오징어 게임 역시 유토피아와 같은 게임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나름의 결론을 내려보자면 한 행위를 평가할 때, 그 동기보다는 결과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기는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없다. 후에 조작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해 선악을 다루기 힘들다. 도덕적이지 못한 행위를 저질러 놓고선 ‘선한 의도였어요’라는 변명으로 그 행위가 포장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결과는 책임이 따른다. 나의 행위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나타났으면, 그에 대해 살피고 응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때, 오징어 게임과 멋진 신세계의 상황은 도덕적인 관점에서는 똑같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리고 직접 개입했던 사람들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아, 충분히 유토피아로서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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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징어 게임은 ‘한국 사회를 산란하게 꼬집는 콘텐츠’가 되었고, 멋진 신세계는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표’가 되었다. 결국 오일남과 총통이 추구했던, 또 우리가 바랐던 유토피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우리가 찾고 있는 유토피아는 어떤 세계일까? 각자가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세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어떤 가치를 내세운, 어떤 사람들이 사는, 어떤 사람이 만든 세상인가?

 


[윤영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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