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여전히 미완

글 입력 2021.10.16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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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 노동자의 일기

 

 

맺지 못하고 텅 빈 봉지들처럼 거리를 떠도는 생각들. 혀끝에서는 더 이상 파도가 치지 않는다. 정신은 부유하는데 어째서 몸은 지상에 처박힌 채 점점 더 굳어지는 것일까? 설명할 수 없는 고립을 느낀다.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언제나 잘 지낸다고 답하던 나였는데, 최근에는 잘 지낸다는 말을 꾸며낼 기력도 없다. 바쁘다(이건 몸과 정신 모두에 해당한다). 움직일 수 없다(몸에만 해당한다). 허리가 아프다(이 나이에 이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랩탑을 생각보다 더 빨리 바꾸게 될 것 같다(어머니가 달가워하지 않으실 소식이다). 내가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야 하고, 내가 눈을 감을 때가 되어야 비로소 몸을 접을 수 있는 까닭이다. 인간의 몸과 작동 사이클이 똑같은 기계라니. 인간과 기계 중 어느 것의 수명이 더 오래갈까? 성능은 조금 떨어져도 내가 쟤보다는 더 오래 살겠지. 평소라면 하지도 않았을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요즘엔 내 몸보다 랩탑을 더 소중히 다루고 있다. 죽지 마라. 나는 죽어도 너는 죽지 마라. 며칠 전에는 자료 백업이 전혀 되지 않은 채 랩탑이 망가지는 꿈을 꾸었다. 21세기 인류가 맞을 수 있는 재난 중 최악의 재난일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부리나케 랩탑의 생사를 확인하고 나서는, 난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이 아이만 무사하다면 좋겠다는 27세기 인류 정도가 할 법한 생각을 했다. 거기다 '이 아이'라는 표현을 실제로 사용했다! 기계에 이렇게 애틋해지다니 정말 현대인이 다 되었다는 생각에 조금 씁쓸해졌다. 돌이켜보면 그저 백업에 무딘 대학생의 생존을 위한 집착이란 생각도 들지만. 온기가 없는 것을 사랑하는 일은 삶에서 최대한 적게 일어났으면 한다.

 

커튼이 둘러쳐진 방 안에서 자판을 두드린다. 문득 채광이 좋은 곳에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다른 목적이 아니라 오직 토설 혹은 감정의 정리가 목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다. 에디터로서는 결격이다. 그러나 이 고백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쓰기가 고통스러운 시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라는 구차한 변명을 덧붙인다. 학교에서 삶을 꾸려나갈 때 고통스러운 것 중 하나가 이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 외부적인 동력—의무에 의해서 글을 써야 하는 일이 잦다.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글이라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써야 한다. 써내야 한다. 짜내야 한다. 수용에 그치지 않고 생산을 해야 한다. 나는 아직 어머니가 되는 고통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무언가를 새로 창조해내는 일이 때때로 해산의 고통 같다는 다소 치기 어리고 건방진 생각을 한다. 나는 무엇도 아닌데도(그저 각종 학술용 페이퍼를 작성할 뿐인데도) 내가 무언가 대단한 작가라도 되는 양 이렇게 투덜대는 것이 우습지만 아무튼 그렇다.

 

스물 이후에는 배우고 싶은 것만 배울 수 있다는 선한 거짓말은 누가 했나? 배우고 싶은 것은 원하는 만큼 배울 수 없고, 그다지 관심 없는 것이라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당신은 특별한 축복을 누리고 있군요, 라고 진심 어린 축하를 전한다. 나는 모든 것은 결국 도움이 되기 마련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지만, 지루함과 유용성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마음이 낡아가는 순간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의 일기 첫 줄에는 '나는 이제, 지금은 실종되어버린 삼월의 탄력을 찾아 헤매야 한다. 사막에 떨어진 비행사처럼 어린 왕자가 자신을 만나러 오기를 기다릴 수만은, 우연을 가장한 요행을 바랄 수만은 없다. 비행사는 불시착한 사막에서 어린 왕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탄력을 찾는 데 실패했고, 어린 왕자가 되지도 못했으며, 여전히 요행을 때때로 꿈꾸는 지친 시월의 비행사일 뿐이다. 배움에 필수 불가결하게 동행하는 고통을 사랑할 수도 있었을 테고, 어린 왕자는 못 되더라도 조난자가 아니라 여행자처럼 사막에 머무를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면 나는 사회에 내던져지기 전 마지막 응석을 한껏 부리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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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건강하지 못할 때는 억지로라도 걷고 볕을 쬐고 숨을 크게 쉬어야 하는데, 그 어느 것도 할 수가 없다. 인공조명에 의지해야 하는 새벽에 의자에 앉아서 다른 이들이 깨지 않도록 숨을 죽여 가며 무감한 얼굴로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햇빛 아래에 몸을 이완시킨 채 풀밭에 머리를 비비며 눕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시절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안다. 고통이 있어야 생산이 있다는 것. 불변하는 세계의 법칙은 비정하다. 열심히 산다는 것의 정의는 언젠가부터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것이 되었다고 느낀다. 즐거움과 열심이 공존하는 삶을 살고 있는—제삼자인 내가 보기에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사람들조차도 매일 기쁘고 새롭지는 않을 것이다. 편안한 쟁취와 안락한 혁명은 없다는 것을 알지만, 가끔 피곤에 절여진 채 나의 정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불쑥 깨닫게 될 때면, 연기처럼 따라붙는 한숨을 삼키기가 어렵다. 숨을 크게 쉬지 못하니 한숨이라도 열심히 쉬어서 독한 기운이 몸속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하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한숨을 쉬어도 마스크에 가로막혀 자꾸만 다시 내 코와 입 속으로 돌아온다. 내뱉은 한숨을 나는 다시 먹는다. 공허한 배부름이 찾아온다.

 

스물, 그리고 스물하나에는 스물넷이 무언가 대단한 나이인 줄만 알았다. 뭐든 척척 해내는 성숙한 어른일 것이라 짐작하면서, 짐작도 안 되는 제법 어른스러워진 나를 그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스물다섯이 되기 약 삼 개월 전인 지금의 나는 자조적으로 삼 년 전의 나에게 묻는다. 무엇을 기대했던가? 학업에 지쳐서, 떨어진 체력으로 밤을 새우려 분투하면서, 또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 사이에 자리한 크레바스 같은 괴리감에 여전히 괴로워하면서, 달성하지 못한 목표들을 안타까워하면서. 대단해 보였던 스물넷은 삶의 새로운 모퉁이를 돌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그저 걷고 있다. 여전히 맺지 못한 생각들이 너무 많다. 해소되지 못한 갈증과 게으름이라는 기생충을 몸에 지닌 채로, 자아에 관한 두서없는 텍스트들 사이에서 방황한다.

 

완제품처럼 태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고통도, 역경도, 지루한 시간도 캔디처럼 이겨내고 달같이 환한 얼굴로 삶을 긍정만 할 수 있다면. 돌이켜보니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말로 과거를 애틋해 하는 뻔한 패턴이 아니라, 괴로움을 겪고 있는 지금, 그 때 그 순간의 의미를 바로 찾아내고 자신을 우울에서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삶이 덜 팍팍했을 것이다. 시험지 위에 답안을 적고, 새로운 문장들을 계속해서 써 내려 가고, 뜀박질과 빠르게 걷기를 반복해도 여전히 미완이다. 스물넷에는 적어도 어떤 유의미한 완결 하나는 맞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순진무구함. 그러나 세상에는 직접 겪지 않고는 획득할 수 없는,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는 교훈이 있다.

 

이젠 세상을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완성될 것이란 믿음을 가지지 않는다. 삼 년 동안 배운 것은 이것 뿐인 것 같다. 나는 영영 미완으로 남으리라는 것. 멋진 어른 같은 건 애초에 없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의 좁고 작음과 미성숙한 조각들과 유치한 불평, 지루함에 취약한 성향, 그리고 견디는 것을 힘겨워하는 나를 나쁘게 보고 싶지 않다. 미워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완결되지 못한 텍스트. 다 칠해지지 않은 유화. 맺어지지 않은 가락. 그렇지만 십 년 후에는 조금 더 길어지고, 이십 년 후에는 몇몇 단어가 교정되고, 삼십 년 후에는 무언가 풍성해질 거라고. 나는 그렇게 계속 수정을 거듭하며 완결 없는 완결을 향해 달려가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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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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