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을밤에 본 누군가의 여름밤 [영화]

영화 '남매의 여름밤(2020)'을 보고
글 입력 2021.10.14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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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면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엔딩’을 듣는 사람이 많아지듯이 특정 계절이 되면 보고 싶어지는 영화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비가 오는 여름이 되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언어의 정원(2013)’이 떠오르고 눈이 오는 겨울이 되면 ‘러브 액츄얼리(2003)’나 ‘해리포터 시리즈’가 떠오른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매 여름이 되면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2020)’이 떠오를 것 같다. 벼가 고개를 숙이고 밤이 떨어져가는 가을의 한 가운데에서 계절에 맞지 않게 시원한 여름 영화를 본 이유는 어릴 적의 천진난만함과 기분 좋은 추억들을 떠올리고 싶어서였다.

 

옥주(최정운)와 동주(박승준)는 아빠(양흥주)와 함께 할아버지(김상동)의 집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게 된다. 거기에 남편과 이혼을 생각하는 고모(박현영)까지 모여 5명의 식구가 할아버지의 2층 양옥집에서 여름을 함께한다. 엄마와 이혼한 아빠,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고모, 그리고 할머니 없이 홀로 지내는 할아버지까지, 모두가 조금 결핍된 형태의 가족이지만 한 지붕 아래에 모여지내며 이들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고 완전한 식구가 된다.

 

가족이 함께 모여 할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하고 둘러앉아 콩국수나 비빔국수 등의 음식을 함께 먹는 행복한 가족의 풍경 이면에는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 아빠는 남매에게 여름방학 동안 잠시 할아버지 집에 놀러 가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이들은 살고 있던 반지하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옥주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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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꺼풀 수술을 하고 싶다며 아빠에게 70만 원을 빌려달라고 조르는 옥주의 모습은 부모에게 투정을 부리는 영락없는 사춘기 소녀 같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슬픔이 깊어 보인다. 어린 나이에 겪은 엄마와의 이별, 남자친구와의 관계 등에서 비롯된 옥주의 스트레스는 동생 동주와의 갈등으로까지 이어진다. 영화는 옥주의 시선을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그녀는 좀처럼 웃음을 짓지 않는다.

 

흔히 유년기의 조부모님 댁에서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동주처럼 웃음 지어지는 천진난만했던 시절이 떠오르지만 분명 옥주와 같이 저마다의 아픔과 슬픔, 갈등도 존재했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지만 영화는 두 남매의 상반되는 모습을 함께 보여주며 다양했던 그때의 감정과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가족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또 한 번의 이별을 겪게 된다. 장례식장에서 잠에 든 옥주는 아빠, 엄마, 동생, 고모와 함께 밥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순간을 꿈꾼다. 하지만 할아버지 장례식장에 온 엄마는 자는 옥주에게 선물만 전달하고 가버린다.

 

꿈은 말 그대로 꿈에 불과했다. 고모가 그녀의 엄마 꿈을 꾸었듯이 옥주가 엄마를 포함해 가족 모두가 함께 웃는 꿈을 꾸는 것은 그녀를 정말로 그리워하고 사랑해서 일 테다. 아빠와 고모도 눈물을 터뜨리고 마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 어린 두 남매에게는 얼마나 더 시리도록 다가올지를 생각해 보면 가슴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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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is short, Forgetting is long”. 옥주가 입고 있던 티셔츠에 새겨진 문구다. 나이를 불문해 이별은 늘 가슴 아픈 일이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사랑의 순간은 짧지만 잊는 것은 길고 고통스럽기에 관계라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그 관계가 ‘가족’처럼 필연적이라면 이별의 순간은 더욱 두렵고 힘들 것이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지나온 유년기의 개인적인 기억을 관객들의 추억으로 치환시켜 저마다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시원한 콩국수와 수박을 먹는 어느 한여름 단란한 가족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와의 이별을 마주할 때 한 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코끝이 찡해지는 겨울을 만날 수 있다는 슬픔을 느낀다. 할아버지가 앉아있던 소파, 그가 듣던 클래식한 노래들, 물을 주던 마당의 식물까지, 그가 달래주던 외로움은 이제 영원할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있던 공간에 누군가가 없다는 공허함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압도한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에게는 상대방에 대한 미련만이 가득 남는다. 미련마저도 그 사람을 아끼던 그 시절의 기억에서 온 것일 터이다. 매일이 반복되는 것만 같고 매 계절이 되돌아올 것만 같다. 그렇기에 좋았던 그 시절마저도 다시금 마주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온 시절은 되돌아오지 않으며 모두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던 ‘그 여름밤’은 이미 지간 기억이다. 그렇기에 선선한 가을날을 지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누군가의 여름밤을 통해 다시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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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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