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유의 즐거움 -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 [도서]

예술이 촉발하는 사유의 고통은 무해하며 충분히 즐길 만하다.
글 입력 2021.10.11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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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 표1.jpg

 

이 책은 아름다움과 추함이 더는 대립 관계를 갖지 않는 세상에서 예술 작품이 선사하는 예술과 철학의 질문들을 모은, 소설가 백민석의 미학 에세이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진 현대 사회에서 예술은 언어조차 없는 침묵의 상태이다.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혼란스럽다. 이에 작가는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예술 작품과 영화, 소설, 음악 등을 자유롭게 연결 지어 예술에서 언어로, 언어에서 내면으로 ‘미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현장 비평’을 보여주었다.

 

 

 

예술의 사유


 

예술과 비예술의 명확한 구분이 무너지고 작품과 상품의 경계가 뒤섞이는 와중에도 예술과 비예술의 판단을 둘러싼 미학 논쟁은 끊이질 않는다. 작가는 그 판단의 이유를 관람자가 작품을 감상하는 데 시간과 돈이 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관람객은 예술을 향유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확인하려 한다. 현명한 소비자로서 주어진 시간과 돈을 올바르게 사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작품이 갖는 위상, 고정불변함이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있는 권위를 갖지 못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판단을 대신한 자리에는 사유가 들어온다. “예술이라는 집을 완성하는 또 다른 건축 재료는, 작가와 감상자 모두에게 윤리적 판단을 주문하는 인간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작품은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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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X. 하르소노, <만약 이 크래커가 진짜 총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1977년 ⓒ 국립현대미술관

 

 

인도네시아 작가 F.X. 하르소노의 작품으로, 총 모양의 분홍색 크래커가 바닥에 쌓여있는 설치미술이다. 그리고 “만약 이 크래커가 진짜 총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라는 문구를 전시실에 배치한 뒤, 관람객들의 생각을 적도록 반응을 유도했다. 이 순간 관람객은 눈앞에 있는 분홍색 크래커의 아름다움을 소비하는 동시에, 작품 제작 당시 군부독재에 억눌렸던 작가의 상황을 떠올릴 것이다.

 

모두가 같은 대답을 내놓지 않겠지만, 관람객의 사유를 통해 총 모양의 분홍색 크래커는 크래커로 만들어진 총 더미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관람객은 군부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총을 들고 나가 싸울 것인지 아니면 전시장에 남아 크래커의 맛을 볼 것인지 하는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예술은 사유하게 한다. 사유를 촉발하는 힘까지 예술의 일부이다.

 

- p. 18.

 

 

이제 예술은 단순히 쓸모없는 아름다움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예술은 작품을 소비하면서 작품의 의미까지 사유하게 하며, 사유의 과정을 통해 소비자(관람자)를 윤리적 판단에 이르게 한다.” 예술의 윤리성이 사유를 촉발한 것이다. 그리고 이 촉발이 예술로서의 차이를 만든다.

 

 

 

사유의 고통


 

예술이 촉발한 사유는 언어를 통해 정립할 수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언어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다양한 층위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도구이자 사유를 정의할 수 있는 하나의 권력으로 기능한다. 우리는 언어가 가진 영향력과 위력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항상 내게는 나의 언어와 타자의 언어(매우 단순화시켜 말하면)라는 하나 이상의 언어가 존재하며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나는 타자의 언어가 나의 언어로 고통을 당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나를 받아들이고 여기에 함몰되거나 통합됨 없이 나의 언어의 호의를 받아주도록 글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 pp. 67-68.

 

 

『입장들』 「‘광기’가 사유를 감시해야 한다」라는 대담에서 자크 데라다가 한 말이다. 나의 언어로 타자의 언어가 고통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데리다의 언어관은 그의 윤리관이자 정치관이기도 하다. 그의 말은 데리다 자신이 식민지인이었기에 당위성을 보장할 수도 있지만, 언어란 그를 둘러싼 모든 관계에 놓인 이들에게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누가 듣고 누가 읽느냐를 늘 고려해야 한다. 나의 언어와 동등한 언어로 (타자의 언어를) 배려해야 한다. 사유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사유는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혼란스럽고 복잡한 현실에 정의롭지 못하며 악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판단 과정에서 사유는 고통을 가져온다. 이러한 고통(언어적 갈등 상황) 속에서 내가 또 타자가 언어를 받아들이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사유를 감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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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구아다니노, <서스페리아>, 2019.

 

 

작가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서스페리아>를 통해 감시하는 시선을 설명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주인공이 “우린 죄책감이 필요해. 수치심도.”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이자 사유를 감시해야 한다는 말의 함축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즉 지켜보는 눈이 있을 때, 우리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주변에 늘 우리를 깨어 있게 하는 눈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존재의 불안은 그 깨어 있음, 각성의 대가다.

 

- p. 105.

 

 

예술가의 일은 한 발짝 물러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사유하게 만드는 작품을 제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작품은 우리의 윤리적 딜레마를 촉발해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해주어 우리가 역사에 기록된 비극적인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약간의 불쾌함과 공포심을 느끼며 종국에는 깨어 있음, 그 자체에 불안을 느낀다. 그렇다면 예술은 그 각성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창구이지 않을까.

 

 

 

사유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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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타 치하루, [Between Us], 2020 ⓒ가나아트센터

 

 

빨간 실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진 의자 사이를 잇는다. 한 공간을 가득 채우는 빨간 실은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부터 이미 가지고 있던 ‘혈관’ 같다. 혈관은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평소라면 볼 수 없다.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는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는 내부에 있는 혈관을 꺼내 전시장에 드러내었다. 생명의 핵, 원천과 같은 혈관이 마치 서로 피를 나누는 것처럼 사방으로 뻗어가며 나와 너, 동일자와 타자를 근원으로 이어주는 매개가 되었다. 인간 내부의 보호되고 숨겨진 혈관들이 인간 외부와 공존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광경은 인간 개인의 사유를 타자와 나누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생명의 활력 징후를 보여주는 혈관은 예술로 촉발되어 개개인이 가지게 된 사유와 같았다. 인간이 가진 사유도 각성의 대가로 불안을 느끼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동시에 생명에 감각적 실체를 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안에 있어야만 안정감을 느끼는 점이 유사했다. 다만, 혈관은 자신이든 타인이든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면 심각한 일이 벌어지지만, 사유는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기 위해 감시되어야 하기에 언제든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타인과의 연결고리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연결고리는 우리의 핏줄 속에 있다.”

 

- p. 217.

 

 

시오타의 말처럼 전시된 혈관은 사회적 공간에서 나와 너를 연결해주었다. 피가 가진 묵직함이, 감각적 실존을 느끼게 해주는 생명이 이어지고 연결되는 모습은 각성의 대가로 고통을 느끼는 사유가 생명처럼 흘러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끝에 허무와 죽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피의 무게를 느끼는 동시에 바깥에서 안전하게 나눌 수 있는 사유는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인과의 연결고리는 우리의 사유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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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임, <비둘기 소년: The People 19-다니엘>, 2020 ⓒ문지애

 

 

예술 작품을 보고 언제나 사유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은 아니다. 작품 자체가 마음에 닿아 편안해질 때도 있다. 이는 사유의 깊이보다 울림을 줄 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나뿐만이 아닌 타인에게도 느껴질 수 있다.

 

작가는 김순임의 <비둘기 소년: The People 19-다니엘>을 보여주며 마음에 온기가 돈다고 했다. 푹신한 펠트로 만든 소년에게 다가가 온기를 확인해보고 싶다고 했다. 마음이 먼저 반응하여 이끌렸기 때문이다. 나 역시 김순임의 작품을 보고 감정을 먼저 느꼈던 것이 떠올랐다. 책에서 작가와 같은 작품을 봤다는 반가움이 더 컸지만, 그때의 기록을 찾아보니 <비둘기 소년: The People 19-다니엘>과 함께 전시된 <코튼 드로잉11-이옥란>을 보며 고요한 정중함을 느꼈다고 썼다.


*

 

뭔가를 감상한다는 것은 작품과 소통한다는 의미이며, 관람객이 작품을 보며 느끼는 깊이는 그 작품이 촉발한 관람객의 사유의 깊이이다. 읽어낼 이미지도 언어도 없는 대상이라면 관람객은 내면으로 돌아가 자신의 반응을 읽는다. 윤리적인 판단을 고민하고 깨어 있음에 불안을 느끼며 감시당한다. 때론 마음이 먼저 다가가기도 한다. 언어조차 없는 침묵의 현대 예술이 선사하는 사유란 이토록 다르고 심오하며 고통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자신을 향해 돌아서서 자신을 사유하게 된다. “읽을 수 없는 예술 대신 자신을,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언어를 읽어내고 사유하게 된다.” 인간에게 삶과 예술은 구별되지 않는다는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예술이 촉발하는 사유의 고통은, 예술의 이해되지 않는 아름다움처럼 때때로 충분히 즐길 만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무해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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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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