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19세기 파리의 예술, 자유, 사랑: 오페라 '라 보엠(La Bohême)' - 2021 서울오페라페스티벌

글 입력 2021.10.0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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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뮤지컬, 영화, 그리고 오페라. 연출, 배우, 무대가 있는 건 똑같지만 앞의 셋과 마지막 하나 사이의 장벽은 명백하다. 특히 세상의 주축을 온라인이 지배하면서 그 차이가 극심해졌다고 느낀다.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진행하는 뮤지컬이나 연극은 종종 보았으나 오페라는 본 적이 없다. 아마 어디에선가 진행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름 예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도 닿지 않을 정도이니, 오페라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와 인기를 대변한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다. 배우들이 모두 외국어로 대화하고, 모든 대화는 노래 형식이고, 무대의 양옆 스크린에 캐릭터 이름과 대사가 빠르게 지나간다. 무대를 보랴, 자막을 보랴, 배우들 표정을 보랴 눈을 쉴 새 없이 굴려야 하고, 이야기도 생각보다 길다. 게다가 배경도 19세기 유럽이다. 그때의 사회적 가치는 지금과 상반된 경우가 많으니 생각보다 공감하기도 쉽지 않다. 특히 ‘편리함’이 당연한 가치가 된 요즘과 동떨어졌다.


무엇보다 가장 거대한 심리적 장벽은 어렵다는 선입견 아닐까. 하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걸 이번 '라 보엠' 공연을 보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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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라 보엠'은 작곡가 푸치니가 만든 오페라다. 제목인 La Boheme에서 관사를 제외한 Boheme은 영어로 보헤미안과 같은 의미다. 이는 체코 보헤미안 지방의 집시를 가리켰던 말로, 후에는 사회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임이 확장되었다. 자유로운 사람, 즉 예술가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자주 칭한다.


그러니 주요 등장인물 모두가 예술가인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1830년대 파리의 화가, 음악가, 시인, 철학자 4명이 오페라의 1막을 장식한다. 그들이 사는 곳은 지붕과 맞닿은 꼭대기 층. 엘리베이터도 없는 시대인지라 값싼 주거지였지만, 월세가 밀릴 정도로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무렵엔 대개 좋은 일이 생기지 않는가. 연주비를 받아온 음악가 덕분에 크리스마스이브 날 시내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다.


다만 이런 날에도 꼭 일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원고가 밀린 로돌프는 홀로 집에 남는다. 이때 뜻밖의 방문자 ‘미미’가 찾아온다. 성냥을 빌리러 온 미미는 계단을 오르느라 힘겨웠는지 잠시 누워서 몸을 추슬렀다. 여기서 미미의 미래가 살짝 보이는 듯했다. 유약한 몸이 어딘가 성치 않기 때문인 것 같다고. 둘은 서로 대화가 통했는지 금세 마음을 나누고,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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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가 카페 거리로 바뀌며 다음 막이 유쾌하게 이어졌다. 크리스마스 특유의 들뜬 분위기와 왁자지껄함은 유럽에서 크리스마스 주간이 커다란 행사임을 실감케 했다. 이때 주인공 무리를 비롯하여 참 많은 이들이 등장했다. 이렇게 한 무대가 꽉 찰 때면, 주인공보다는 그 주변에 눈길을 주는 편이다.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지가 무대 연출의 디테일함을 좌지우지한다고 본다. 무대의 한 자리를 어설프게 차지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내는 작품도 있다.


'라 보엠'은 후자였다. 무대 왼쪽 끄트머리에 있던 어머니와 어린 딸 아이 둘에 눈길을 자주 주었다. 동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지속해서 주변인들과 눈을 맞추고, 말을 하고, 특정한 행동을 했다. 위에서 책을 보는 사람과 인사를 하기도 하고, 오렌지를 사 먹기도 하고, 자그마한 국기를 사서 흔들기도 하고,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그런 딸을 나무라기도 하면서.


이런 세심함이 있었기에 오페라가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비록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시대 배경, 지명, 상황은 거리감이 들었어도 말이다. 여기선 무제타가 주축이 되면서 이야기가 훨씬 생동감 넘쳤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여성은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었고, 남성과의 결혼을 통해 자신의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무제타는 언제나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을 쫓았다. 이곳저곳을 떠도는 것.


무제타가 머물다 떠난 곳 중 하나가 로돌프의 친구인 마르첼로였다. 무제타를 다시 마주하게 된 마르첼로는 꽤 복잡한 심경 같았다. 겉으로는 의연하게 거절하는 듯했지만, 속에는 그리움과 미련이 그득했다. 이것도 크리스마스의 힘인지,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즐거운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로돌프와 미미 사이의 균열-일방적으로 로돌프가 만든 것이지만-이 생기고, 그가 홀연히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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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부터는 분위기가 점차 어두워진다. 미미가 자신을 떠난 로돌프를 찾아간다. 로돌프는 가난한 자신을 만나면 불행해질 미미를 알기에, 그런 미미를 보며 괴로울 자신을 알기에 미미에게 일부러 매몰차게 굴었다. 그 진심을 알아차린 미미는 꽤 단호하게 끝을 맺는다. 이때 무제타와 마르첼로 커플도 이전과 똑같은 문제로 싸우다가 이별을 결심한다. 한 장소에서 두 연인이 헤어진 셈이다.


사람은 가진 것이 없을수록 자유로워진다. 때로는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자유를 택해야 하지만.


어느덧 오페라의 끝, 4막으로 치닫는다. 병든 몸으로 거리에서 죽어가던 미미를 무제타가 데려온다. 로돌프와 그의 친구들, 미미, 무제타는 한 자리에 모여 미미의 마지막을 기린다. 겨울을 나는 유일한 코트와 무제타의 장신구를 팔아 미미의 약과 미미가 갖고 싶어 하는 토시를 얻었다. 잠든 듯 영원히 눈을 감은 미미를 끝으로, 막이 내린다.

 

*

 

이렇게 4막으로 구성된 내용이다 보니, 인터미션까지 포함한 관람 시간은 3시간 남짓했다. 1896년에 초연한 작품이니 여성과 남성 간의 사랑이 주를 이루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볼거리가 풍부해서 놀랐다. 미미와 무제타에게서는 당시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부조리함을, 로돌프와 그의 친구들에게선 예술가의 자유와 현실 사이의 고민을 해볼 수 있었다.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현재도 비슷하게 문젯거리인 소재였다.


오페라의 필수요소(언어, 배경, 차림새, 어투, 시간, 노래)가 진입장벽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지만, 한 번쯤은 즐겨보아도 좋을 것 같다. 생소한 예술과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가 하나 늘어나는 셈이니까.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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