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설의 무용함을 사랑해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9.2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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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어려운 이유는 예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푸념에 자주 빠진다. 그렇다고 복습이 수월한 것도 아니다. 꾸준히 일기를 써 모았고, 낡은 앨범을 뒤적대는 주기가 짧아졌지만 그때와 지금의 나는 너무도 다르며 삶을 관조하는 태도 역시 상이해 돌파구가 되어 주진 못한다.

 

과거의 실패로부터 배우기에 나는 아직 그 실패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럴수록 삶을 점점 비관하게 될 뿐이다. 내 세계의 외연은 자꾸만 좁아지고, 서사는 납작해지며, 뱉은 말의 단면은 날카롭기 그지 없어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서점에 가 소설책이 꽂힌 서가를 훑었다. 치통에는 치과를, 복통에는 내과를 찾는 것처럼 생이 뿜어내는 모든 비가시적 고통이 괴로울 때 나는 소설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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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소설을 묻는다면 빠지지 않을 책, <라이프 오브 파이>

 


소설은 훌륭한 인생 예습 방법이다. 나보다 인생길을 먼저 헤쳐나간 사람, 나와 유사한 길을 걷고 있는 사람, 그보다 이전에서 막 태동하려는 사람들 모두가 한 자리에서 조우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많은 책을 소화해가며 나는 먼저 ‘독자’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읽는 사람은 반드시 쓰게 되기 마련이라고, 소설을 통해 삶을 천천히 치료해간 나는 이제는 감히 누군가의 삶을 소설로써 진단내리고 싶다는 욕심까지 갖게 되었다. 그게 내가 처음 소설을 쓰게 된 경위이다.

 

다독가라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애서가―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로서의 정체성은 유독 공고하다. 멀미를 잘 하지 않는 천성마저 책과의 거리를 좁히는데 일조했다.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은 삶의 소음에 적당히 스며들어 독서하기 좋은 장소이다.

 

붐비는 출퇴근 시간에는 온전한 집중이 어려운 경우가 있기에 가벼운 에세이류나 장르 소설을 읽는다. 보다 높은 문해력을 요하는 책들은 한산한 오후 지하철에 앉아 소화해나간다. 물론 집에서 조용히 둥지를 튼 채 독서하는 경우가 가장 잦다. 그럴 때는 주로 묵독이 아닌 음독을 한다. 어릴 적에는 도서관을 애용했으나 점차 책에 줄을 긋고 메모를 하는 게 버릇이 된 탓에 틈만 나면 헌책방을 들쑤셔 제 서가에 꽂아넣고 마는 책 사냥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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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을 사랑하지만 전자책의 매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쓰기의 말들>

 

 

간혹 지인들로부터 책을 추천해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는다. 이 작업은 나에게 극도의 신중함을 요하는데, 각자의 취향에 부합하는 책을 추천하고 싶다는 욕심도, 나를 감히 다독가로 상정한 이들의 믿음에 부응하고픈 부담도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대부분 내놓는 고백은 ‘부끄럽게도’ 자신이 독서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대개 책을 취미 삼아야만 한다는 의무감, 혹은 텍스트를 멀리한 탓에 실감한 문해력 저하 등을 세부 이유로 덧붙인다. 그럴 때마다 내 답은 항상 같다.


다양한 예술 매체에 대해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사람마다 서사 및 정보 처리 방식과 속도가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매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운 좋은 우리에게는 각자 자신에게 맞는 매체를 적절히 골라 이용할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자유의 행사가 허락되지 않는 경우가 있겠지만, 적어도 모든 매체와의 상성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아주 오래 전부터 그것이 책이었다. 운 좋게 가장 지적인 이미지의 매체인 책과 상성이 좋았을 뿐이지, 내가 독서 외의 것을 선택한 이들에 비해 우월하진 않다는 걸 항상 설명하고자 한다. 게다가 내 주전공은 영화 연출이다. 텍스트와는 다른 영화의 문법을 익히고 이해하기 위해 나 역시 상당한 한계에 부딪혀왔고, 현재까지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 과정이 마냥 괴롭지만은 않다.

 

그런데 개중에서 이러한 충고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소설을 좋아한다는 내 말에 일부는 소설도 좋지만 책이라는 매체의 진가를 알고자 한다면 비문학을 더 가까이 해보라 권하곤 한다. 나에게 책 추천을 부탁한 이들 역시 소설보다는 즉각적으로 지식이 충전되는 책들을 기대하는 경우가 잦다. 사실 아주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책은 곧 '지식의 보고'라 불린다. 지식이란 곧바로 가공해 사용할 수 있을 수록 좋다. 해서 누군가의 감상과 해석, 시각이라는 체에 거르고 걸러야 가용한 소설적 지식과는 다소 소원해지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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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는 아주 느린 독서이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이처럼 소설의 지위가 점차 희미해짐을 실감하는 현재이다. 그러나 나는 그 가치를 지켜갈 필요가 있다고 간절히 믿는다. 앞서 언급했듯 소설이 당장 가용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해서 종종 책으로서의 실용성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따라온다는 것도.

 

그러나 소설의 가치는 ‘일상과 아주 긴밀히 맞닿아 있음’에 있다. 소설만의 지식은 그 즉시 일상으로 스며든다. 비문학 도서나 타 매체가 레트로 식품처럼 즉각적인 정보를 빠르고 간편하게 충족시켜준다면, 소설은 오래 푹 끓여낸 국물처럼 느리지만 몸과 마음을 오랜 시간 데워준다. 그 온기를 통해 우리는 타인과 물리적으로 유리된 외부세계마저 안으로 끌여들어 천천히 흡수한다. 나와 전혀 다른 위치, 시간, 장소에 놓인 사람들에게서 ‘나’를 본다.


 

소설의 결말을 향해 급하게 달려간 후에

그래서 이게 나에게 무슨 이득을 주느냐고 묻는 것은

죽음을 향해 급하게 달려간 뒤

그래서 삶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

 

- 책의 말들, 김겨울

 

 

속도가 미덕인 매체의 범람 속에서 자꾸만 멈춘 것들을 사랑하게 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명징한 사실만이 가치를 인정 받는 세상에서 환상 세계로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내 이름 송림(松林)은 ‘소나무 숲’이라는 의미로, 한자를 풀면 바로 이름의 뜻이 풀이되는 여타 이름들과 달리 은유로 한 겹 싸여 있다.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소나무 숲이라는 사전적 정의만 일러준다. 그 후의 해석은 수용자의 몫이다. 사시사철 푸르게 살아가라는 뜻도, 낮게 옆으로 퍼지며 스스로의 세상을 넓혀가겠다는 다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저명한 언어학자들에 의해 학문적으로도 정리된 바이지만, 기의를 온전히 담을 수 없다는 언어의 비극은 소설에 의해 낭만으로 피어난다. 소설의 가능성이란 이토록 단단하게 삶을 무게 짓는다. 내 삶은 이 비효율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은유 덕에 수많은 가능성을 품고 굴러가는 것이다.

 

삶에 대한 가장 훌륭한 은유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곧 아름다운 거짓이고, 은유 속에 한 겹 감춰진 비효율이며, 거짓마저 진실로 믿으며 삶의 의지를 다질 수 있는 인간만의 단단한 속성이라고 믿는다. 해서 소설은 거짓으로 빚은 훌륭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소설을 이루는 세계가 나의 세계와 맞닿아 무한히 확장되는 순간은 그렇기에 나를 꾸준히 살게 한다.

 

때로는 ‘소설이 A를 살게 한다.’는 명제보다 ‘A는 아주 오랜 기간 스스로가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씀으로 삶을 증명하고, 스스로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끊임없이 변주시키는 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었다. 어제의 A는 빗속을 걷는 행인1로 세계를 스쳤지만, 오늘의 A는 화분을 비 오는 창가로 밀어넣는 몽상가가 되었다.’ 라는 묘사가 나를 좀 더 삶의 방향으로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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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으로 읽었을 때 감동이 배가 됐던, <호밀밭의 파수꾼>

 

 

'작가'의 한자를 풀어보면 作家, 즉 '집을 짓다'라는 의미임을 알게 된다. 즉 작가란 집을 짓는 사람이다. 그들이 각자의 집을 짓는 순간 자연히 그 집에는 부서지고 재건되는 '역사'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이, 또 그들이 만들어가는 '상황'들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 이 집의 문을 두드려주지 않는다면 그 의미는 퇴색되기 마련일 것이다. 작게에게 독자라는 이름의 손님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결국 집을 완성시키는 것은 언제든 창문을 열어두고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개방성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꾸준히 소설의 무용함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크고 작은 색색의 집 대문을 여는 즐거움을 오래도록 향유하기를 바란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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