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편지의 시대 [문화 전반]

글 입력 2021.09.20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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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상적인 아침 일상은 이렇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먼저 세수를 한다. 찬물에 조금 정신이 들면 어떤 옷을 입을지 생각하며 식탁 앞에 앉는다. 배가 고프면 해야 할 일을 잘 해낼 힘이 나지 않으니 간단한 아침을 준비한다. 두유와 시리얼, 아니면 지난밤 엄마가 남겨둔 복숭아나 사과.


아침을 먹으면서 핸드폰을 바라본다.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SNS, 콘텐츠 앱들은 건너 뛰고 메일함을 누른다. 메일 제목에 따라 각자의 폴더에 들어가도록 분류를 해두었으니, 요일에 맞게 편지가 도착했을 폴더를 누른다. 밤에 글 쓰길 좋아하는 누군가는 늦은 밤에, 이른 아침이 좋은 사람은 새벽에 편지를 보내온다. 무한한 시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간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도 되고, 한 문단만 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편안히 그 시간에 머무른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하고 행복해지는 모습이다. 하지만 대체로 아침에 여유를 찾긴 어렵다. 어릴 적 하던 외출 준비 게임처럼, 짧은 제한 시간 안에 외출에 필요한 수많은 것들을 찾고, 버스에 뛰어올라야 한다. 전날 미리 해둘 걸 후회하지만 후회할 시간도 없는 아침.


버스를 타고 역에 도착하면 지하철에 올라탄다. 환승하는 사람들이 많은 역에 다다르면 드디어 자리에 앉아 조용히 나만의 아침을 누릴 수 있다. 부족한 잠 탓에 아침엔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오는 콘텐츠는 부담스럽다. 대신 핸드폰을 켜고 메일함을 누른다. 그날 도착한 편지를 읽으면서, 아침을 맞이한다. 상상한 모습과는 조금 다르지만, 편지와 함께하는 시간은 나에게 정적의 순간, 편안함을 바래다준다.

 

 

 

문보영을 기다리는 마음


 

메일함에 도착하는 편지들이 너무나 신선하고, 기분 좋은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는 열심히 찾아 신청해 보았다. 어려운 시사 이슈나 테크, 마케팅 트렌드처럼 알아두면 좋을 정보를 쏙쏙 정리해 전달해 주는 뉴스레터도 많았다. 유익하고 효율적인 편지라 아주 만족스러웠고, 지금도 꾸준히 구독을 하고 있다. 하지만 30종이 넘는 편지를 받아보면서 역시나 마음에 남는 건 정보보다 사소한 생각과 일상을 담은 편지들이었다.


커피 세 잔, 다섯 잔을 맞바꾸면 좋아하던 사람에게 한 달 동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했는데 따뜻한 스콘과 부드러운 클로티드 크림, 귀여운 마카롱과 푸딩이 층마다 담긴 애프터눈 티 세트가 나오는 느낌. 지불하는 값에 비해 얻는 것이 너무나 큰, 그야말로 안 하면 이상한 거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많은 편지를 받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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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한국일보

 

 

가을이 다가오는 요즈음, 매일 기다리면서 조금씩 아껴 읽는 편지는 문보영 작가의 ‘일기 우편 딜리버리’다. 문보영은 참 재미난 사람이다. 늘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다음이 기다려지고, 어떤 사람인지 자꾸 궁금해진다. 문보영은 랜덤으로 전화를 걸어 시를 읊어주는 시인이기도 하고, 비밀스러운 일기를 고이 적어 보내주는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지난 1월 일기 딜리버리를 처음 주문해 본 이후, 나는 문보영을 따라 걷고 있다. 문보영은 첫 편지는 메일 대신, 종이에 손으로 쓴 일기를 우편으로 배달한다. SNS에 많은 수신자를 위해 준비한 편지가 가득한 방 안, 그 속에서 열심히 포장을 하는 ‘편지 농부’인 자신의 모습을 올리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매일 달라지는 디지털 시대에 일기 딜리버리가 주는 미묘한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선명해졌다.


2000년대 초반과 지금, 메일의 의미는 많이 달라졌다. 한때 메일은 전학을 간 친구에게 안부를 묻고, 전하지 못할 말을 대신하는 편지지가 돼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이 교차하며 오가는 업무를 위한 메일만이 떠오른다. 언제 가입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브랜드의 홍보 메일로 메일함은 금세 가득 찬다.


그럼 그 많은 편지는 어디로 갔을까? 매일 사용하는 메신저 앱과 기프티콘에 곁드리는 인사를 통해 여전히 안부를 묻고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어쩐지 그때 그 시절 소중히 받아 조심스레 펼치던 편지 와는 다른 느낌이 든다. 한 문장이라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기보다 빠르게 키 패드를 두드리는 건 편지보다는 간결한 메시지 같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메일함에 도착하는 편지를 기다리는 게 아닐까? 펜을 굴리며 고민한 말들이 지닌 진심과 우리 안에서만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비밀스러움이 좋았다. 문보영이 하얀 봉투에 보내온 편지, 한 쪽 귀퉁이를 조심히 뜯어내고 두 번 접힌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오래 기다려온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보영을 통해 편지의 소중함을 알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문보영의 글을 사랑해서 날마다 그의 편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문보영은 소설과 일기의 중간에서 둘의 경계를 조금씩 넘어섰다 다시 돌아오면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여러 번 다시 읽었던 <낙엽 인간과의 만남> 편은 이렇다.

 

“낙엽같이 생긴 모자를 쓰고 낙엽 같은 옷을 입은 작은 사람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사람이 들어온 건지 바람이 불어 낙엽이 들어온 건지 싶었다. 그는 우리더러 한 학기 동안 두 편의 소설을 쓰면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발표 순서를 정하고 다시 낙엽처럼 (바람에 쓸려?) 나갔다.”

 

전화 영어 선생님과 나눈 대화들을 들려주는 편들도 그랬다. 7년 전부터 전화 영어를 꾸준히 해온 문보영은 수업의 주제로 다루었던 신기하고 흥미로운 기사와 시에 대해, 그 이야기를 함께해준 선생님들의 삶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일상적인 것이 아주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졌고, 뜻조차 알기 어려운 것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했다.

 

 

 

언니들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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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창비 트위터

 

 

문보영이 참여한다고 해서 구독했던 또 다른 편지가 있다. 출판사 창비에서 보내준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 일명 ‘언니단’이다. 문보영과 함께 정세랑, 니키 리, 김겨울 등 좋아하는 언니들이 잔뜩 등장하는 화려한 편지였다.


언니단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쓰던 교환일기를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와 함께, 순서에 따라 쓴다는 규칙이 있었다. 각자 나만의 언니를 떠올리고 그를 생각하면서 편지를 쓰면, 그 사람이 이어받아 또 다른 언니에게 편지를 이어가는 형식이었다. 소설가 정세랑은 음악감독 김인영 언니에게, 또 김인영은 배우 손수현 언니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살게 해준 언니들에게 편지를 쓴다는 게 좋았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어 소중히 인연을 이어온 언니, 한 번도 만나보지 않았지만 동경하는 언니, 어린 내가 바라보는 어른이 된 나라는 언니.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언니들에게 전하는 이야기를 들여다보면서 나의 언니는 누구인지, 어떤 말을 건네고 싶은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만화가 김정연이 미야베 미유키 언니에게 쓴 편지를 조금 들려주고 싶다.


“언니는 SNS를 하지 않으신다는 인터뷰를 보기는 했지만, 혹 인스타그램에도 ‘스토리’라는 이름의 ‘게시하고 휘발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이 자리에 공유된 사진은 하루가 지나면 자동으로 사라져버립니다. 이 기능이 생겼을 당시에 저는 어차피 올려도 곧 날아갈 사진을 왜 올리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주제에 저도 친구들을 따라 스토리를 하나둘 올리게 되면서 이해하게 된 것이 있어요. 우습게도 어떤 사진들은 버리기 위해 올리고 싶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만화에도 쓴 말이지만, 누구나 사는 동안 목격자를 필요로 한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사람에게는 오로지 나 자신만이 알고 느낀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은, 타인에게 보여주거나 말해주어야 비로소 그 일이 있었다고 소화해낼 수 있는 이상한 마음이 있는 것 같거든요.”

 

이 이야기가 너무 좋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공유한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말이다.


언니들에게 보낸 마음들은 차곡차곡 모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고 들었다. 최근 여러 출판사에서 글의 일부를 구독 레터 형태로 공개하고, 이야기가 완성되어 가면 책으로 엮어 판매하고 있다. 메일로 마음을 받아본 구독자들은 이미 작가의 팬이 되었으니 효과적인 마케팅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엔 책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상업 활동을 위한 것이지만,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을 글을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연결해 준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제철 과일을 맛보듯이, 이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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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머니투데이

 

 

메일로 전하는 수많은 편지, 나에게 그 처음은 이슬아였다. 한 달간 매일 새로운 일기와 인터뷰, 다양한 장르의 글을 전해주는 ‘일간 이슬아’. 이제 그 이름은 어떤 성실함, 꾸준함이라는 성질을 대신하는 말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매일 마감을 앞두고 해내고야 만다는 마음으로 책상 앞에 꼿꼿이 앉는 그의 모습이 상상된다. 자꾸 미루고만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마감을 앞둔 이슬아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이슬아가 들려주는 글의 특별함은 그의 세계를 조금씩 상상해 보는 즐거움에 있다. 글에는 이슬아 자신과 함께 어머니 복희와 아버지 웅이가 자주 등장한다. 부모님을 친구처럼 부르고, 무조건 감싸기보다는 타이르고 잔소리도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재밌었다. 부모님의 눈으로 쓰는 글과 일상의 대화 속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진하게 느껴졌다.


또 하나 좋아하는 건, 집으로 찾아온 아이들을 맞이하는 글쓰기 선생님으로서의 이슬아 이야기이다. 커다란 나무 책상에 앉아 성실하게 글을 적는 아이와 딴짓을 하거나 과자 부스러기를 흘리는 아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조용히 말을 건네는 이슬아의 모습. 코로나 시대를 맞아 온라인으로 아이들과 강의를 하는 생생한 모습도. 글쓰기라는 일에 느끼는 기쁨과 괴로움, 아이들에 대한 마음을 이야기할 때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마음이 소란할 때, 나는 종종 <이스라디오>를 들었다. <이스라디오>는 이슬아가 썼던 편지들을 소리 내 낭독해 주는 팟캐스트다. 새벽까지 독서실에서 자기소개서를 쓰고 문제집을 풀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길을 걸어올 때면 그 길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 몰려왔다. 그때마다 이슬아의 목소리가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고,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 주었다.


이슬아의 목소리, 그의 문장에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슬아를 떠올리면 꾸준한 운동으로 만들어진 바른 자세가 생각난다. 글 또한 그 모습을 닮아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고 당당히 걸어가는 글이었다. 일상 속에서 포착한 작은 순간과 사람들의 모습을 자신만의 언어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글이었다.


그래서 이슬아의 글을 읽을 때면 늦봄호, 초여름호라는 이름으로 계절별로 찾아오는 메일처럼, 알이 톡톡 튀는 제철 과일을 먹는 느낌이 든다. 이 계절에 맞는 탐스러운 과일을 잘 골라 깨끗이 씻어 먹는 것이 계절을 잘 보내는 방법인 것처럼, 그의 글을 읽는 것도 계절마다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이번 가을에는 이 편지들과 함께 따뜻하고 쌉싸름한 날들을 보낼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 문득, 오직 한 사람이 아닌 나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마음은 어떤 것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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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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