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편견과 발견 [영화]

글 입력 2021.09.17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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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딜릴리’는 나에게 편견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 영화다. 인간 동물원에서 일하는 딜릴리가 가난한 환경에서 살 것이라는 예상, 딜릴리가 프랑스어와 프랑스의 노래도 못할 것이라고 단정 짓는 사람들의 생각, 여성의 사회적 참여도가 올라가면 남성의 지위가 하락할 것이라는 그 시대의 남성들의 두려움. 영화 속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편견들이 존재하지만 딜릴리는 그 편견을 매몰차게 부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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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첫 장면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딜릴리가 마치 인간 동물원처럼 백인들이 구경하는 울타리 속에서 아프리카 부족의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사실 해당 장면에 관하여 신문 기사로 읽은 적이 있기에 백인들이 흑인들을 가두고 그들을 보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생한 장면으로 마주한 것은 처음이기에 영화 시작에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다음 장면에서 더 놀랐다.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딜릴리가 당연히 가난한 아이인 줄 알았다. 딜릴리가 마차를 타고 집을 오고 가는 것이 의외였다. 그렇다. 일종의 연극으로 보수를 많이 받아 부자일 수도 있고 딜릴리처럼 좋은 후견인을 만나 부유하게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겉모습과 하는 일을 바탕으로 딜릴리를 쉽게 단정한 것 같아 부끄러웠다.

 

당대에는 어린 여자아이의 납치가 팽배했다. 바로 여성이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여성의 지위가 상승하여 남성의 지위가 하락할 것이라는 남자들의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직을 구성하여 여자아이를 유괴하여 네 발로 걷게 한다. 조직의 이름조차 ‘master man’인데 한국어로는 ‘주인’이라는 의미이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임을 명시하고 여성을 네 발로 걷게 함으로써 남성에 대한 복종과 마치 동물과 같이 행동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여성을 탁자와 의자로 사용하여 깔고 앉고 그 위에 물건을 올려 여성이 무생물인 어떠한 것보다 더 낮은 존재임을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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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와 상반되는 영화의 풍경과 딜릴리가 있다. 영화의 풍경이 실사판으로 나와 관객에게 파리 여행을 하는 느낌을 준다. 딜릴리가 여러 예술가의 작품과 예술가들을 만나는 장면은 영화를 보는 눈을 즐겁게 한다. 딜릴리가 퀴리 부인과 툴루즈-로트렉 등 당대 프랑스에 영향을 미쳤던 여성들을 만나면서 이 영화가 단순한 인종차별만을 다룬 영화가 아님을 말해준다.

 

또 당찬 성격의 딜릴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딜릴리는 자신을 원숭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당신은 돼지를 닮았다고 자신 있게 말을 하는 인물인 동시에 불평등없이 모든 사람들과의 화합을 원하는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사람이다. 영화를 보면서 딜릴리가 너무 일찍부터 어른이 된 외로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사람과의 만남을 소중히 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Je suis heureuse de vous rencontrer.’라고 말하며 치마를 잡으면서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한다. 어린아이라면 그저 ‘bonjour’나 부끄러워서 숨는 행동을 보일 텐데 말이다.

 

그녀는 프랑스인과 카나키인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피부색으로 인해 프랑스와 카나키 두 국가의 사람들에게 부정당해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법을 터득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누가 바보인지, 누가 자신에게 인종차별을 하는지 알아차리는 법을 배웠다. 그렇기에 자신의 고유성을 잃고 남들과 비슷해지고 싶어한다. 그래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은 싫다고 외치고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이는 편견들에 대해 서슴없이 말한다.

 

*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해서 우리나라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돈을 벌기 위해 우리나라에 온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은 3D 업종(Difficult, Dirty, Dangerous)에 종사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그들에게 아주 적은 임금을 주고 사기를 치며 부당한 대우를 한다. 과연 3D 업종에 종사한다고 해서 어렵고 더럽고 위험에 취약한 주변 환경에서 생활을 해야 할까? 외국인 노동자가 고용자에게 20만 원 정도의 숙식을 내면서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일이 알려졌다. 이러한 실태가 밝혀진 것은 지난해 한 이주 노동자가 비닐하우스에서 동상으로 발견 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인간이며 잘 먹고 잘살자고 모인 것인데 왜 사람대우하지 못해서 안달인가.

 

인간은 양면적인 동물이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시키기도 한다. 그것이 외모일 수도 성격일 수도 있고 취향일 수도 있다. 각자의 다름이 있는데 튄다는 이유로 좋지 않은 시선을 쉽게 보낸다. 단지 자신과 일부분만 다를 뿐인데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면서도 남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고유한 독특함을 원한다. 남들과는 차이가 있고 싶지만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이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대한민국의 헌법 제2장 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되어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성 혐오와 동시에 남성 혐오, 또 노인 혐오와 노키즈존까지 인간에 대한 혐오가 시대를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사람에 대한 혐오란 혐오는 다 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같은 민족을 서로 죽이지 못해 분단했고 분단국가 내에서도 사람들끼리 성으로, 세대로 대립하고 있다.

 

마치 우리 사회는 증오에 대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이 행동한다. 연예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한 연예인이 논란이 되면 그 연예인의 과거 행동까지 끌어와 비난하기 바쁘다. 일반인이 논란을 일으키면 그 사람의 신상을 신속하게 파악하고 유포한다. 코로나-19가 국내에 퍼지기 시작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처음엔 혐오의 대상이 중국인 유학생이었다. 코로나-19의 발원지가 중국이기에 중국인 유학생의 바이러스로 국내에서 코로나-19의 확산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확진자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돌아다녔다면 그 행위에 대해서만 비판하면 된다. 비난의 대상이 개인에서 집단으로 변질되었다.

 

이젠 그다음 표적은 누구인가? 왜 우리는 서로를 혐오하지 못해 안달이며 과연 누구에게 죄를 묻고 싶은 것인가. 우리는 어느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이 누구의 잘못으로 일어났는지 대상을 파악한다. 악랄하게 비난한 뒤 쉽게 잊어버린다. 이젠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문제를 해결 방법과 같은 문제가 반복해서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것은 권리가 아니다. 우리에겐 타인을 혐오하고 비판할 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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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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