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상처받은 그대에게

글 입력 2021.09.10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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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 자주 상념에 잠기는 편이다. 겉으로는 성격도 모난 데가 별로 없어 보이지만, 실은 속으로 예민한 가시를 바짝 세울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스스로 피곤함을 유발하는 것 같아 종종 자책하고는 한다. 하긴, 나 혼자만 이런 것도 아니었다. 다른 이들과 속내를 털어놓으며 진심을 나누다 보면 남몰래 품는 고민이나 걱정이 없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A는 재수학원에 다니느라 힘들었다며 하소연하고, 군인인 B는 병에 걸려 끙끙 앓다가 병원 신세를 지느라 고생 좀 했다며 멋쩍은 카톡을 보내왔다. 중년을 맞이한 C는 자신의 인생에서 20년이 훌쩍 가버렸다면서, 과거가 눈에 밟힌단다. 우울증 환자인 D는 홧김에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한 번에 먹어버려 응급실에 실려 갔다. E는 적지 않은 빚에 시달리며 일자리를 구하고, F는 부모님이 모르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꿈을 위해 발돋움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오롯이 짊어진 세상의 무게가 어찌나 묵직하던지. 누군가의 인생은 글 몇 줄로 압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들을 쉽게 판단하거나 동정하지 않으려 했다. 동시에 삶의 고통이란 나만이 겪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담담해지기도 했고, 안타까우면서 처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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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들 하지만, 이 말이 언제나 통용되지는 않는 것 같다. 언젠가 누군가와 함께 자조적인 웃음을 나누며 ‘내가 더 힘들었다’는 식의 고생담을 펼친 적이 있다. 나는 이런 적도 있는데 너도 그러냐. 나는 심지어 이만큼 상처받은 적도 있었다. 보아라, 어떠냐. 뭐 이런 식이었다.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위로가 되는 따스함은커녕 씁쓸함만 남았다. 괜히 말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라도 나의 치부를 마주한 사람이 앞으로 나를 다른 시선으로 보지 않을까 싶었다. 나 또한, 그를 왜곡된 시선으로 볼까 봐 두려웠다. 혹시라도 내가 부러 자극적인 일화를 골라 이야기한 건가 싶어 후회되기도 했다. 얼핏 SNS에서 유행한다던 ‘자해 게임’이 떠올랐다. 슬픔을 앞세워 타인의 동정을 얻으려 하는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상처를 뽐내기만 하고 적당한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상처는 덧나기 마련이다. 나도 그동안 보여주기에만 급급하지 않았던가?

 

상처받은 사람으로서 과거에 얽매이며 회한 서린 울음을 삼키기보다는, 이제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갈 때가 아닐까. 나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겸허히 인정해야겠다. 물론 흉터가 남은 자리에는 넘칠 만큼의 위로와 토닥임을 건네주어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 타인과 내가 가진 고통의 경중을 비교하는 어리석은 행위는 삼가야겠다고 다짐한다.

 

듣는 자세 또한 말하는 자세 못지않게 중요하다. 누군가에게는 반창고를 뜯어내어 상처를 보여주는 행동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수치스럽고 낯부끄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감사하자. 상대가 숨겨왔던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상대가 준비를 마치고 마음을 공유해주었음에 감사하자. 그리고 그 진심을 똑바로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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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지우는 일은 쉽지 않다. “트라우마 극복!”이라는 일반적인 표현이, 실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사회화’를 거친 인간은 적당히 일반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정상 범주 안에 들고자 상처를 지우려고 분투한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상처가 약점인 사회에서는 상처 입은 구성원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세상사에 닳은 사람은 자신이 겪은 고난을 마치 제삼자의 사연을 늘어놓듯이 말한다. 심하면 자신이 슬픈지조차도 모른다. 슬픔을 숨기는 일에 너무나도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픔을 짊어지며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많다. 더욱 찬란하게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나도 언젠가 상처를 지웠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나를 옭아맨 어두운 생각들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결국, 어느 날에는 밤이 저물도록 부정적인 감정이 물결쳤다. 그래서 핸드폰을 잡은 후에 친한 친구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그간 쌓인 감정을 아무렇게나 쏟아내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에게 민폐를 끼쳐 참 미안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나의 하소연을 조용히 들어주었다. 당황할 법도 했을 텐데 고맙게도 여유 있는 태도와 함께 대화를 이끌었다. 대화 도중에 내가 흔들리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할 때면 “내가 잠깐 말해도 될까?”라며 조언을 건네었고, 둥둥 떠다니는 슬픔을 붙잡을 수도 있도록 도왔다.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다. 그에게는 자신을 이해하고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게끔 손길을 건네줄 사람을 원한다. 나는 나의 상황을 온전히 바라보고 이해해준 친구에게 정말이지 감사했다. 밤늦게 연락해서 뭐 하는 거냐며 망신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가만히 흘려들어도 괜찮을 정도로 두서없는 하소연이었는데, 좋은 사람을 곁에 두어 참 다행이지 싶었다.

 

나에게도 비슷한 순간이 찾아온다면, 나는 현명히 대처할 수 있을까? 나도 그 친구처럼 인내심, 경청의 자세, 그리고 충분한 공감 능력을 갖추어야겠다. 부족한 내가 넘치게 받은 위로의 손길을 다시 누군가에게 돌려줄 수 있게끔. 기어이 어깨를 내어주며 토닥임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당신의 반창고 아래에는 상처가 있는가? 나는 당신이 가진 상처의 깊이와 흉터의 크기를 알지 못한다. 이를 치료하는 방법은 더욱 모른다. 누군가는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치유받을 것이다. 또는 푸짐하게 차린 밥상이나, 한 권의 소설, 눈가를 비비는 가을바람에서 위안을 얻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신을 향해 소리치는 기도로, 아니면 마음을 담아 기울이는 술 한 잔으로 어긋난 마음을 위로받을지도.

 

이 짧은 글 한 편도 그러한 위안이 되어 당신의 마음을 움직였으면 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함께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기를. 비록 모니터를 건너 전하는 마음에 지나지 않겠지만,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동안 누그러트렸던 삶의 불꽃을 다시 피울 때까지 나의 곁에서 조용히 자리해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글을 마친다.

 

 

[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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