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을 향한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프레임: 기록, 진술 그리고 조응 [영화]

글 입력 2021.09.0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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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세요.
그 사람도 당신이 원하는 똑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사랑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다는 것 말이에요."
 
-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Krzysztof Kieślowski)
 
 
폴란드 출신의 영화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1941.06.27 ~ 1996.03.13)가 올해로 탄생 80주년을 맞이했다.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삶의 단면들이 묘사된 내러티브는 삶을 성찰하게끔 이끄는 역사적/윤리적 알레고리가 가득하다. 이를 명징하게 부각시킨 이미지와 더불어, 제2의 언어로 감독 스스로가 공인한 사운드트랙은 영화예술의 힘을 믿는 관객들의 눈과 귀를 매료시킨다.
 
세밀한 시선을 견지하며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변화해온 키에슬로프스키의 작품세계는 단 몇 단어로 요약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 그 이상을 담지 않으려는 감독의 변치 않는 신념이 중심을 차지한다. 삶에 잠재된 어떤 가능성으로서의 이미지, 혹은 진실의 실체화로 지칭 할 수 있는 어느 예술가의 의지다.
 
 
 

온전함을 지향한 삶의 기록으로서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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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공서Urzad, 1966)
 
 
영화인으로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첫 커리어는 다큐멘터리에서 출발한다. 폴란드의 대표 영화산업 도시 우치에서 수학한 그는 수업과정의 일환으로 제작한 <관공서>를 시작으로 폴란드의 풍경과 이를 구성하는 인간 군상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일상성이 내재된 그의 카메라는 사람들의 발길이 자연스럽게 오고 가는 공간들을 주 무대로 삼으며 그 안에 포착된 불특정 다수의 얼굴들을 주목한다. 저마다의 인생을 영위 중인 사람들의 얼굴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몽타주를 구축한 그의 초기 다큐멘터리는 폴란드의 삶을 온전히 기록하고자 한 젊은 영화인의 열정의 산실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기록 과정은 찰나의 미시적인 순간들을 통해 삶의 거시성을 드러내기 위한 일환으로서 인터뷰 형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사진 속 주인공의 현재 모습이 궁금하다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카메라의 궤적은 자연스럽게 전운이 감돌던 폴란드의 1940년대를 조망한다(<사진>) 0세 영유아부터, 100세 할머니로 이어지는 다양한 연령대의 폴란드인들을 상대로 진행된 인터뷰 장면으로만 구성된 <토킹 헤드>와 10대 소년/소녀가 첫아이를 가지는 순간까지를 다룬 <첫사랑>은 폴란드에서 살아가는 것에 관한 키에슬로프스키의 대답 같은 작품이다. 하지만, 폴란드의 삶을 담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포착된 공산주의 정권의 그늘은 젊은 영화인의 열정을 잠식한다. 닫힌 사회구조를 지향한 정부의 권위주의적 행보는 폴란드 시민들은 물론, 검열이란 미명하에 키에슬로프스키의 앞길을 수시로 가로막으며 숱한 폐해를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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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킹 헤드Gadajace glowy, 1980)
 
 
폴란드인들의 답답한 심정이 고스란히 투영된 그의 카메라는 인민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는 시스템(<병원>)과 빅브라더를 연상시키는 감시카메라(<기차역>)를 적극 활용하며 암울한 시대를 은유하는 정치적 알레고리가 대거 등장한다. 더불어, 삶을 대하는 키에슬로프스키의 다큐멘터리적 접근이 타자의 실재적 내밀함을 침해한다는 형식의 윤리성을 자문한다. 진짜 눈물을 찍을 권리가 자신에게 있는가에 관한 고민은 이제껏 지향해온 삶의 온전한 형태에 반하는 행위라는 문제 제기를 통해 조금씩 그의 필모에 변화를 촉발시킨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폐쇄적 현실을 진술한 숙명론적 내러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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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Przypadek, 1981)

 

 
<흉터Scar>를 기점으로 극 영화를 연출하기 시작한 키에슬로프스키는 당시 폴란드의 폐쇄적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숙명론적 시각에 입각한 내러티브에 몰입한다. 과거 다큐멘터리 작가 시절 겪었던 자신의 내적 갈등을 내러티브에 투영하며 국가의 소명과 개인의 신념(혹은 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들의 딜레마에 주목한다. 아마추어 감독으로서 자의식과 공장주의 이념이 어긋남으로 인해 벌어지는 갈등(<아마추어>)이나, 지역사회와 공산 정권의 대립 사이에서 이도 저도 못하는 한 관리인의 무기력함(<흉터>)은 개인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 키에슬로프스키의 진술과 같다. 중간자의 입장에서 시험대에 오른 인물들은 반강제적으로 결단을 내리지만, 결국 시대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야 마는 좌절로서의 운명만 뼈저리게 실감할 뿐이다(<평화와 평온>)
 
키에슬로프스키의 70년대는 운명이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결국 주어진 운명을 따를 수밖에 없는 그의 닫힌 내러티브에는 짙은 체념이 기저에 깔려있다. 78년에 제작한 <우연한 기회>의 경우, 선택의 유무와 관계없이 불가항력적 운명 앞에 고개 숙인 주인공의 무기력함을 비관적으로 묘사된다. 아버지의 강요로 의학도의 길을 걷던 '비텍'(보구스와프 린다)은 의미심장한 유언(”이제 안 해도 된다”)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임종을 지낸 뒤 바르샤바를 떠나기로 급히 결심한다. 흥미롭게도, 키에슬로프스키는 기차역을 향해 급히 질주하는 주인공의 순간 쇼트를 도돌이표 삼듯, 바르샤바를 떠났을 때와 그렇지 못했을 때의 벌어지는 상황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나열한다. 기차역을 기점으로 각기 다른 형태의 삶을 주도적으로 형성하지만, 폴란드 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귀결과 함께 비참한 운명의 제언 받아들인다는 결말을 공통으로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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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Bez konca, 1984)

 

 
하지만, 1984년에 제작된 <끝없는>의 경우, 다큐멘터리에서 이어져온 키에슬로프스키의 현실적 내러티브와 다소 대조적인 전개 양상을 띈다. 당시, 자유노조(솔리디라티)를 억압하기 위해 벌어진 81년의 계엄령 사태로 인한 폴란드의 암울한 시대 현실이 작품 전반에 깔려있으면서도, 영화의 중심 축을 차지하는 '우르술라'(그라지나 스자포워프스카)의 에피소드는 내세와 영성체로 말미암은 비현실적 유령 이야기라는 점에서 평단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모진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기존에 고수해온 내러티브의 자그마한 틈새를 상기시키는 일련의 비합리적 이미지는 운명이 개입하지 못하는 어떤 우연을 기반에 두고 있다. 이는 잠재적 이미지의 탄생 가능성을 가늠한 감독의 또 다른 실험이자 개척임에 다름이 아니다. 들뢰즈의 말을 빌려, '잠재태와 현실태'라는 개념 짝을 성립시키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실제적 이미지는 기록과 진술을 넘어 삶의 열린 흐름과 조응하려는 변화 의지를 예증한다.
 
 
 

운명과 우연의 기묘한 동거: <데칼로그>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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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게임 알아?
골목을 돌아 나오는데 남자면 운이 좋은 거고, 여자가 나오면 재수 없는 거.
오늘 그 놀이를 한 거야"
 
- 데칼로그, 3 중에서
 
 
1989년에 제작된 TV 영화 시리즈 <데칼로그>는 오늘날 키에슬로프스키를 수식하는 윤리와 철학의 예술가로서 전 세계적으로 그의 위상을 알린 대표작이다. 저마다의 욕망이 기인한 드라마의 갈등구조는 주인공의 도덕관념을 시험에 들게 함으로써 인간이 주인공인 현대판 이솝우화를 상기시킨다. 더불어, <끝없는>을 통해 인연을 맺은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음악)와 '크쥐시토프 피에시에비츠'(공동각본)의 협업은 <데칼로그> 시리즈를 통해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다.
 
이전부터 견지해온 숙명론적 태도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간 드라마의 내러티브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상관없는 듯 개별적으로 보이지만, 가능성과 실제성을 동시에 지닌 채 삶의 우연성과 포괄성을 강조하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낸다. 저명한 영화이론가 크라카우어의 말을 빌려, '진정한 영화적 이야기 형식'으로서 키에슬로프스키는 각각의 에피소드들 통해 모든 등장 캐릭터와 배경 그리고 환경까지도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는 요소들을 만들어낸다. 여기엔 어떠한 필요성이나 어떠한 논리 없이도 무작위로 서로에게 연결되는 우연성이 깃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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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 바르시스 Artur Barciś)
 
 
이는 각기 다른 사건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전/이후 에피소드의 등장인물들이 스치듯 지나가는 단발성 등장과 더불어, 주인공들을 의미심장하게 응시하는 정체불명의 남성(아르투르 바르시스)으로 요약 가능하다. 특히, 전 시리즈에 걸쳐 주인공의 주변을 서성이는 남성의 반복적 출현은 인물을 향한 감독의 연민과 애도를 대신하는 매개체이자, 모든 가능성과 실제성을 동시에 지니며 살 수 있는 잠재적인 연속체를 구성해낸 중개자를 상징한다. 다만, 캐릭터들로 하여금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만드는 숨겨진 힘이나 운명의 여신 같은 것으로 단정 지어선 안된다.
 
<데칼로그> 시리즈는 운명이 지배적인 기존의 폐쇄적 내러티브에서 열림과 닫힘이 공존하는 입체적 형태를 다분히 띠고 있다. 몇몇 에피소드는 십계명을 상기시키는 유일신 모티브가 크게 작용하지만, 대다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욕망의 메커니즘은 수동과 능동이 서로 오가는 점에서 인물의 주도적으로 결말에 관여하는 형태가 포착된다. 그런 의미에서, <데칼로그> 시리즈는 이제까지의 키에슬로프스키를 구성해온 요소들이 총 집약된 집대성이자, 우연과 운명을 기묘한 형태로 내러티브 내 공존시킨 대규모 실험임에 다름이 아니다. 이러한 감독의 끊임없는 실험정신은 두 편의 위대한 작품들을 통해 잠재적 가능성이 무한한 삶의 형태를 독창적인 이미지로 구현해낸다.
 
 
 

우연이라는 희망, 혹은 생명력으로 조응한 삶의 잠재된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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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의 이중 생활La double vie de Véronique, 1991)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에서 선보인 키에슬로프스키의 변화는 써내림과 동시에 사라져버리는 온전한 형태의 열린 내러티브로 완성된다. 운명의 폐쇄성에서 삶의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활짝 개방한 그의 실험정신은 '사라짐'이라는 움직임을 가장 아름답게 묘사한다. 폴란드에 거주 중인 '베로니카'(이렌느 야곱)와 프랑스에 살고 있는 '베로니크'(이렌느 야곱)라는 두 여성의 식별 불가능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영화는 삶의 우연성과 포괄성을 강조하며 긍정적으로 제시한다. 모호한 기색이 역력한 와중에도 영화를 보고 난 뒤 어딘가 정화 받은 듯한 신비로운 감흥은 이에 기인한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사소한 습관까지 닮은 두 여인의 삶은 전혀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우연치 않게 프리마돈나로의 제안을 받는 베로니카는 예술을 향한 자신의 애정을 마음껏 표출하는 클라이맥스에서 자신의 소명의식을 다한다. 반면, 정체불명의 이름으로 전달된 테이프를 통해 자신에게 연락을 시도하는 이가 있음을 직감한 베로니크는 주어진 우발적 흔적을 뒤쫓지만, 이 모든 사건은 예술가를 꿈꾸던 한 청년의 의도된 행위였음을 실감한 베로니크는 눈물을 흘린 채 그 자리를 박찬다. 도플갱어를 연상시키는 두 여인의 전혀 닮지 않은 인생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추측하기 어렵다. 다만, 예술을 선택한 베로니카의 신기루 같은 소멸은 말 그대로 예술을 상기시키는 묘한 감정을, 베로니크의 눈물은 미리 상정된 내러티브로부터 속박되었다는 자각으로서의 좌절을 상기시킨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암묵적으로 키에슬로프스키의 70년대를 대변하는 고정불변의 운명이라는 닫힌 구조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응당 비애가 느껴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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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의 이중 생활La double vie de Véronique, 1991)

 

 
두 여인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숨겨진 인연 같은 극적 장치는 이 영화에 전무하다. 엄연히 개별의 삶을 지닌 두 여인의 몇 가지 교집합은 어디까지나 우연의 일치일 뿐이며, 이는 운명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한 영화의 우발성을 부각시키는 일상의 이미지를 통해 암시된다. 갑작스러운 고통과 함께 풀쑥 주저앉은 베로니카의 눈앞에 너무나도 뜬금없이 바바리맨(!)이 등장한다. 그러나 강렬한 존재감을 풍기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베로니카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다. 사소한 차이가 인물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이전과 별개로, 키에슬로프스키의 새로운 플롯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이를 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이 우연하게 연결된 이미지와 에피소드를 통해 잠재된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긍정했다면, <세 가지 색: 블루, 화이트, 레드>은 우연성이라는 희망 혹은 삶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생명력을 내러티브의 기반으로 삼으며 자신의 마지막 프레임을 완성시킨다.
 
프랑스의 삼색 국기를 모티브로 삼은 연작의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시리즈가 상징하는 사건으로부터 우연히 휘말린다. 시리즈를 대표하는 색채감이 물씬 풍기는 쇼트들은 보는 이를 매료시킬 만큼 몽환적이며,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의 음악은 내러티브에 내재된 삶의 잠재성을 청각적으로 언술하는 영화의 또 다른 언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여타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들을 맞이하지만, 난관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세 명의 여인 모두 일절 마주치거나 대화 나누는 법 없이 우연치 않게 스치듯 마주할 뿐이다. 앞서 언급한 크라카우어의 말을 빌려, 어떠한 필요성이나 어떠한 논리 없이도 무작위로 서로에게 연결되는 요소들을 영화는 에피소드 형식을 차용해서 보여준다. 이와 동시에, 차이 있는 반복 모티브를 대거 등장시키며 에피소드 간의 우연한 연결(스치듯 등장하는 이전 시리즈의 주인공들 / 가상의 음악가 '반 덴 부덴마이어'의 지속적인 언급)을 이질감 없이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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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색: 블루Trois couleurs: Bleu, 1993)
 
 
우발적으로 맞이한 사건들의 중첩은 삶의 우연성과 포괄성을 강조하며 가능성과 실제성을 동시에 지닌 이미지들을 탄생시킨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 색: 블루>에 등장하는 4차례의 암전 화면은 '줄리'(줄리엣 비노쉬)의 시공간에 변화가 전무하단 점에서 기존의 페이드 인과는 거리가 먼 쇼트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당 장면은 모든 것이 가능하면서도 동시에 실제적인 곳으로서, 잠재된 삶의 가능성이 표출 가능한 시공간을 가리키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서의 이동 가능성이 내포된 자율적 공간이다. 그렇게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타인과의 평등한 합일을 욕망하며, 이 모든 우연의 반복을 긍정하고 포용하는 3색의 총체적 이미지는 손에 잡히지 않는 실체이자 수많은 잠재태가 내재된 굴곡진 형태로서 삶의 거대한 궤적과 조응한다.
 
다사다난한 시대상을 반영하듯, 키에슬로프스키의 작품세계는 수차례 다양한 변화를 모색했다. 카메라를 통한 온전한 삶의 기록과 운명의 지시로 말미암은 폐쇄적 현실의 진술을 넘어, 식별 불가능성과 우발성의 이미지들을 조합하며 완성시킨 삶의 몽타주는 특정 단어만으로 그의 변화무쌍한 작품세계를 요약할 수 없음을 방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잡히지 않는 의미들로 가득한 감독의 탐구 대상으로서, 변화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건 언제나 삶 그 자체다. 그 어떤 언어로도 설명이 불충분한 삶의 흐름을 카메라를 담으려던 그의 도전은 딜레마로 가득한 무채색 세상으로서, 혹은 비현실적으로 고아하고 관능적이기까지 한 입체적 공간으로서 실체를 달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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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Krzysztof Kieślowski, 1941.06.27 ~ 1996.03.13)
 
 
“주의 깊게 보세요” 키에슬로프스키가 남긴 이 한마디는 삶은 계속 흐를 것이라는 전제하에 여전히 그의 영화가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아직 실제성을 갖추지 않은 잠재된 삶의 형태와 가치는 무한하다. 그것이 곧 키에슬로프스키가 카메라에 담고 싶었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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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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