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침묵의 은방울꽃 - 멀티퍼퓸 슬리핑 듀

도시에서 느끼는 이른 새벽의 숲
글 입력 2021.09.0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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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생 생일 선물로 줄 향수를 처음 사봤다. 한번도 쓴 적 없는 향수를 구매하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무슨 향인지 짐작되지 않는 건 물론, 적절한 가격대의 향수가 맞는지, 너무 과한 향이 나지는 않는지, 용량은 얼마가 적당한지 알 턱이 없었다. 향수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난 향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향수를 일부러 멀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향수를 사용해야 할 필요를 크게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향수를 쓰는 친구들이 몇몇 있었지만 향수를 뿌린 티가 나지 않았다. 조금만 뿌린 것인지, 원래 향이 짙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향수를 뿌렸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기에 난 향수의 존재를 내 주변에서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생일 선물로 '향수'를 선택한 것은, 단지 지인의 추천 덕분이었다. 무슨 선물이 좋을지 모르겠다는 나의 고민에 그는 향수를 추천하며 다양한 향수 종류를 내게 보여주었다. 브랜드도 너무 많고 향도 너무 많아서 도무지 뭘 골라야 좋을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다행인 건 요즘은 원하는 정보를 검색만 하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다. 유튜브에 '향수 선물 추천'이라고 검색하니 그에 걸맞은 수많은 영상들이 나왔다. 가격대 별로 구분해놓은 영상, 처음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상, 자극적이지 않은 향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영상 등 어쩜 그리 내가 원하는 정보들만 쏙쏙 나오는지. 내가 향수를 검색한 적이 없다는 것을 유튜브는 아는 걸까? 괜히 사람들이 알고리즘, 알고리즘 하는 게 아니구나, 되뇌며 길지 않은 영상들을 하나둘씩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 영상을 보고 나니 막막했던 향수에 대한 '기초지식'은 어느 정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짧은 고심 끝에 설립된 지 100년이 훌쩍 지난 브랜드의 향수를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뭘 선물로 줘야 좋을지 알 수 없을 때는(특히 모르는 분야의 선물일 때는 더더욱), 베스트셀러나 인기 순위 TOP에 들어온 것을 주는 게 좋다. 내가 선택한 모델이 가장 무난하면서도 순한 향수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브랜드 내에서 가장 많이 팔렸던 향수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것에는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겠지. 선물 포장 선택지까지 체크한 후 주문 버튼을 눌렀다.

 

며칠 뒤, 기가 막히게 빠른 우리나라 배송 시스템 덕분에 내가 신경 쓸 틈도 없이 택배를 받아볼 수 있었다. 괜찮게 포장된 향수를 보며 '잘 산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을 주던 당일, 무슨 향일지 몹시 궁금해 얼른 한번 뿌려보라고 동생을 보챘다. 순한 향이라 했으니 은은하고 편안한 향이 날 것이라 생각했다. 고급스러운 외형을 가진 향수 뚜껑을 열고 드디어 손목에 향수를 뿌리고 코를 대던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갑작스레 나온 반응 때문에 내가 더 깜짝 놀랐다. 당황스러운 건 동생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내 반응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듯하다. 분명 순한 향이라고 그랬는데, 왜 이렇게 코가 찡한 거지? 향 자체는 좋았지만 내게는 너무 자극적이었다. 정말 이게 순한 향이라고? 이게 약한 향이라면 다른 향들은 얼마나 심한 거지? 그리고 이윽고 든 생각,

 

'내가 향수를 애용할 일은 거의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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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가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슬리핑 듀'의 소개 글을 접할 수 있었다. 처음엔 향수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정확히는 향수가 아니라 '멀티 퍼퓸'이었다. 신체를 제외한 향이 나길 원하는 곳에 뿌려주면 된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살짝 호기심이 일었다. 일반적인 향수 사용법과는 조금 달랐으니까.

 

그리고 <오브뮤트>라는 브랜드명이 눈에 들어왔다.


 

<오브뮤브>는 Of+Mute, 즉 '무음의'라는 뜻입니다.

 

개성을 내세우기 위해 너무 많은 말들이 쏟아지는 현대에서

향은 가장 조용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나를 각인시킵니다.

 

국내 조향사에 의해 섬세히 조향된 향들은 의미 없는 말보다

가치 있는 침묵을 전달합니다.

 

 

나는 가끔 어떤 상품 그 자체보다 브랜드의 슬로건 때문에 상품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때가 있다. 바로 슬리핑 듀가 그랬다.

 

난 조용함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여기저기 떠다니는 가벼운 말들보다 한자리를 지키면서 무게감 있는 침묵을 더 좋아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드러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꺼내 보이라는 현대 사회에 가끔은 적응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보이는 것을 위해, 시끄럽게 살아야 한다는 세상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의 가치를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숨 막히게 빠른 시대의 흐름이 내게는 조금 버겁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난 주류에 속하는 사람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유행에 뒤처지면 없는 사람 취급하는 지금의 문화가 나랑 잘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내가 좋아하는 노래, 내가 애정 하는 옷 모두 한참 전 것들이고 유행과는 살짝 거리가 먼 것들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많이 외로워질 때가 있다. 나 혼자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만 동떨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나를 엄습하기 때문이다.

 

그런 불안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나에게 <오브뮤트>의 브랜드 슬로건은 마치 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 같았고 오랜만에 친한 친구를 만난 것 마냥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의미 없는 말보다 가치 있는 침묵'이라는 말이 너무 좋았다. <오브뮤트>는 급박하고 부산스러운 현대 사회 속에서 침묵의 가치를 발견해 낼 줄 아는 브랜드였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레 향과 연결시켰다. 향이 가진 본질적인 의미를 침묵과 연관 지은 것에 난 크게 감격했고 이런 가치를 내보이는 <오브뮤트>의 슬리핑 듀는 과연 어떤 향을 지니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향과 가까워질 수 없으리라 생각한 내가 슬리핑 듀를 선택한 이유이다.

 

 

 

멀티퍼퓸 슬리핑 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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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핑 듀를 받아본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향이 부담스럽지 않은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처음엔 내심 걱정이 앞섰으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슬리핑 듀의 향은 향에 예민한 내가 맡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였다. 사실 이 점이 가장 중요했다. 아무리 좋은 향이어도 내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면 쓸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다음 한 것은 향을 제대로 느끼는 일.

 

굉장히 독특한 향이었다. 이른 새벽의 안개가 생각나는 향이기도 하면서 깨끗한 이슬이 생각나는 향이기도 했다. 동시에 어느 동화 속의 조용한 요정들이 사는 숲속이 떠오르는 향이기도 했다. 마침 <오브뮤트>에서 보내준 엽서의 풍경이 내가 생각하던 향의 이미지와 똑같았다. <오브뮤트>의 의도를 잘 이해한 것 같아 내심 기분 좋은 한편, 향 만으로 이렇게 구체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조향사라는 직업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좀 더 정확한 향의 느낌을 알아보고 싶어 슬리핑 듀의 공식 소개 문구를 다시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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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세 부분으로 향이 나뉘었다. TOP 노트와 MIDDLE 노트, LAST 노트.

 

TOP 노트는 향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요소다. 민트, 소나무, 각종 허브 향이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은은하면서 싱긋한 민트와 허브 향이 숲의 입구에 다다른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앞으로 이어질 여정을 기대하게 만들며 숲의 향들을 집약시켜 우리의 관심을 쏠리게 만든다.

 

MIDDLE 노트는 전체적인 향의 밸런스를 잡는다. 슬리핑 듀의 대주제인 은방울꽃이 여기서 등장한다. 은방울꽃의 꽃말은 '순결, 기쁜 소식, 희망' 등이라고 한다. 내가 비록 은방울꽃의 향이 어떤지는 알지 못하지만, 슬리핑 듀의 향을 느끼면서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순수한 느낌, 어떤 것과도 섞이지 않은 본연 그 상태의 은방울꽃이 떠올랐다. 동시에 현대 문명과 동떨어진 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원초적 상태를 유지하는 숲의 모습도 떠올랐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순수 자연 그 자체를 유지하는 숲의 모습이. 그런 자연에서 맡을 수 있을법한 향들이 슬리핑 듀에서 느껴졌다.

 

LAST 노트는 향이 마지막 매력을 뽐내며 산화하는 모습을 담았다. 부드럽고 촉촉한 기운이 느껴지는 가운데 시더우드와 머스크 향이 우리의 손을 놓지 않는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 하나 더 생긴 느낌이다.

 

 

 

이른 새벽, 안개 자욱한 숲속을 걷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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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걷히지 않은 안개 속을 맨발로 거닐며 숲의 기운을 온전히 느끼기 좋은 슬리핑 듀의 향.

 

자연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내게 슬리핑 듀는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이 그리워질 때마다 슬리핑 듀를 사용하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은 사진을 보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그런 곳을 떠올리곤 했는데 이제는 향까지 추가되었으니 이것보다 더 완벽할 수 있으랴. 슬리핑 듀를 만난 것이 나에겐 너무 소중하고 뜻깊은 기회였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은 나에게 맞춰진 듯했다. 침묵의 가치를 전하는 <오브뮤트>도, 안개와 자연의 향기를 담은 슬리핑 듀도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표현했으니까. '나와 이렇게 잘 맞을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약 내가 향을 제작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이런 느낌으로 브랜드를 만들고 향을 조합하지 않았을까 싶다.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아가지만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치를 지향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평생을 살아도 1-2명 만날까 말까 하는데 그것이 내게 사람이 아니라 향의 형태로 다가올 줄은 정말 몰랐다. 향을 만든 조향사분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침묵과 숲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브뮤트>의 슬리핑 듀를 추천하고 싶다. 도시의 회색빛이 지겨워 자연의 푸른색이 그리울 때, 부담스럽지 않은 자연의 향기를 느끼고 싶을 때, 안개 낀 이른 새벽의 숲속을 거닐고 싶을 때, 슬리핑 듀의 은방울꽃을 만나보자. 분명 여러분을 상상 속 그 장소로 안내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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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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