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대화를 향한 의지 [영화]

편을 나누자는 게 아니라, 질문을 하는 겁니다
글 입력 2021.08.27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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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정의는 닿을 수 없는 이상과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힘겨운 노력의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정의 핵심이 결론이 아니라 대화에 있음을 종종 잊어버린다. 본질을 상실한 과정은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민주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1957년에 나온 영화지만, 그들의 대화를 보고 있으면 현실의 어느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누군가에겐 광화문의 풍경이, 누군가에겐 4월의 바다를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이, 누군가에겐 유튜브만이 진실이라고 소리치던 흐릿한 얼굴들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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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쓴 소년의 재판 장면으로 시작한다. 검사와 변호사의 공방과 증인의 증언은 끝났고, 남은 일은 12명의 배심원이 소년의 유무죄 여부를 가리는 것뿐이다. 어떤 결정이든 무조건 만장일치로 이뤄져야 하며, 유죄가 선고된다면 소년은 사형을 피할 수 없는 상황. 회의실로 향하는 배심원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은 의미심장하다.

 

배경 설정을 알려주는 도입부가 끝나면 영화는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의 어수선함을 매끄러운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촬영상의 제약이 많아짐에도 롱테이크를 쓴 것은 단순히 심미적인 이유만은 아니다. 제한된 공간에서 다수의 인물이 대화만으로 끌어가는 극은 공간의 특성과 등장인물의 동선, 위치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컷 전환이 없다는 롱테이크의 특성은 관객들이 상기한 요소를 관찰하고 기억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영화의 대화 장면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생각해보면 롱테이크의 장점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화 장면은 보통 인물의 가슴 위쪽을 담는 바스트 샷이나 얼굴을 담는 클로즈업 샷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런 경우 인물의 감정은 잘 담아낼 수 있지만, 공간적인 정보는 극히 제한된다. 특히 이 영화처럼 등장인물이 많으면 대화가 이리저리 튈 수밖에 없는데, 공간적 정보와 인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상황에 몰입하기 어려워진다.

 

그렇기에 감독은 대화의 흐름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어수선한 초반부를 롱테이크로 보여주며 관객이 공간의 특성과 등장인물의 위치, 동선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소년의 유죄를 확신한 채 창문을 등지고 앉는 사람들과 소년이 무죄일 가능성을 생각하며 창문 쪽을 바라보고 앉는 사람의 대비되는 동선을 따라가며 관객이 등장인물의 역할을 짐작하게 하고, 극적 긴장감이 높아지며 컷 전환이 빨라지는 중후반부를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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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의 롱테이크는 다른 배심원들이 자리를 잡고 회의를 시작하기 직전에도 홀로 창가에 서 있는 배심원 데이비스의 모습으로 화면이 전환되며 끝난다. 영화의 호흡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그가 영화의 흐름을 바꿀 인물임을 암시하는 장치다. 예상대로 그는 소년의 유무죄를 가리는 투표에서 유일하게 무죄의 가능성을 주장하며 차근차근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말하면 대충 감이 오겠지만, 영화의 내용은 결국 다른 배심원들이 하나둘씩 데이비스의 논리에 설득되고, 최종적으로 소년이 무죄라는 결론에 이르는 게 전부다. 아쉽지만 반전은 없다. 영화는 후대의 법정물, 이를테면 <프라이멀 피어>와 같은 작품의 충격적인 반전에 익숙해진 관객들이 ‘뭔가 반전이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시점에서 마무리된다. 어떻게 보면 허무하고 심심한 결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너무나도 탁월했기 때문이다. 영화 안에서 배심원들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그랬듯이, 이 영화에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영화는 잘 짜인 각본과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을 통해 민주주의 사회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인간상을 그려내고, 그들이 대화를 통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오랫동안 기억될 작품이 되었다.

 

영화의 각본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소홀한 대신 12명의 등장인물을 한 명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들은 회사 회의실에서, 대학 조별 과제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잡아먹은 듯 생생하다.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가는 사람, 타인을 의식해 자신의 주장을 숨기는 사람, 상대방의 논리를 경청하고 필요하다면 생각을 바꾸는 사람, 무작정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논쟁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관객을 몰입하게 만든다.

    

각본은 설득의 양상을 다양하게 전개하며 공간의 제약이 만드는 단조로움을 없앤다. 추리물처럼 재판에서 나온 증거나 증언의 허점을 가지고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도 하고, 억지 논리를 펴는 이의 논리를 역으로 이용해 상대방을 옭아매기도 하며 다양한 상황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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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짜인 각본과 어우러지는 연출 역시 탁월하다. 영화는 좁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단조롭지 않게 보여주기 위해 연극의 연출을 빌려온다. 여럿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관객이 있는 방향으로 몸이 열려 있는 모습이나, 등장인물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말하는 모습은 연극 연출의 특징인데, 이는 치밀하게 계산된 인물의 동선 및 카메라 워크와 맞물려 다채롭고 꽉 찬 화면을 구성한다.

 

특히 차별적인 편견을 지닌 채 억지 논리를 펼치는 인물을 다른 배심원들이 하나둘씩 등지고 서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작품의 연극적인 연출은 절정에 달한다. 다소 부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작품의 메시지에 반하는 인물의 최후를 제한된 공간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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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명작의 반열에 올리는 결정적인 요소는 마지막 장면이다. 카메라는 법원을 나서는 데이비스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다가 데이비스의 주장을 듣고 처음으로 생각을 바꾼 노신사 맥카들이 저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부감으로 잡는다. 이는 영화의 주인공이 뛰어난 추리력과 논리로 소년의 무죄 판결을 이끈 데이비스가 아니라, 처음에는 소년이 유죄임을 확신했음에도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며 적극적인 소통의 의지를 보인 맥카들임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두 배심원을 부감으로 내려다보는 마지막 장면은 카메라의 시선을 아래에서 위로 올리며 정의의 여신이 조각된 법원의 지붕을 우러러보는 오프닝과 정확하게 대비되기도 한다. 정의는 명확한 실체로 우리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인간에 의해 아래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집약하는 훌륭한 마무리다.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 데이비스가 아니라 맥카들이라는 것은 이 영화의 메시지 그 자체다. 데이비스는 주인공이 아니며, 영웅이 되어서도 안 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가 틀렸을 가능성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정황상 조금 더 합리적이었을 뿐 그의 주장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를 옹호하고 감옥에서 풀어준 사람일지도 모른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진실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대화’에 대한 영화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박수를 받을 가치가 있고, 인류가 모든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낼 수 없는 한 앞으로도 빛날 것이다.

 

*

 

하나 걸리는 것은, 그들이 합의에 이를 수 있었던 이유는 불합리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상대방의 논리를 경청하고 자기 생각을 바꾼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그 방에서 아무도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모두가 대화에 참여하지 않으면 회의를 진행할 수 없고, 결론이 나기 전까지 아무도 나갈 수 없는 환경이 그들의 대화를 끌어낸 건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면 영화는 누군가가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에게 공론장은 존재하는가. 계급과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사이버 공간이 훌륭한 공론장이 될 것이라고 보았던 이들은 정확히 같은 이유로 사이버 공간이 공론장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익명의 아이피에 숨어 근거 없는 추측을 자유롭게 쏟아내고,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면 언제든지 무책임하게 도망칠 수 있는 공간에서 우리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닿을 수 없는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힘겨운 노력의 과정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으로써 흑백의 영화가 더는 현실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박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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