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글을 미술의 시선에서 바라보기 [미술/전시]

글 입력 2021.08.24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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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한글은 더는 국어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술의 발달로 문자, 소리, 온도와 같은 아날로그 지표를 디지털 코드로 옮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영화의 컴퓨터 그래픽처럼 상식을 뛰어넘는 재구성이 가능하다.
 
이런 세상에서 한글은 컴퓨터 공학자에게는 '이진법 코드'로 변환되어 새로운 프로그램을 생산했고, 디자이너들에게는 '서체'로 변환되어 폰트 시장을 만들었으며, 예술가들에게는 3D 프린팅과 같은 기술을 통해 새로운 '소재'로써 자리 잡았다.
 
이처럼 종이 위에 존재하던 한글이라는 아날로그 지표는 기술을 통해 우리 생활 전반으로 스며들었다. 여러 시도 중, 그 변화가 두드러지는 것은 미술시장에서의 활약이다.
 
과거에는 주로 서예가 한글을 사용한 미술로써 주목받았다면, 이제는 기술을 통해 한글을 꺾고 부수고 나누는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게 됐다. 특히 현대에 이르러서는 입체, 설치 작품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기에 한글을 활용한 입체, 설치 작품의 제작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글의 조합과 해체

 

한글은 20세기 초 주시경 선생이 붙인 이름으로, 그 근본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다. 그래서 한글은 훈민정음의 창제원리, 그중에서도 음소 문자의 특성과 모아쓰기 방식으로부터 비롯된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먼저, 훈민정음은 자음과 모음을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로 나누는 창제원리에 의해 음소 문자로 태어났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자음과 모음을 사용하더라도 색다르게 조합하거나 해체할 수 있었다.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를 풀어서 쓰는 알파벳과 다르게 한글은 '종성부용초성'의 원칙에 따르는 모아쓰기 방식을 채택했다. 모아쓰기란 자음과 모음을 가로세로로 묶어서 쓰는 방식으로, 한글의 현행 자형 방식이다.
 
모아쓰기 방식을 통한 다양한 조합과 해체는 한글의 활발한 재생산과 변화를 가능케 했다. 즉, 힘차고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뜻의 역동(力動)이라는 단어처럼, 한글 역시 음소 문자의 특성을 담은 창제원리를 통해 사용자가 능동적으로 조합, 해체하면서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언어인 것이다.
 
이러한 역동성을 기반으로 우리는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고 해체하였고, 현대미술 작품 속에서 한글을 기호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여타 소재보다 다양한 변용을 통해 작품을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글 프레임워크.jpg


 
예를 들어 국립한글박물관의 전시 "제3회 한글실험 프로젝트 – 한글디자인: 형태의 전환"에 출품된 티엘의 "한글 프레임워크"(2019)는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를 물성(物性)으로 치환하여 한글의 모아쓰기 원리를 입체적으로 조망한 작품이다. 3D 프린팅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2차원의 문자를 3차원의 입체로 표현했고, 따라서 풍부한 양감(量感)을 통해 한글의 역동성이 더욱 돋보인다.
 
    

모아쓰기.jpg

    
 
강주현 작가의 "모아쓰기"(2019)도 이러한 한글 모아쓰기의 구조를 서로 다른 모양과 색상으로 시각화한 작업이다. 작가는 초성, 중성, 종성의 영역을 사각형으로 시각화하고 각각의 역할에 따라 색상을 지정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실크스크린 인쇄를 조합해 아홉 종류의 모아쓰기를 하나의 기하학적 형태로 볼 수 있게 했다. 이 작품 역시 한글의 음소 문자적 특징과 모아쓰기 원리가 다양한 조합, 해체를 통해 역동적으로 배치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중 친화적인 글자, 한글


 

“스물 여덟자로써 전환함이 무궁하며, 간단하면서도 요긴하며, 정밀하면서도 통달하는 까닭에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가 있다.”

 

- 훈민정음해례본 中 ‘정인지 서문’

 

 
한글은 또한, 대중적인 글자이기도 했다. 위의 훈민정음해례본에 드러난 창제 배경과 같이 세종대왕은 한문(漢文)을 잘 몰라 뜻을 펼 수 없는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겼고 그들도 쉽게 익혀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었다. 즉, 훈민정음은 대중 친화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따라서 한글 역시 자연스레 낮은 진입장벽을 가지게 되었다.
 
한글은 인간과 자연을 본 따 만든 음소의 형태부터 가획, 병서와 함께 이것을 모아 쓰는 원리까지 간단하고 명쾌하다. 그렇기에 한글이 어색한 사람이라도 그 형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ㅁ’을 설명하고 싶다면, 이것이 입술의 모양을 따라 만든 입술소리라는 한 줄의 설명만 하면 된다. 이를 통해 대상은 ‘ㅁ’의 소리와 움직임을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내면화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 덕에 한글은 다양한 미술 상품으로써 활용되고 있다. 실제로 55종에 달하는 국내 대표 작가들의 한글 상품들은 국립한글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의 국립박물관에서 활발히 판매되고 있다.
 
 

피어라 한글 가방.jpg


병따개.jpg

    
 
상품은 더 많은 사람들의 접근성을 위해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판매한다. 특히 꽃의 모양을 표현하고자 글자 ‘꽃’을 활용한 가방, 병을 딸 때의 소리를 ‘뽕’으로 표현하여 디자인에 적용한 병따개 등 간단하면서도 재미있는 상품들이 눈에 띈다.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한글의 대중성이 미술에 적용될 수 있는 예시 중 하나로 대중이 참여하는 공론장으로써의 특징을 주목할 수 있다. 본래 문자 미술은 서론에서 언급한 서예와 같은 전통적인 미술 범주에서 시작하였으나, 점차 회화의 공간을 파괴하고 새로운 미술의 장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문자 미술은 점차 2차원의 캔버스에서 3차원의 공간으로 확장되었고, 이에 관한 담론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외국어 학원에서 배우는 것처럼 서로 소통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요컨대, 자음 'ㄹ'이 가지는 부드러운 곡선미와 발음을 얼마나 쉽고 빠르게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한글은 미술에 있어 이러한 울림이 만드는 공론장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문자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인식하기


 
한글을 미술로 접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해온 한글을 낯설게 만든다. 이 낯섦은 갑자기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해온 한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작품들을 관람하며 한글의 사용 원리를 공부할 수도 있고, 실존하는 대상과 문자와의 관계에 대해 성찰할 수도 있으며, 인간과 자연을 본 따 만든 글자 자체의 조형미에 대해 감탄할 수도 있고, 한글 상품의 경제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거나 새로운 활용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될 수도 있다.
 
필자는 이러한 새로운 생각들이 모여야만 한글이 나아가고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찰과 변화가 없이 정체된 문자는 도태되기 마련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이 원동력을 유지하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는 젊은 세대에게 주어진 크나큰 과제가 될 것이다.
 
 
 

조소연 Nametag.jpg

 

 

[조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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