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마이너 필링스', 결코 사소하지 않은 자기혐오

글 입력 2021.08.23 15:3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미국에서 나는 한국인이라기보다는 아시아인이었다. 교환학생으로 파견되었던 학교는 지역 특성상 백인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정원이 70여 명인 심리학 전공 수업을 들을 때는 강의실에 아시아계 학생은 두 명뿐이었다. 드러내놓고 차별을 당한 적이 없음에도 나는 백인 학생들 사이에 있을 때보다 중국인 학생들과 있을 때 마음이 편했다. 어떤 인종이든 외국어를 쓰는 외국인 학생들은 한국의 캠퍼스에서는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던 것과는 달랐다.

 

하루는 교환학생과 현지 학생의 언어교환 프로그램을 주관하는 단체의 환영식에 간 적이 있었다. 나라의 이름을 부르면 그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전부 일어나 박수를 받았다. 아시아는, 코리아는 언제 불릴까 기다렸다. “다음은 아시아입니다! 가장 많은 학생이 온 인도!” 그때서야 인도 학생들과 내가 같은 ‘아시아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나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느낀 적이 없었다.

 

이후로 수업을 통해 한국에서는 깊게 다루지 않았던 다양한 층위의 인종차별에 관해 배우고, 종강 후 여행을 다니면서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인은 어떤 모습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늘 누군가 내게 건네오는 행동과 말이 무해한 것인지 무지한 것인지 곱씹었다. 아시아인 여성에 관한 통계적 사실을 배울 때 시선이 느껴졌던 것, 백인 남성이었던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검은 머리를 말리는 데는 한참이 걸린다고 말했던 것. 그럴수록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감정을 느꼈다.

 

 

“소수적 감정(minor feelings)은 일상에서 겪는 인종적 체험의 앙금이 쌓이고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끊임없이 의심받거나 무시당하는 것에 자극받아 생긴 부정적이고, 불쾌하고, 따라서 보기에도 안 좋은 일련의 인종화된 감정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어떤 모욕을 듣고 그게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뻔히 알겠는데도 그건 전부 너의 망상일 뿐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소수적 감정이 발동한다.” - p.84

 


마이너필링스_입체표지(R).jpg

 

 

<마이너 필링스>는 한국계 미국인 시인인 캐시 박 영이 소수적 감정에 관해 쓴 모듈 형식의 에세이다. 각 장은 커다란 주제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이어지는 짧은 글로 이루어져 있다. 짧은 글에는 작가가 직접 체험한 일, 동료가 체험한 일, 다른 예술가의 작품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가 이런 형식으로 글을 쓴 이유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상태가 너무 복잡하게 뒤엉켜 있어서 내가 아무리 전력을 다해 봤자 그 전반을 다룰 수는 없고 그저 “근처에서 말하기”만 할 수 있기 때문(p.143)’이라고 말한다.

 

각 장을 구성하는 글들은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시인으로서, 또는 교수라는 비교적 사회 경제적 지위가 높은 아시아인 여성으로서 겪은 문단과 사회의 차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많은 이야기는 나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총알 같았다. 어느새 나는 그의 경험을 마치 내 경험처럼 느끼며 같이 허탈해하고 분노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아시아인


 

 

“이 나라에서 아시아인으로 사는 굴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아시아인은 좋은 처지에 있다는 거짓말에 주눅이 들어 있다. 근면성을 발휘하면 존엄성으로 보상받으리라 믿고 묵묵하게 열심히 일하지만, 근면은 우리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 뿐이다.” - p.112

 

 

131.jpg

 

 

황인종은 백인과 흑인 사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갈색과 흰색의 사이에는 노란색이 있을 테니 자연스럽게 황인종, 아시아인의 지위도 흑인보다는 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구권 국가에서 황인종은 그 스펙트럼 위에 놓여 있지도 않은 존재였다. 아시아인은 한때는 미국으로의 이민이 금지되거나 길거리에서 죽임을 당해도 괜찮은 존재였다가, 지금은 ‘처지가 나은’, ‘모범적인’ 이민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되었다. 아시아인은 미국에서의 이민자의 성공 신화를 대변하는 존재처럼 보이나 실은 언제든 차별받을 수 있는 ‘조건부 사랑’의 대상이다.

 

<마이너 필링스>는 아시아인이 이러한 차별을 내면화하고, 자기를 혐오하기까지 하며 느끼는 감정에 관해 이야기한다. 자신이 리더가 되기에 적절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차별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 저자는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인은 서구의 역사와 문화가 존재를 부정하는 가운데 점차 자신을 몰아내는 그 목소리에 흡수될 것이라 말한다.

 

 

 

단일한 이야기의 위험성



 

 

치마만다 응고치 아디치에는 TED 강연을 통해 ‘단일한 이야기의 위험성(The danger of a single story)’을 이야기한다. 그는 나이지리아에서 자라면서 영국, 미국의 백인 아이들이 나오는 책을 읽었고, 그런 아이들만이 문학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그가 미국에서 만난 룸메이트는 그가 잘 모르는 아프리카 국가에 관해 물어왔고, 가스레인지를 쓸 줄 모른다고 생각했으며, 그가 영어를 잘 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그는 유럽, 미국에 관해, 룸메이트는 나이지리아에 관해 단일한 이야기만을 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일한 이야기는 고정관념을 생산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힘이 있는 문화만이 고정관념을 피해갈 수 있다. 치마만다 응고치 아디치에의 소설에 폭력적인 남성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한 독자가 나이지리아 남성들의 폭력성에 유감을 표한 것처럼, 저자도 자신의 서정시가 마치 한국인 전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너무 ‘인종스러울까 봐’ 자신을 검열한다. 백인 남성들이 자신들의 모자란 면을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으로 호평을 받은 것과는 다르다.

 

 

“나는 백인의 환심을 사도록 양육되고 교육받았으며, 환심을 사려는 이 욕망이 내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겠다고 선언하더라도, 그것은 백인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의 일부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을 의미했다.” - p.66

 


유색인종 예술가들의 단일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인종적인 트라우마는 백인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작가의 사적인 경험으로 간주해야 했다. 그리고 이 고통을 딛고 백인과 함께 살아가는 미국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저자 역시 문단의 인정을 받기 위해 시를 써야 했고, 문단은 곧 백인을 의미했다.

 

문단이 좋아하는 서사를 담은 ‘인종스러운’ 서정시 대신 그는 작품에서 그의 정체성을 지우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그럴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유산인 ‘서툰 영어’로 자신만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시아, 여성, 예술가


 

이 책은 앞서 말한 인종차별의 고통을 딛고 성장하는, 아시아인에 관한 단일한 이야기를 깨는 시도를 하고 있다. 총 8개의 장 중 앞의 5개 장이 자신의 경험에 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고, 뒤의 3개 장은 아시아인 여성 예술가에 관해 다루고 있다. 그의 친구인 에린과 헬렌, 미술가이자 시인이었던 테레사 학경 차(차학경), 운동가 유리 고치야마다.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투쟁했던 인물이다.

 

‘어떤 배움’이라는 이름이 붙은 장은 저자와 에린, 헬렌이 자유롭게 시를 쓰고 미술 작품을 만들었던 대학 시절의 이야기다. 이전 장과는 달리 소설을 읽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생동감 넘치는 대화와 상황 묘사가 특징적이다. 과에서 주목받는, 뛰어난 아시아인 여성들을 가만두지 못하고 무시하는 이들도 묘사되어 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이들은 여느 예술가와 다름없이 창작물로 인정받고자 하고, 친구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테레사 학경 차는 <딕테>라는 독특한 형식의 작품을 통해 역사 속 여성을 재조명한 예술가다. 그가 안면이 있던 경비원에게 강간 살해당한 후, 학계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계속된다. 그러나 살인사건이나 테레사 학경 차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 의문을 가진 캐시 박 영은 직접 유가족을 인터뷰하고, 아시아 여성이 범죄의 대상이 될 때 사회가 어떻게 침묵하는가를 이야기한다.

 

‘빚진 자’에서는 유리 고치야마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이민 1세대 부모에게 갖는 부채 의식에 관해 이야기한다. 유리 고치야마는 맬컴 엑스와 함께 민권 운동에 참여한 아시아계 미국인 운동가다. 그의 아버지가 진주만 공격 직후 간첩으로 몰려 한때 수용소 생활을 했던 그는 수용소를 벗어나 자신이 어디에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을 때, 비로소 유규한 인종차별의 맥락을 알게 되었다. 이후 급진적인 반인종주의, 반자본주의 운동에 가담한다.

 

<마이너 필링스>는 수많은 여성, 예술가, 유색인종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고 그들이 직접 말하는 차별과 삶이라는 투쟁을 고스란히 전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같은 목적을 갖지만 단일하지 않다.

 

 

 

한국계 미국인의 이야기를 읽을 한국인에게


 

 

“가족이 과테말라에서 왔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왔던, 한국에서 왔건, 1965년 이후의 이민자들이 공유하는 역사는 미국을 넘어서 각자의 출신국으로 확장된다. (…) 그러나 이민자들이 공유하는 뿌리는 이 나라가 우리에게 부여한 기회가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의 자본주의적 확장이 우리 조국의 피를 빨아 챙긴 방식이다. 우리가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p.126

 


저자는 한국의 독자들을 위한 서문을 쓰고, 본문에서도 한국의 이야기를 하며 한국과 미국의 거리를 좁힌다. 그는 계속해서 한국전쟁 피난민이었던 아버지의 이야기,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청년들의 이야기를 하며 차별의 문제가 비단 미국 본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백인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아시아인이 다음 백인이 될 차례라 외친다. 우리의 존재를 지워내는 문화에 휩쓸린다.

 

그렇기에 ‘소수적 감정(minor feelings)’은 한국인에게도 사소(minor)하지 않다. 우리의 혐오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따져보지 않는다면 스스로 총구를 겨누게 될 것이다.

 

 

[김채윤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