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크로노스의 세상에서 카이로스로 살아가기 [영화]

판의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글 입력 2021.08.2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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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며 어떤 장면은 기뻤고, 어떤 장면은 화가 났고, 어떤 장면은 한없이 먹먹해 졌다.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작품이었고 그 때문인지 영화를 다 본 후에도 여운이 깊게 남았던 것 같다. 스페인어 원제와 영어 제목은 ‘판의 미궁’에 가깝다던데, 제목처럼 정말이지 미궁 같은 영화였다.

 

영화는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 1944년 스페인을 배경으로 한다. 공식적인 내전은 막을 내렸으나 프랑코 독재정권에 대한 반란, 가난, 억압으로 여전히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영화는 정부군 대위, 반란군, 그리고 이런 정치적/군사적 대립 사이 오필리아라는 한 소녀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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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판의 미로>의 가장 큰 특징점은 아마도 ‘환상 모티프’일 것이다. 주인공 오필리아는 알고 보니 지하세계의 공주 모안나였고, 지하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판이 제시하는 문제들을 풀어야 하는 설정이다. 이때 판과 오필리아의 관계성은 눈여겨볼 만한 관람 포인트이다.

 

영화는 ‘판’이라는 신비로운 존재로 당시 시대상을 풀어나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지하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세 번의 시험 과정에서 판은 오필리아에게 복종을 강요한다. 매 시험을 제시할 때마다 판은 오필리아에게 무조건 자신의 말을 따라야 할 것을 강조하며, 두 번째 시험에서 자신의 말과 달리 포도 두 알을 먹었다는 이유로 오필리아는 시험의 기회를 잃기도 한다.

 

모안나 공주인 오필리아가 지하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판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 구조인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모든 시험을 통과하고 이야기를 결말 짓는 것은 오필리아의 ‘불복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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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 자신의 희생으로 완성되는 그들의 서사는 스페인의 시대상황과 연결 지어 바라볼 수 있다. 스페인을 판으로, 스페인 국민들을 오필리아로 대입해 생각하는 것이다.

 

당시 스페인의 독재정권은 사람들에게 복종만을 강요했고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무참히 짓밟는 잔혹한 정치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독재정권의 막을 내린 것은 오필리아처럼 결국 ‘불복종’한, 정권에 맞선 민중의 힘이 모인 결과였다. 이렇게 복종을 강요하는 세력과 불복종으로 저항하는 세력의 대립은 오필리아와 판, 비달 대위와 반정부군, 나아가 실제 스페인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이다.

 

영화의 환상 모티프와 ‘판’의 존재는 양 진영의 관계성을 한층 더 심오하고 신비롭게 보일 수 있도록 그 깊이를 더해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시대적 비극의 상황을 축소시켜 어린 아이와 신화적 소재로 동화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오필리아와 판의 관계가 당시 시대적 비극을 더 극대화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때문에 영화에서 판과 지하세상이 실재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다소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오필리아의 상상이었든 실제였든, 중요한 건 환상 모티프가 왜 등장하며 어떻게 작용하느냐는 물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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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대립하는 두 인물로 비달 대위와 오필리아를 꼽을 수 있다. 단순히 서사적 대립 뿐 아니라 연출적으로도 감독은 비달 대위와 오필리아를 의도적으로 대치시키는 듯 보인다.

 

오필라아가 판의 시험을 수행하기 위해 숲으로 가는 장면 바로 다음에는 비달 대위가 반정부군을 잡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숲으로 진격하는 장면이, 오필리아가 열쇠를 얻은 장면 이후에는 비달 대위가 열쇠로 정부군 창고를 여는 장면이 연속적으로 연출된다.

 

두 인물이 직접 대면하고 부딪치는 것도 아닌데, 이런 장면 연출은 결국 관객으로 하여금 오필리아와 비달 대위를 비교하고 두 인물 사이 고조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물론 연출장치들이 아니더라도 비달 대위와 오필리아의 대립은 영화의 서사에서도 알 수 있다.

 

새아버지 비달 대위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말 만을 강요하고 오필리아는 동화에 빠져 사는 꼬맹이 수준으로 생각한다. 오필리아에게 보이는 강압적인 언행들, 어머니와 아이가 위급해질 시 고민없이 자신의 아들을 살리라는 그의 말은 비달 대위의 잔혹함과 인물 사이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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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 영화에서 오필리아는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판과 지하세상의 이야기들을 메르세데스에게 털어놓는다.

 

비달 대위는 단순 하녀인 메르세데스를 직접 부르고 그녀에게 여러가지 부탁을 하는 것으로 보아 대위 또한 메르세데스를 신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장면적 연출과 영화의 서사가 오필리아와 비달을 분리해 보게 한다면, 메르세데스라는 인물은 두 인물을 묶어서 한 번에 바라보게 하는 장치이다.

 

*

 

이제 본 글의 제목인 ‘크로노스의 세상에서 카이로스로 살아가기’란 무엇인지, 오필리아와 비달 대위를 통해 다루고자 한다. 필자는 두 인물이 각자 어떤 ‘시간’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지에 집중해 두 인물을 비교하고 나아가 극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살펴보는데 그 목적을 둔다.

 

고대 헬라어로 ‘시간’을 뜻하는 단어가 두 개 있다. 바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다. 모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자연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흘러가는 객관적인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으로, 하루가 24시간이고 한달은 30일인 개념과 같다.

 

반면 카이로스는 주관적 시간, 기회를 의미한다. 단순 시간이 아니라 시간 너머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상태로 이해하면 쉽다.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자신만의 의미가 더해진 시간이 바로 카이로스이다. 예를 들어 1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이지만 그 1시간동안 A가 과제를 완성했다면 과제를 완성하는 순간은 카이로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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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념들을 영화에 대입하여 생각해보자. 메르세데스를 비롯한 반정부군, 그리고 오필리아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만들어 나가는 존재다. 때로는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거대한 마음으로, 때로는 단지 우리 가족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작은 마음으로 말이다.

 

반면 비달 대위는 자신만의 시간에 갇혀 다른 사람들의 카이로스를 억압하고 제한하려 한다. 자신의 시간은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물이 정작 타인의 시간, 심지어는 시간에 담긴 의미까지 억누른다. 그의 이런 행위는 모순적면서도 잔인하다.

 

특히 비달 대위는 영화에서 시간적 의미의 크로노스를 넘어 크로노스 그 자체로 묘사된다. 바로 ‘크로노스 콤플렉스’를 통해서이다. 크로노스 콤플렉스는 크로노스가 자식이 자신을 뛰어넘을 것을 두려워해 자식들을 모두 먹어버렸다는 신화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일반적으로 가부장적, 권위주의적인 아버지가 결국 자식들의 가능성을 짓밟는 경우를 말한다.

 

비달 대위는 부모-자식의 관계 뿐 아니라 타인을 자신의 기준에 억지로 맞추어 의존적, 수동적인 존재로 여기는 모습에서 크로노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시간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 또한 이런 이유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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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 비달 대위는 크로노스임과 동시에 카이로스의 시간들을 억압하는 존재이다. 영화에서 비달이 거의 유일한 악인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영화 속 세상은 말그대로 크로노스의 세상이다. 그리고 영화 <판의 미로>는 그런 크로노스의 세상에서 카이로스들이 살아가는 모습, 당시 카이로스의 삶과 선택들을 이야기한다.

 

크로노스의 시간만이 존재하는 그의 삶을 보며 관객은 카이로스의 가치를 느끼고 이들을 응원하게 된다. 비록 영화는 정부군 일부에 불과한 비달 대위와 그 주변 인물들을 앞세운 작은 무대에서 진행되지만, 이들의 이야기만으로 결국 스페인 사회의 비극을 표현해 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채우는 사운드는 메르세데스가 부르는 가사 없는 자장가이다. 그녀의 자장가는 그 시간, 그 곳에 존재했다는 이유로 희생된 수많은 오필리아를 위한 추모곡처럼 느껴진다.

 

나는 메르세데스의 자장가가 오필리아의 삶을 위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사, 노랫말은 분명 노래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이 없다고 해서 노래가 아닌 것은 아니다. 오필리아의 삶도 그렇다. 길지 않았고 특별히 무언가 남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디를 봐야 하는 지 아는 자들”은 그녀의 흔적을 볼 것이며 화려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한 삶 아닐까. 영화 <판의 미로>는 희생된 자들에게는 위로를, 현재의 우리에게는 시대의 비극을, 섬뜩하면서도 우아하게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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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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