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너는 나의 여름이었다 [영화]

여름을 지나 여름을 추억하다, <Call Me by your Name, 2017>
글 입력 2021.08.1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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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었다". 2년 전 트위터에서 등장해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밈(Meme)이다. 어떤 말이든 끝에 이 말을 더한다면 제법 괜찮은 모양새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 글귀를 하나의 말장난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을 현실적인 뜻으로 사용해보고자 한다. 올해 역시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여름의 끝에 서버린 까닭이다.

 

작년에 이어 여름답지 못했던 여름이 어느새 끝을 고하고 있다. 낮 최고 기온이 아직 30도를 웃도는 상황에서 그게 무슨 말이냐는 반박이 날아들 것도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적어도 시기상 가을은 이미 시작되었다. 입추를 지나 처서마저 코앞으로 다가왔다. 24절기의 절반을 넘어, 8월 7일 입추가 우리를 찾아왔고 다음 주 월요일은 본격적으로 가을을 알린다는 처서다. 적어도 날짜상으론 여름을 추억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시점인 셈이다.

 

두 계절의 경계에 선 지금, 아쉬움을 담아 여름의 시작과 끝을 전하는 영화를 다뤄보고자 한다. 엔딩 크레딧이 내려간 직후 "여름이었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그런 영화 말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욕망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자, 티모시 샬라메가 보다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 바로 [Call Me by Your Name, 2017]이다. 해당 작품은 안드레 애치먼의 소설 [CALL ME BY YOUR NAME (그해, 여름 손님)]을 각색한 것으로, 원작의 1부와 2부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소설의 내용을 간간히 언급하며 영화를 살필 것이기에 이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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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1983년 이탈리아의 여름을 배경으로 17살 소년 엘리오와 24살 청년 올리버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큰 흐름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여름을 보낸다고 해서 그 의미마저 동일하진 않다. 여름은 엘리오에게는 시작으로, 올리버에게는 끝으로 나타나는 까닭이다. 애초 원작의 경우 장성한 엘리오가 15년 전의 여름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것도 작년, 자신을 찾아왔던 올리버를 떠올리며 말이다. 즉 원작은 엘리오가 기나긴 여름을 지나 새로운 계절을 맞이했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가 지금껏 가져왔던 자신의 감정과 기억이 '여름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하며, 하나의 계절이 끝을 맞이했음을 인정한 결과인 셈이다.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기억이 바로 이 말이다. 나중에요! 눈을 감고 따라 말하는 순간, 오래 전의 이탈리아로 돌아간다." [안드레 애치먼, 정지현 옮김(2018,) <그해, 여름 손님>(잔), 7쪽] 소설 첫 페이지의 구절이다. '오래 전의 이탈리아', 바로 영화의 시작점이다. 그렇다, 원작처럼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영화는 엘리오 회상이다. 영화 속 드문드문 등장하는 엘리오의 시선 역시 이를 암시한다. 그렇게 소년 엘리오의 지나간 여름, '올리버'는 청년이 된 '엘리오'의 기억으로 재생된다.

 

올리버는 24살의 젊은 철학자로 엘리오의 아버지 펄먼 교수의 여름 보조 연구원으로 뽑혀 이탈리아를 방문한 인물이다. 그는 매력적인 미국인 청년으로 펄먼 교수는 물론 마을 사람들의 호감마저 얻는 사람이다. 매년 찾아오는 이 6주 동안 자신의 방을 빼앗긴 채 가이드 노릇을 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던 엘리오 역시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17살 소년에게 여름이 찾아온 것이다. 과거의 여름이 엘리오에게 시작의 계절인 이유이다.

 

그러나 올리버에게 이 여름은 애초 끝을 암시하고 있다. 매년 이탈리아의 별장을 찾는 엘리오와 달리 그는 1983년의 여름만을 허락받은 인물이다. 그의 말버릇 "later!(나중에요!)"가 엘리오의 심기를 거스른 일 역시 이에 근거할 것이다. 나중이 없는 사람이 나중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영화 상 두 인물에게 '나중'은 없다. 올리버는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엘리오 역시 시간의 한계를 알고 있다. 올리버의 말이 엘리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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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인물의 거리감은 지속적으로 제시된다. 영화의 초반부 테니스를 치며 올리버는 엘리오의 어깨를 자연스레 만지지만, 엘리오는 자리를 벗어난다. 이후 올리버는 엘리오의 기분을 염려해 자신의 행동을 경계한다. 시내의 광장 속 전개되는 쇼트 역시 겹칠 수 없는 둘의 모습을 보여준다. 해당 장면은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지점으로, 둘은 광장 중심에 선 동상을 올려다보며 대화한다. 마주 선 두 인물은 엘리오가 자신의 마음을 밝힐수록 동상을 둘러싼 원을 따라 걸으며 멀어진다. 두 사람이 마음이 어떻든 두 인물 사이에는 닿을 수 없는 간격이 자리하는 것이다. 가장 먼 지점을 지나 다시 원의 끝에서 마주한 순간, 대화는 부재할 뿐이다. 그리고 원을 벗어나 엘리오와 마주 선 올리버는 '이런 이야기는 해선 안 된다'라고 말한다.

 

구분되는 시간 흐름은 영화의 후반부 다락방의 쇼트에서 보다 명확해진다. 이곳에서 올리버는 적극적인 동시에 짖궂은 태도로 엘리오에게 다가선다. 그러나 엘리오는 당황하며 눈물을 터뜨린다. 두 인물이 가진 표면적인 성숙도, 나이의 차이이자 그렇기에 탄생할 수밖에 없는 여름의 간격일 것이다. 그렇기에 엘리오의 눈물은 어긋난 시간에 대한 불안일 것이다. 6주라는 물리적인 시간의 끝을 넘어,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 곧 올리버라는 여름에 대한 불안이다. 영화가 소설보다 이를 분명히 할 것이다. 영화 속 올리버는 이후 엘리오를 안아 달래준다, 엘리오는 올리버와 키스하며 그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고백한다. 반면 원작의 올리버는 우리 둘 사이의 일을 몰랐다고 말하지 말라고 답할 뿐이다.

 

또한 두 인물과 그들의 어긋난 시간 흐름은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서도 줄곧 드러난다. 엘리오와 올리버는 함께하는 투 쇼트나 그 홀로 프레임에 들어선 원 쇼트를 빌려 러닝타임 속 존재한다. 관객은 엘리오와 올리버라는 인물을, 각 상대방의 입장에서 인식할 기회를 허락받지 못한다. 서로를 마주해 교차하는 P.O.V 쇼트나 O.S 쇼트가 극도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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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V는 두 번 등장하나 두 인물의 시선은 교차하지 않는다. 시선은 모두 엘리오의 것으로 관객은 이를 통해 올리버를 온전히 살필 수 없다. 영화의 시작부, 막 별장에 도착한 올리버를 내려다보는 엘리오의 시점 쇼트는 올리버의 얼굴을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올리버'라고 소개하는 남자가 펄먼 교수와 인사를 나눌 뿐이다. 엘리오 역시 자신감이 있어 보인다는 말만을 짧게 뱉는다. 아직 여름을 알아보지 못한 셈이다.

 

다음 P.O.V는 영화의 중반부 등장한다. 부엌에 쪼그려 앉아 얼음으로 코피를 틀어막는 엘리오에게 다가서는 올리버의 모습이다. 그러나 처음, 이 장면은 고정된 쇼트로 보인다. 좁은 틈 사이 올리버의 전신과 엘리오의 목소리만이 잠시 담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올리버의 허벅지와 무릎이 카메라 가득 잡히는 순간, 관객은 이 시선의 주인이 엘리오임을 눈치챈다. 그러나 이는 지속적이지 않다. 깜빡이듯 프레임에 담겼던 올리버의 다리는 곧바로 두 사람을 함께 담은 투 쇼트로 대체된다.

 

엘리오와 올리버를 함께 담는 O.S 쇼트의 경우 앞서 언급한 광장의 장면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그러나 이 역시 실질적으로 투 쇼트에 가깝다. 이렇게 영화는 올리버의 모습을 통해 두 사람의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고 있지 않음을, 올리버의 여름이 엘리오의 여름과 다르다는 것을 관객에게 설명한다. 주인을 알려주는 단편적인 POV가 엘리오의 시선임을 고려할 때, 이는 곧 엘리오가 회상을 통해 생각한 결론일 것이다. 결국 둘의 여름은 닿을 수 없었다는 자전적 결론이다.

 

올리버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함께 한 로마 여행은 두 사람의 여름이 다르다는 것을 따끔하게 보여준다. 두 사람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그 시간의 끝은 엘리오의 구토로 마무리된다. 허락된 시간이 끝나버렸다는 불안과 슬픔을 외면하고자 로마로 떠났지만 결국 간격을 극복할 수 없었음이다. 엘리오의 구토는 마음의 동요를 이기지 못한 멀미일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억지로 비틀었으니 탈이 날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의 여름이 달랐음이 다시 한번 증명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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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두 사람은 기차역에서 헤어진다. 엘리오에게 남은 것은 아직 끝내지 못한 여름과, 올리버가 선물한 그의 하늘색 셔츠 '펄럭이' 뿐이다. 엘리오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슬픔에 잠긴다. 그런 엘리오를 보며 그의 아버지 펄먼 교수는 두 인물의 감정을 인정한다. 더해 어렴풋이 자신의 과거, 아마도 그의 여름을 말한다. 이미 여름을 지나온 자로서, 여름에 몸부림치는 아들을 달래주는 것이다.

 

그리고 겨울, 올리버의 전화가 온다. 엘리오와 올리버는 서로를 서로의 이름으로 부른다. 마지막 부름이다. 이 또한 의미는 다르다. 올리버에게 이 부름은 뜨거웠던 감정을 갈무리하며 여름을 완벽히 끝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아직 여름을 끝내지 못한 엘리오에게 이 부름은 여름의 미련이다. 결혼 소식을 전하는 올리버와 통화를 마친 후, 프레임은 엘리오의 얼굴을 담는다. 그의 울음은 적막할 뿐이다. 엘리오가 그 스스로 여름을 마무리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여름의 끝은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가혹한 결론이다. 영화가 욕망이라는 대주제를 지녔기에 더욱 그러할 것 같다. 엘리오 스스로 열망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엘리오는 그 스스로 여름을 마무리한다. 여름의 시작으로부터 11년이 흘러, 엘리오는 올리버와 짧게 통화한다. 그리고 그를 "엘리오"라고 부른다. 그러나 올리버는 "올리버"라고 답하지 않는다. 엘리오는 올리버가 더 이상 여름을 생각하지 않음을 진정으로 깨닫는다. 그리고 4년 뒤 그는 올리버와 찾아가 길고 길었던 여름을 끝낸다. 여전히, 올리버가 자신을 올리버라고 불러주길 원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고자 한다.

 

누구든, 언제까지 여름에 머물 순 없다. 맞이하였다면 끝을 내야 하며, 끝을 냈다면 새로운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여름을 추억하고자 한다면, 여름을 보내야만 한다. 추억은 과거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엘리오가 그러했듯, 여름은 결국 여름으로서 마무리되어야만 한다. 영화가 담은 여름의 의미일 것이다.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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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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