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어른의 허상 [문화 전반]

‘어른이 된 나’야, 뒷일을 부탁해!
글 입력 2021.08.17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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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공책 맨 뒷장에 은밀히 쓰던 리스트가 있었다. ‘성인이 되면 할 일’이라는 이름의 리스트에는 ‘자전거 타고 시골길 달리기’, ‘인생의 회전목마 피아노로 완주하기’부터 ‘유화 배우기’, ‘피트니스 클럽 등록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드는 취미들이 적혀있었다. 그 많은 목록들 중 지금 이룬 일은 다섯 개가 채 안 된다.


사실 지금 읽어보면 그리 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많은데 그때의 나는 성인이 된 내가 모든 취미를 대신 즐겨줄 거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된 나에게 양보하는 척 많은 것들을 미뤘다.


이어질 글에서 언급할 ‘어른’은 법적 성인을 의미한다. 진정한 의미의 어른이라기보다는 스무 살을 넘긴 성인이라고 이해해주면 되겠다. 가끔 우리는 성인이 된 나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미룬다. 하지만 기대하는 이미지의 일부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기도 하다.


과연 우리는 어떤 어른의 허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제 1장. 어른은 술을 마신다



몇 년 전 12월의 마지막 날, 친구들과 만나 새해를 맞기로 했다. 문을 연 술집에 들어가려 거리를 서성이는데, 거리가 사람 머리로 꽉 들어차 있었다.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던 중, 열두시가 되자마자 가게로 인파가 쏟아졌다. 1월 1일이 되자마자 술을 마시러 온 스무 살들이었다.

 

대체 술이 뭐길래 성인이 되어서 가장 먼저 하는 일로 술 마시기를 선택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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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새내기들에게 성인이 되어서 바뀐 점을 물으면 대부분이 ‘술을 마실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술을 마셔야 하는’ 일들이 생겨난다.


대학에서 첫 야유회를 가던 날, 나는 많이 긴장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사랑니를 연달아 뽑느라 술을 많이 마셔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떠들썩한 술자리는 즐거웠지만 어색했고, 조금 두려웠다. 술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남자 선배들은 간간이 큰소리를 내며 욕설을 뱉기도 했다. 다들 별일 아니라는 듯 웃고 떠들었지만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새벽 늦게까지 긴장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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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처음 마셔보는 술에서는 소독약 냄새가 났고, 알코올램프를 들고 마시는 듯 독한 맛이 났다. 선배들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들뜬 열기에 녹아들기 위해서 술을 마셔야 했다. 술을 거절하면 분위기가 죽었다. 새내기인 나는 한 번의 거절도 없이 술을 마셨고, 내가 술 마시는 것을 즐긴다고 착각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지금, 누군가 내게 술이 나의 대학생활에 도움을 주었는지, 꼭 필요한 것인지를 묻는다면 대답은 무조건 고개를 저을 것이다. 술자리는 즐겁고, 때론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주기도 하지만 부작용이 훨씬 컸다. 술로 만든 친분은 결국 오래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계속 이어질 친분이라면 술 없이도 쌓을 수 있는 인연이었다.


술이 무조건 나쁘다는 게 아니고 ‘어른은 술을 마신다.’는 이미지가 잘못되었다. 드라마를 보다보면 공식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대학 개강 파티, MT, 축제는 술을 거하게 마시는 날이고, 실연하면 술을 마셔야 하고, 고민이 있을 때마다 술을 마시고, 누군가를 환영할 때도, 누군가를 배웅할 때도 술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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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드라마에서 술은 모임과 회식자리에서 꼭 등장해 민폐선배, ‘술자리 빌런’을 등장시키는 소재로 쓰이기도 하고, 주인공들을 취하게 만들어 속마음을 털어놓거나 사고를 일으키는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더 나아가 오피스물에서의 술은 회식자리에서 주인공을 곤란하게 하고, 상사의 만행을 일으키는 소재로 쓰인다. 또는 취직에 실패하거나 어려운 집안 사정에 지쳐 앓는 장면에 쓰이기도 한다.


어른은 모두 술을 마실까? 사실 술이 필요하지 않은 자리가 더 많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고, 술자리 자체를 불편해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미디어가 만들어낸 어른의 허상에 덮인 분위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술을 좋아하고 즐긴다고 착각한다. ‘난 진정 술을 즐긴다’는 생각이 든다면 장소나 상황을 바꿔 다시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나라면, 실연을 당해 힘들고 슬픈 상황에 술을 마시는 대신 디저트 카페에서 혀가 아리도록 단 디저트를 먹는 것이 더 낫겠다. MT를 갈 때 궤짝으로 소주를 사들고 가느라 빈약한 도시락을 먹느니 다함께 비싼 밥을 시켜 먹는게 더 낫겠다.


미디어에서 접한 술은 어른의 일상에 동반자처럼 함께한다.


그러면서도 알코올 중독은 나쁘다고 한다.


술은 어른이라면 응당 마셔야 할 것이 아니다. 내가 술을 진정 마시고 싶은 건지, 이 상황에 술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를 잘 생각해보자.




제 2장. 어른의 ‘민낯’



특히 여성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인데, 성인이 되면서 나는 평생 발라본 적도 없던 화장품을 샀다. 누가 나에게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성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와서는 덜하지만 만화나 드라마에서 ‘쌩얼(화장을 지운 민낯)’을 남자친구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상황을 많이 봐왔고, 갑자기 찾아온 남자친구에 대응하는 티 안 나는 ‘쌩얼 메이크업’제품을 판매하는 화장품 광고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유행하던 ‘얼짱시대’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인터넷 유명인들의 맨얼굴을 공개하는 코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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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여성의 민낯은 보여선 안 될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몇 년 전, 대학 MT에서 여자 선배들과 동기들은 새벽까지 화장을 지우지 않았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며 맨얼굴을 가리기 위해 하나같이 모자를 썼다. 모든 정황들이 여성이 밖에 나오려면 화장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분명 고등학교 시절까진 하지 못하게 했던 화장이 필수가 되었다니. 1월 1일을 기점으로 내 얼굴이 변한 것도 아닐텐데.


정말 웃긴 것은, 화장은 꼭 해야 하지만 너무 진하거나 티가 나면 안 된다는 암묵적 분위기였다. 얼마 전 아는 언니가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며 화를 냈다.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화장을 하지 않고 출근하면 왜 화장을 안 했냐 귀찮게 하는 남직원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작 화장을 하고 오면 ‘오늘 누구 만나느냐, 남자친구가 생겼느냐, 소개팅이 있느냐, 오늘 예쁘다’며 귀찮게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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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 화장을 하자 성적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맨얼굴로 다녔을 때는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화장을 하면 꼭 듣게 되었다. 애초에 화장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평가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화장에 쏟은 시간과 노력은 누가 보상해 주나?


여성은 어른이 되면 화장을 해야 한다고?


우리는 누군가의 평가 대상이 아니다.

어른은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

 

*

 

위에서도 말했듯 우리는 미래의 어른이 된 나에게 많은 것을 기대한다. 어엿한 직장을 가진 나, 성공한 모습의 나, 여유롭게 취미를 즐기는 나, 정서적으로 안정된 모습의 나...


하지만 과정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모두가 원하는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선 그만큼의 준비기간이 필요하고, 숱한 노력이 동반되어야 하고, 때론 실패도 겪을지 모른다. 정서적으로 안정되기 위해서도 그만큼의 시행착오와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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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난 돌을 그저 물속에 던져 놓는다고 둥근 돌이 되지 않듯, 그저 성인이 된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와 주변에서 접한 막연한 어른의 모습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을 흉내 내기보다는 스스로를 직면하고 노력과 시간을 들여 원하는 모습으로 다듬어 나가자.


어른의 허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어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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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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