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할머니의 이야기 [사람]

글 입력 2021.08.16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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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하현달이 좋다고 했다.

 

“달이 참 예쁘다”

 

그때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말을 듣고 내가 할머니를 따라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건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완전히 차오르지도, 거의 가려지지도 않은, 한쪽 면은 아주 둥글고 나머지 면은 비스듬히 둥근 달이었다.

 

할머니는 그런 하현달이 당신의 마음에 꼭 찬다고 했다.

 

 

[크기변환]배롱나무.jpg

 

 

어느 여름날,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할머니는 대로 가운데 피어있는 배롱나무들을 차가 지나가는 짧은 시간 동안 내내 고개를 돌려가며 바라보셨다. 주름진 손가락으로 분홍 꽃잎들이 흐드러져 피어있는 작은 나무들을 연신 가리키며 “봐라. 나는 저 배롱나무꽃이 참 좋다”, 하셨다. 그래서 나도 같이 보았다. 예쁘다고 몇 번이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는 두어 달에 한 번씩 우리 엄마와 이모들을 위해 참기름을 짠다. 당신의 단골 방앗간에서 짜 온 참기름 병. 그것을 나누기 위해 우리는 모이고, 새 병에 든 참기름을 다시 빈 병 위에 포개어 천천히 쪼르륵, 흘려보내는 일련의 동작을 해낸다.

 

안경을 쓴 할머니가 무릎을 세우고 바짝 앉아 저마다의 몫을 나누던 모습을 기억한다. 집에 와서 기름병을 열어 보면 우리들의 손에 들린 것은 항상 반 병보다 훨씬 많았다. “들기름이랑 참기름을 섞어서 먹으면 산패가 안되고 좋단다”,  “그렇군요” 옆에서 내가 대답했었다.


내게 할머니는 치열하게 사랑한 사람이다.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속속들이 알았고, 그것을 놓치지 않았던 사람이다. 사랑이 자신의 일부를 앗아갈지라도 그것을 놓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보고 싶던 그리운 얼굴들이 오밤중에 가끔 나타날 때면 참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울어버리는 사람이다.

 

늘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이다.

 


[크기변환]추억.jpg

 

 

그래서인지 할머니의 물건들은 온통 잃어버리기 쉬운 것들로 가득하다.

 

작은 손거울부터, 오래되어 다리가 휜 돋보기안경, 자개 조각들, 낡은 헝겊과 천 쪼가리들, 페이지를 넘겨보면 종이가루가 희여멀겋게 날리는 책들까지. 할머니의 이야기들을 통해 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별로 없다는 걸 알았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의지이자 오랫동안 간직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할머니의 이야기는 점점 서글퍼지고,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서서히 미세하게 빛을 잃어 간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언젠가는 할머니의 이야기 또한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걱정 말자. 할머니를 닮은 이 손녀가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습관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난 할머니의 이야기들을 기꺼이, 소중히 지키고자 한다.

 


[크기변환]손.jpg

 

 

할머니, 언젠가 우리 이별하게 되겠죠.

 

‘언젠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그 순간을 언젠가 마주하게 되어서. 더 이상 서로를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 없게 되더라도요.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는 밤이면 제가 불러도 보고 울어도 볼게요. 할머니가 좋아하는 달이 뜰 때면 하늘을 볼게요. 할머니가 좋아하던 음식을 저도 따라 먹을게요. 할머니를 따라서 제게 주어진 시간 동안 끊임없이 사랑을 하며 살게요. 잊지 않고, 끝까지 기억해 낼게요.


그렇게 할머니를 기억할게요. 그렇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게요.

 

 

[이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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