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빛을 새겨 관객을 초대하는 마법 - 앨리스 달튼 브라운

여름날, 섬세한 붓 터치로 그린 초대장
글 입력 2021.08.16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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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막바지다. 낮밤 가리지 않고 괴롭히던 더위도 조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올해 여러분들의 여름은 어떠셨는지. 여름 하면 모든 색들이 빛을 발하는 시기인데 올해는 유난히 조용히 지나간 것 같다. 내가 여행을 안 다녀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름 내내 거의 서울에 있다시피 해서 심심한 콘크리트 건물들만 질리게 본 것 같다. 자고로 여름하면, 눈으로 크기를 잴 수 없는 광활한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 화려한 패턴의 원색 하와이안 셔츠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 빛이 머무는 자리>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도, 푸른색의 풍경 때문이었다. 수면 위로 부서지는 빛의 파편들, 바람이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듯 고요히 펄럭이는 커튼. 회화에 대해 깊이 알지도 못하지만 그 풍경에 매료되어 방문했다. 올해는 바다를 진득하게 못 봤으니까 도시풍경으로 뻑뻑해진 눈에 청량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고서 말이다.

 

전시는 3부로 구성된다. 작가의 회고전답게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삶의 이력을 천천히 밟아가며, 시간 순서에 따라 작품을 배치했다. 작품들은 그녀가 직접 머물렀던 장소들을 배경으로 한다.

 

 

 

빛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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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Dalton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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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Dalton Brown



초기 앨리스는 주택을 중심으로 현관이나 문에 빛이 스며드는 모습을 여러 구도로 연습했다.

 

초기 그녀의 작품 속 빛은 공간을 확장하는 은은한 힘이 느껴졌다. 미처 담아내지 못한 풍경도, 빛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창문에 비친 그림자는 캔버스 밖 안 보이는 공간을 투영하고 있다. 울창한 녹음의 풍경을 빛의 그림자를 통해 창 속에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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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Dalton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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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Dalton Brown



때론 주택을 둘러쌓고 있는 풍경에 생동감을 준다. 갖가지 나무와 꽃의 그림자들은 빛에 반사되어 벽에 새겨져 생명력을 내뿜는다. 작가는 빛을 그어 관객에게 마치 주택 앞에 서 있는 듯한 현장성을 부여한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빛 한 줄기는 나의 가장 평화로웠던 순간을 보여주는 힘이 있다. 그녀가 그린 주택을 보고 있으면 어릴 적 양평에서 살던 때가 떠오른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니까 거의 20년 전 일이다. 그때 양평은 지금처럼 번화하지 않았다.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살던 큰 한옥집에서 살았는데 앞에는 넓직한 마당이 있었고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개울가 위로 만든 시멘트 다리를 건너면 큼지막한 은행나무가 있었다 (꽤 오래된 역사가 있는 나무였다). 집 뒤로는 산이 있어서 늘 계절을 가늠할 수 있었다. 초록빛이 진하면 여름, 물들면 가을, 앙상해지면 겨울이었다.

 

난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영엄해보이는 은행나무가 있는, 한옥의 풍경을 퍽 좋아했다. 볕이 잘 드는 거실은 늘 따듯한 빛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푸르른 냄새와 개울이 흐르는 소리.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이 나가고, 형제도 없는 주말 아침이면 어린 나는 그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왜 그 풍경에 매료됐을까. 작가의 그림 속 주택은 나라도, 시간도 다르지만, 빛이 만든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여지없이 양평의 풍경이 떠오른다. 아마 그때의 나는 근심도, 걱정도 없는 어린 아이였으니까 평화가 깃든 그 풍경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을지도.

 

 

   

여름빛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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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Dalton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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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Dalton Brown



이후 그녀는 주택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 20년간 창문 바깥의 풍경을 그린다. 외부의 관찰자에서 내부의 관찰자로 공간을 바꾼 후 그녀의 작품에는 물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내가 바다라고 상상했던 곳이 호수였다는 점은 놀라웠지만.

 

수면 위로 빛이 자글자글 뿌려져 있다. 활짝 열린 창문 앞으로 투명한 커튼이 휘날린다. <황혼에 물든 날>은 여동생의 집 통창에 커튼을 설치하고 부모님의 별장이 있는 카유가 호수를 상상하여 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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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Dalton Brown



석양이 지거나 혹은 여름의 푸르름이 눈부시게 빛나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가보지도 않았던 장소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피어오른다. 동시에 경건해지는 숭고미까지. 가슴 속에 흩날리는 호수 바람이 영혼을 흔드는 듯한 느낌이다. 도시의 치열한 삶에서 찾기 힘든 평화를 건져 올린 기분이다.

 

빛이 머무는 자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이 집에서 사는 이는 누구일지. 저런 집에서 하루를 맞이하는 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게 된다. 빈 이야기의 틈을 매꾸는 건 관객인 나의 몫이지만 매꾸지 않아도 좋다.

 

혹시 주변에 빛이 깃든 자리를 유심히 보신 적이 있으신지. 적어도 나는 없었다. 빛은 장소에 새로운 이야기를 부여한다. 당신의 공간을 조명하기도 하고, 공간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유가 없는 도시의 삶 속에서 빛이 보여주는 이야기 그 자체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빛을 새기는 마법



앨리스 달튼 브라운은 풍경에 비친 빛을 섬세한 붓 터치로 새긴다. 실제로 있는 공간에 빛을 그리기도 하고 때론 그녀가 상상한 풍경에 빛을 드리운다. 섬세하게 새겨진 빛은 관객이 실제로 목격한 적 없는 풍경에 생생한 사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녀의 사실주의 화풍은 빛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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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Dalton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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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Dalton Brown

 


작품에 등장하는 커튼에 대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커튼과 같은 소재들은 인간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 커튼은 작품 속에서 인간이 만든 부분을 느긋하게 하고 부드럽게 해서 이미지에 동적인 시각적 요소를 제공하지요."


빛이 만든 아름다운 풍경과 흔들리는 커튼. 텅 빈 공간을 채우는 건 관람자다. 나부끼는 커튼 자락에 손을 내밀어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나뿐만은 아니리라. 그녀가 새긴 빛은 궁극적으로 풍경에 관객을 초대하고자 하는 따듯한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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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막바지다. 그녀의 그림을 보며 새삼스레 잊고 지내던 색들을 떠올린다. 여름은 원래 이런 색이었지. 집에만 머물러 더위 빼곤 느끼지 못했던 여름을 만끽한다. 장기화 된 코로나로 인해 마음 한 구석이 황폐해진 기분이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 빛이 머무는 자리>는 지친 마음 한 켠을 따듯한 빛으로 비춰준다. 나처럼 도시의 삭막한 풍경에 지치거나, 여행을 가지 못한 분들이 계신다면 한 번쯤 방문해 여름의 풍경을 느껴보시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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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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