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십여 년만의 약속 [사람]

글 입력 2021.08.09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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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에게 문자 메시지 하나가 왔다. 대학교를 함께 다녔던 학교 선배, 장애가 있는 언니의 연락이었다. 조금은 특별한 소식이었다.
 
그동안 본인의 학업 과정이 학부 5년, 석사는 6년이 걸렸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그녀의 메시지는 순간 나를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다시 돌아가게 했다. 2010년 2월 11일, 나의 학부 졸업식 때 만난 언니의 휠체어에는 내게 건네주기 위한 꽃다발이 함께 실려 있었다. 그리고는 함께 축하 인사를 했다. "은미야, 학부 졸업 축하해! 우리 열심히 해서 현장에서 멋진 심리치료사로 만나자." 그로부터 11년이 흘렀다. 나의 올해 8월 스케줄러에는 그녀의 석사 학위수여식 일정이 기록되어 있다.
 
그녀가 말하는 학업과정을 마칠 동안의 시간은 강산이 한 번 변했을 법 했다. 전공을 살리지 못했던 나는 그 기간 동안 몇 년 정도 연락이 뜸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녀와 연락이 닿아 최근 근황을 이야기하노라면 그녀는 항상 진행 중이었던 자신의 '논문 작업' 이야기를 했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셀 수 없이 많았겠지만, 그녀가 이 세상에 포기하지 못할 것이 더는 무엇이 있겠는가?
 
 
 
나의 속도보다 조금 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는 나에게 '천천히'라는 단어를 처음 알려준 사람이다.
 
학교가 천안이었던 까닭에 항상 하굣길에는 전철이나 기차를 타야 했다. 선배 언니는 나에게 종종 같이 하교를 하는 게 어떤지 제안을 했다. 학교에서 역까지, 그리고 역사 내에서 이동 경로를 함께 하며 조심스러운 걸음을 같이 했다. 혹여나 턱 때문에 휠체어 바퀴가 걸리진 않을는지 노심초사했다. 계단을 맞닥뜨렸을 때 고장이 난 리프트를 보며 같이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러한 과정을 함께 하며 선배 언니의 이동 속도에 맞추는 법을 조금씩 깨달아갔다.
 
더 나아가 그것은 나의 속도를 다른 사람과 맞추어 조금씩 조정해 나가는 귀한 첫 경험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본인의 신체보다 서투른 나의 모습에 더 답답해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웃음으로 화답하며 동행해주는 나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그녀와 함께 나눠 먹는 소소한 간식은 항상 나의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헤어질 때는 많이 아끼고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대학생 때 나는 선배 언니와 걸으면서 조금씩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방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검은 구름 속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

 

내가 '2012년의 검은 구름'이라고 흔히 칭하곤 하는 시기에도 그녀는 나의 일상을 함께 했다. 우울증 증상 때문에 몸과 마음의 리듬, 균형이 깨져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때 선배 언니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 기도해 주었다.
 
"은미야, 잘 잤니? 밤에는 어땠어? 오늘은 날씨가 참 좋다. 오늘도 하루의 평안을 위해 기도할게. 너무 걱정하지 마,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니가 오늘 하루도 은미와 함께할게." 아마도 그 시간 동안 내가 전해 들었던 그녀의 기도는 마치 나의 어둠이 어둠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이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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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13일. 나의 스물 일곱 번 째 생일을 하루 앞둔 날 함께 하다

 

 

 

이제 함께 나란히, 또다시 함께 걸어가는 삶을 그리며

 

"응시원서비는 언니가 대 줄게. 염려하지 마. 나는 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 우리 다시 함께하기 원해"
 
나는 학부 졸업 후 전공을 꾸준히 살리지 못했다. 우연한 사고로 대학원 진학 준비마저 무산되었다. 그래도 생계를 꾸려야 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사회생활을 했지만, 그마저도 심리치료 분야와 동떨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늘 '사람'을 생각했다.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을 꿈꾸었다. 그래서 일반 직장에서도 사람들의 삶의 환경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개선할 수 있는 교통공학/건축공학 분야에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고 싶은 나의 갈망은 이것으로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이제는 나는 다시 전공 분야로의 입직을 준비하고 있다. 국가 자격시험을 5일 앞둔 오늘, 나는 그녀의 생일을 맞아 다시 한번 같이 걸을 수 있는 날을 간절히 기도한다. 선배 언니와 나는 여전히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많이 부족한 사람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노력하고 결국에는 성취했다. 그리고는 그 과정을 서로 나누며 조금씩 성장해왔다.
 
이 순간에도 각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용하고, 서로의 인생에 책임을 다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부족한 모습도 누구에게는 삶의 위로이자 희망으로서의 퍼즐 조각이 될 것을 확신한다. 그동안 서로의 순탄치 않은 삶과 성장을 지켜봤고, 그 시간만큼 사람들 속에서 함께 하기 위해 지켜온 서로의 가슴 속 열망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언니, 석사 학위 수여식 진심으로 축하해. 이제는 내가 언니 옆으로 갈게. 우리 다시 함께 하자!"
 
며칠 앞으로 다가온 국가 자격시험은 나에게 단순 경력의 의미는 아니다. 며칠 전 요가 수련을 통해 만난 선생님께서 내게 해주신 한 마디가 생각났다. "무언가를 꼭 해야겠단 어떤 특정한 목표 의식 보다는 무언가를 위하는 마음과 그 태도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부담을 내려놓으시고 매트에 올라서 주시면 됩니다."라고 말이다.
 
그렇다. 이것 또한 또 하나의 연습이다. '사람'과 함께 하는 방법을 내 스스로 일깨우기 위한 또 하나의 연습 기회, 나의 '수련'인 것이다. 오늘은 선배 언니의 생일이다. 그리고 나는 내 삶 속에서 언제나 요가 수련을 하듯 오늘도 또다시 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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