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로맨틱한 극사실주의: 앨리스 달튼 브라운, 빛이 머무는 자리 展

너무 진짜 같아서 로맨틱한 것들
글 입력 2021.08.1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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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 전에 바쁜 현대 독자들의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 당신이 이 글에서 무언가를 하나라도 얻을 수 있는, '대상 독자'인지 미리 확인해볼 수 있는 자가진단 표를 하나 준비했다. 당신은 다음에 해당되는가?

 

 

[자가진단 체크리스트]

 

1. 역에서 먼 곳? 상상만 해도 싫다.

2. 화려하고 컬러풀한 거 좋아한다. 

3. 추상화보다는 사진이 훨씬 좋다.

4. 전시 그런 거 잘 모르겠다.

 

 

위 네 가지 문항 중한 가지 라도 해당한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계속 이 글을 읽으면 된다. 왜냐하면 이 글은 위 네 가지에 해당하는 사람(=에디터 본인)이 쓰는 전시 추천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가 소개할 전시는 예술을 즐기기에 극악의 체질을 가진 필자와 같은 사람들도 매료될 수 있는 멋진 전시다. 바로 <앨리스 달튼 브라운, 빛이 머무는 자리>展이다.

 

이 전시는 삼성역 도보 3분 거리에 위치한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진행 중이다. 포스터에서 볼 수 있듯 색감도 매우 화려하고, 작품들이 너무 현실같아서 사진전에 온 느낌이 들 정도다. 구미가 당기는가? 미적 감각이 너무 없어서 '전시' 자체가 좀 두렵다고? 걱정 마시라. 먼저 전시에 다녀 온 필자가 여러분의 가이드가 되어 필자는 작품의 어느 부분을 주목하였기에 배경지식 없이도 재미있게 이 전시를 즐길 수 있었는지, 지금부터 주요 작품을 가지고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물론 아래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니 딱히 공신력은 없고, 재미를 위한 참고용이다. 이 전시 후기를 읽고 직접 전시에 가서 필자의 감상평이 타당했는가 아닌가를 판단해보는 건 어떨까?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3부의 신작 3점을 제외한 작품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필자가 PRESS 권한으로 직접 촬영한 사진도 첨부되어 있다. 불가피한 반사광은 양해해주기 바란다.

 

 

  

이거 의자야, 그림자야?


  

앨리스 달튼 브라운전은 창작 시기를 기준으로 작품을 배치,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빛과 그림자, 2부 집으로의 초대, 3부 여름 바람, 4부 이탈리아의 정취 순이다. 입장과 동시에 필자의 눈에 각인된 작품은 그녀의 초기작 <나무 그림자와 계단>이었다.

 

 

1) 나무 그림자와 계단, Tree Shadow with Stairs.jpg
Tree Shadow with Stairs (1977), 캔버스에 유채. ©Alice Dalton Brown

 

 

작품을 본 관람자의 첫 감상은 "야, 이거 진짜 같다!" 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전체 작품을 아우르는 '사실주의' 경향, 즉 마치 '사진' 같은 느낌을 주는 화풍의 특징이다. 그런데 잠깐,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지 않는가? 모르겠다고? 조금 더 가까이 와 보라.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의자'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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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e Shadow with Stairs (1977), 부분 확대. ©Alice Dalton Brown

 

 

여기서 질문. 어디까지가 '의자'고, 어디까지가 '그림자'인가?

 

당신이 위 작품을 보고 이상함을 느꼈다면,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 의자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그림자를 그려 넣은 것 같은데, 이것이 오히려 현실과 달리 의자 실물과 그림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필자의 경우 처음에 경계를 오인하여 이 의자가 사선으로 놓여있는 줄 알았다.)

 

이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헛간 뒤편으로 보이는 나무들을 보면 하얗게 잎이 다 떨어져 있는데, 우리에게 보이는 ― 그러니까 우리 뒤편에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나무의 그림자에는 잎사귀가 무성하다. 그리고 헛간 지붕 밑이자 계단의 옆 부분을 보면 하얀색 선 위에 하얀색 경첩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경첩이 달려 있다는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헛간의 문이라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이 헛간의 주인은 왜 문 앞에 떡하니 저 의자를 놓았단 말인가?

 

이처럼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그림들은 형식적으로는 극도로 논리적인 사실주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그림이 담고 있는 디테일은 어딘가 논리적이지 못하다. 언뜻 보기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물은 환상처럼, 그림자는 실재처럼 묘사함으로써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다.

 

필자는 이 역설적인 특징을 '로맨틱한 사실주의'라고 부르기로 했다.

 

 

 

'로맨틱한 사실주의'


 

'로맨틱한 사실주의'란 현실과 이상을 한 캔버스 안에 그려내는 것으로, 낭만을 해치는 모든 요소들 ― 예를 들면 실제 세계에서는 존재해야만 하는 오점이나 세월의 흔적 ― 을 검열한다. 즉, '상상에 기반한 현실주의' 정도로 바꾸어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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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field Porch Columns (1979), 캔버스에 유채. ©Alice Dalton Brown

 

 

위 작품, <웨스트필드의 현관 기둥> 역시 로맨틱한 사실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현실고증적인 작품이 어딜봐서 상상에 바탕을 둔 것이냐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당신은 정말로 현실 속 현관 기둥이 저렇게 오점 하나 없이 깨끗한 흰색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정말로 현실 속 현관 기둥이 요철 하나 없이 깨끗하게 뻗은 모양새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이것은 작가 앨리스가 현실을 '검열'한 흔적이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예시는 얼마든지 있다. 아래의 작품 <어룽거리는 분홍빛>을 보자.

 

  

3) 어룽거리는 분홍빛, My Dappled Pink.jpg
My Dappled Pink (1992), 캔버스에 유채. ©Alice Dalton Brown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 진짜같은데, 뭐가 상상력이라는 거야?  충분히 이해한다. 필자도 처음에는 정말 현실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핑크색 색감에 묻혀 있던 벽면과 기둥 사이의 잎사귀들을 보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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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Dappled Pink (1992), 부분 확대. ©Alice Dalton Brown

 

 

당신에게도 보이지 않는가? 줄기와 이어져 있지 않고 '공중부양'한 잎사귀들이. 앨리스 달튼 브라운이 매우 사실적인 묘사를 위주로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바다. 즉, 이런 환상(illusion)적인 묘사는 작가가 일부러 선택한 것이다. 현실에서는 (아무리 빛이 반사되더라도) 줄기가 분명히 보였을텐데, 그것을 아예 묵살시켜버렸다. '의도가 다분한' 묘사다.

 

이처럼 사실주의적인 기법 속에 은은하게 사실주의적이지 않은 묘사를 첨가함으로써 현실 속에 은근히 환상을 섞어낸 <어룽거리는 분홍빛>과 달리, 아예 기법 자체를 추상적으로 전환해버린 사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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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tel's Porch (1985), 캔버스에 유채. ©Alice Dalton Brown

 

 

바로 이 작품인데, 이 작품도 그냥 봐서는 모른다. 수풀 쪽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하지 않다고? 아니다. 이상할 것이다.) 가까이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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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tel's Porch (1985), 부분확대. ©Alice Dalton Brown

 

 

보이는가? 실제 기둥을 보는 듯 사실적인 기둥과 달리 바로 옆의 잎사귀는 펜으로 직직 그은 듯한 패턴으로, 묘사가 전혀 사실적이지 않다. 앨리스는 이 작품에서 기둥에는 사실주의적인 묘사를, 수풀에는 만화적이고 추상적인 묘사를 사용한 것이다.

 

 

11) 느지막이 부는 바람, Late Breeze.jpg
Late Breeze (2012), 캔버스에 유채. ©Alice Dalton Brown

 

 

마지막으로,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느지막이 부는 바람>에서도 우리는 낭만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비교적 숨어 있는 낭만을 찾아내기가 쉬울 것이다. 모름지기 커튼은 실내에 설치되는 것으로서, 바닥과 창틀에 연결된 것으로 그려져야 현실성이 확보된다. 하지만 작가는 바닥과 창틀을 캔버스 안에 그려 넣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작품의 배경은 관람객의 상상에 따라 바다위의 집이 될 수도, 요트 위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저것이 커튼이 아니라 옷자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위의 모든 요소들 ― 완벽하게 매끈한 기둥, 공중에 떠 있는 잎사귀, 선 몇 개로 이루어진 잎사귀, 바다 위의 커튼 ― 은 아무리 현실적으로 그려지더라도 실재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그림들은 사실주의의 낭만이 담겨있는 작품들이다.

 

 

 

에필로그: '빛이 호흡하는 자리'


 

자, 그럼 이제 리뷰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전시장을 들어갈 때부터 나올 때까지, 당신이 꼭 챙겨가야 하는 전시의 묘미는 딱 3가지다.

 

첫째, (본문에서 실컷 말했듯) 사진과도 견줄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인 작품들 속에서 비현실적인 묘사를 찾아내보는 것.

둘째, 습작이 굉장히 많고 그것들이 모두 전시되어 있으므로 습작과 실제 작품을 비교해서 무엇이 다른지 살펴보는 것.

셋째, 같은 장소를 여러 작품으로 그린 사례가 많으므로 같은 장소가 시간과 구도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는 것.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포인트는 꼭 직접 느껴보길 추천한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습작은 담고 있는 풍경은 똑같지만 캔버스에 유채를 사용한 본 작품들과 달리 대부분 종이에 파스텔 등을 사용하여 러프하게 그려낸 것이라 나름의 맛이 있다. 또한 앨리스는 한 장소를 전체적으로 소개하듯 작품 하나를 그린 후 그 풍경의 여러 단면을 쪼개서 별개의 작품들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반복에 대한 인내심이 굉장히 깊거나 장소에 대한 애착이 깊은 듯하다.) 앞서 소개한 <나무 그림자와 계단>도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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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입구 (마이아트뮤지엄 제공)

 


리뷰 다 끝난 줄 알았다고? 한 마디만 더 하겠다. 매우 중요한, 제목에 관한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현재 유효한 공인영어능력시험 점수를 하나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 토종 국어국문학(+경영학) 전공자이지만, 이 작품 전시 제목 번역이 매우 불-편하다.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전시장 입구에 영어로 쓰여 있는 전시명은 "Where the Light Breathes"다. 그런데 한국 버전 전시명은 "빛이 머무는 자리"다. 필자가 보기에 이 전시는 원제를 따라 "빛이 호흡하는 자리"라고 명명하는 것이 나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이 전시 전반에 걸쳐 관람자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빛이 머물러 있는 정지화면이 아니라, 빛과 어둠, 그리고 현실과 낭만이 서로 어우러져 호흡하는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은 당신도 아무쪼록 그 신기한 순간들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길 바란다. 필자의 <앨리스 달튼 브라운>展 소개는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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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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