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당연하지 않은 오늘, 쟁취하는 미래 - 뮤지컬 '모던걸 백년사'

글 입력 2021.08.02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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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정신병이야.

 

놀랍게도 나는 가까이 지낸다 생각했던 이에게 이 말을 직접 들었다. 물론 이미 나도 감정이 격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때의 충격은 아직도 선명하다. 나는 아직 한번도 '나는 페미니스트야'라고 입 밖으로 목소리 내어 말해본 적이 없었다. 마음 속으로 나혼자 읊조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먼저는 스스로 자신을 돌아봤을 때 여즉 억압되어 있는 가치관이 많고 내 행동과 인간관계 역시 갈팡질팡해 감히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에 부끄럽기 때문이었으며, 나아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른다는 핑계로 가만히 머무며 내가 사회적으로 감내해야 할 갈등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눈 앞에 두고 나니 내 마음이 완전히 전복됐다. 대체 이 사람은 이에 대해 무엇을 알기에 정신병이라고 단언하는 것일까? 나는 페미니즘을 떠나 당연히 화내야 할 일로 분노해왔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정말로 모두에게 공감을 바라는 것은 사치일까? 한번이라도 이 움직임의 이유를 생각해본다면 저렇게까지 말하진 않을텐데 이게 왜 그렇게 싫은건가?

 

페미니즘을 대하는 내 태도 역시 되돌아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불이 옮겨붙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몸을 빼고 있으면서도, 분노할 일이 있으면 감정적으로 화를 쏟아내며 타인에게 공감을 요구했다. 중심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성 이슈와 논제에 대해 내가 능동적으로 사유해보게 만드는 건, 페미니즘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가진 주변인들에게 소통의 고리를 만들어줄 수 있는 건 '이야기'일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이런 맥락에서 2016년 초연을 시작으로 2021년 우리에게 다시금 여성 이슈에 대한 시야를 열어 줄 연극 <모던걸 백년사>을 만났다.

 

 

 

직설적인 구성, 감미로운 노랫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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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모던걸 백년사>는 1920년대 동경 유학을 다녀와 조선 사회에 큰 화제를 일으킨 신여성 경희와 2020년대를 살아가며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대학생 화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대는 다르지만 마음을 휘젓는 고민의 내용은 같다. '요즘 여자들'이 문제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흔들리지 않게 지탱하며 일상을 이어가려 노력한다.

 

신여성으로 불리는 경희는 그 이름만큼 화려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 언론에서 말하는 '모던걸'은 여성 인권을 위해 힘쓰는 경희를 존중하는 호칭이 아니라, 화려하고 자유로운 신여성의 이미지 아래 문란하고 가볍다는 속이야기를 감춰 그녀를 그저 이슈거리로 여기는 호칭이었다. 경희는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찾아 집을 박차고 나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극 '인형의 집'의 번역을 결심한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사랑인 것처럼 다가왔으나 불륜을 감추는 데 급급했던 모던보이 근석, 경희의 사생활을 기사화하는 칼럼니스트 칠성, 자신의 남편만은 다른 조선 남자와 다르다 믿었으나 결국 폭행당하고 만 경희의 언니 등 시대상을 반영하는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해 이야기를 풍부하게 이끌어간다.

 

그리고 경희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대학생 화영의 이야기와 교차되며 그 의미를 심화한다. 연극 동아리에서 무대를 준비하는 경희는 자신에게 대시하는 선배 치훈이 어딘지 불편하다. 너 너무 예민한거 아니니?로 시작해서 나는 페미니스트야 라고 말을 끝맺는 치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경 쓰이지만 원활한 활동을 위해 몇번이고 화를 꾹 눌러참는다. 그중 화영의 어머니는 가사 노동을 전담하는 자신을 낮추면서, 여자는 똑똑하면서 예쁘고 섹시해야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말로 화영을 어르고 달랜다. 특히 화영에게 공감하는 선배 화영은 그 곁을 지켜준다. 졸업 후 화려한 스펙임에도 계약직으로 일하며 예쁜 네가 타준 커피가 맛있다느니 하는 얘기를 들으며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사건이 터진다. 동아리 남자 단톡방에서 화영을 두고 이루어진 언어적 성폭력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만 것. 화영은 용기를 내 이 사건을 공론화한다. 그러나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간다. 피해자인 화영은 '예민하다' '물 흐린다'는 얘기만 듣고 2차 가해에 시달리며, 오히려 가해자인 선배 무리는 휴학해버리고 사건이 종결돼 온갖 날선 말은 화영이 감내하게 됐다. 여기서 화영은 동아리에서 준비하던 연극 <인형의 집>을 살펴보고 또 동아리 방에 남겨진 연대와 응원의 메세지로 다시 굳게 설 힘을 얻는다.

 

직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내용을 파고들어 극을 전개하는 <모던걸 백년사>는 뮤지컬 형식으로 진행돼 지나치게 날서게 다가올 수 있는 이야기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만들어낸다.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여성 이슈를 둘러싼 다양한 시선을 곱씹어볼 수 있게 하면서도, 중간중간 유머러스한 대사와 상황극, 경쾌하면서도 부드러운 노랫말을 통해 관람객이 내용을 자연스럽게 소화하게 했다.

 

다만 각종 여성혐오의 내용이 나열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 아쉬웠으나 반대로 이 점은 이 극만의 특장점으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극에는 여성이 늘상 들어온 편견과 차별의 말이 등장한다. "너 오늘따라 예민하다. 생리하는 거 아니야?" 부터 시작해 "너가 피해자인 건 알지만 언제까지 이 일에 매여 있을 수는 없잖아. 이제 그만 떠나보내고 네 인생을 찾아가." 까지. 장난 혹은 연민이라는 허울좋은 감정의 이름 아래 상대방의 호소를 깎아내리는 말들이 줄지어 이어지자 극 내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이미 모두가 아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여성 이슈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일반 관람객에게는 '여성 혐오 아카이빙'이 꽤나 전달력 높지 않았을까 한다. 동시에 이러한 차별적 내용을 견디기가 힘든 것은 당시 이 극이 초연됐던 2016년의 인식과 오늘날 2021년의 인식이 분명히 변화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때는 당연하지 않았던 '불편'이 이제는 당연히 '불편'하다.

 

 

 

시간을 넘어선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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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모던걸 백년사>의 두 주인공 경희와 화영은 자신을 압박해오는 수많은 사건에도 불구하고 끝내 목소리를 높일 용기를 잃지 않는다. <인형의 집> 극본을 중심으로 시대를 넘어 연대하는 두 사람을 보며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노력으로 쟁취해낸 결과라는 것을 느낀다. 용기를 주는 이야기다. 어렵지 않다. 아주 직관적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페미니즘이 필요했고 앞으로도 필요할 것임을 명료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연극이었다.

 

 


1920년과 2020년, 그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1920년 경희의 외침이 오늘날 대학생 화영에게 이어지기까지 백년. 그 백년의 역사 속에 우리가 잃어온 것과 지켜온 것, 이루어낸 것들이 있다. 연극은 이 시간 역시 흘려 보내지 않았다. 바다처럼 짙은 색으로 일렁이는 포스터에 그 역사를 담아낸 것이다. 둥실둥실 활자가 떠다닌다. 말 그대로 여성 인권사의 백년을 집약한 활자의 바다다.

 

1948년 대한민국 여성선거권 부여

1956 가정법 개정운동 시작

이태영 변호사 여성법률사무소 개업

1957 호주제 폐지운동

1972 동일방직 최초 여성 노조 지부장 당선

1976 동일방직 여공노조 사건

1979 YH무역 여공 노조 신민당 당사 농성 시위

 

1980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3 한국여성의전화 설립

1986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1987 여성민우회 설립

1989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운동

 

1990 일본군 정신대 문제대책위 구성, 수요 시위 시작

1991 일본군 위안부 문제 최초 증언 김학순 여성운동가

1994 성폭력 특별법 제정

1995 형법 제32조 '정조에 관한 죄'를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

1999 제1회 월경페스티벌 '유혈낭자' 개최

안티미스코리아운동 제1회 페스티벌 개최

 

2000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 발족

2000~2003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

2001 여성부 신설

2002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공중파 퇴출

2005 호주제 폐지

 

2012 낙태죄 헌법재판소 헌법 소원 합헌 결정

2015 # 나는페미니스트다 선언운동

메갈리아

소라넷 고발 프로젝트 시작

2016 강남역 살인사건

# ㅇㅇ계_성폭력 고발운동 시작

소라넷 폐지

이화여자대학교 시위

2017 낙태죄 헌법소 원 재접수

2018 불용시위

2019 낙태죄 헌법 불일치 결정

 

왜 이렇게 불편한게 많냐, 예민하다, 역차별 조장이다,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편의만 바란다, 호의가 계속되니 권리인 줄 안다 등등 현 여성 이슈를 꺼내들면 늘 수많은 아픈 말들이 따라 붙는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불편을 택한 용기 있는 노력이 모여 오늘을 만들었음을 상기해본다. 포스터에 적힌 연표만 봐도 느껴지지 않는지. 여성선거권은 당연한게 아니었으며 말도 안되는 성고문 사건이 있었고 90년대 들어서야 정조에 관한 죄가 수정되었으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폐지된 것 역시 2000년이 지나서였다. 그래서 여성들은 아직도 용기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갑작스레 느닷없이 나타나 젊은 여성들을 타고 퍼진 유행이나 종교같은 것이 아니다. 성별로 편을 갈라 밥그릇 뺏어먹자는 싸움도 아니다.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페미니즘은 노력과 의지의 산물이면서도 태동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결과다. 온갖 편견이 당연한 이 사회 속에서 당연한 내 삶을 되찾기 위한 최소한의 외침이다.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와 원인은 생각해보지 않은 채 무조건 방법이 잘못됐다 과격하다고만 평가하고 귀를 막는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부디 더 많은 사람들이 본질적 이유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주었으면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사유의 일방적 강요는 소용 없다. 근간에는 공감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모던걸 백년사>와 같은 페미니즘 공연예술의 활성화가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삶의 방식을 자연스럽게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 공감의 폭을 넓혀줄 수 있으리라 기대가 된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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