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왜 '기록'하고 싶어할까, 영화 '더 파더'와 함께 고민해보다 [영화]

망각이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그것과 함꼐 평생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글 입력 2021.08.0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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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연극 동아리를 함께하며 만난, 엉뚱한 소리도 깊은 생각도 곧잘 하는 친구가 있다. 우리는 자주 만나지 않아도 꽤 자주 이야기한다. 이름은 하 땡땡이라고, 자기는 아는지 모르는지 몰라도 늘 영감이 넘치는 아이다. 그녀가 그저께 내게 물었다.

 

“나는 왜 이렇게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집착할까?”

 

 

영감의 시작.jpg
고맙다, 하땡땡

 

 

그렇긴 했다. 그녀는 걸핏하면 인스타그램에 본인 사진은 기본이요, 제 경험과 생각과 기분을 죄다 적어 올렸다. 하루에 기본적으로 세네 개는 업로드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티를 내지 않고는 못 사는 자신이 본인 스스로도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알아내 글로 써 달라고 하더라. 농담 섞어 던진 말이었겠지만 그게 내게 얼마나 좋은 영감이 되었는지 그녀는 알까.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게, 사진은 왜 찍고 싶을까? 사진에 글을 곁들여 사람들이 볼만한 곳에 올리고 싶은 이유는 뭐지? 나는 왜 블로그도 하고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브런치도 하고, 다 하려 들까?’


 

 

1. 생각해보니 우리는 모두 미친 듯이 ‘기록’을 하고 있었다.


 

하 땡땡이 내게 던진 질문은 다시 말해 ‘나는 왜 계속 기록하려 하는가’라는 본질적 물음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과 자신의 무언가에 대한 기록’을 계속하려 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기록에 대한 욕구는 그녀만의 이상행동이 아니다. 만약 하 땡땡의 기록 욕구가 이상행동이라면, 작가들처럼 이상한 사람들도 또 없는 셈이 될 테다. 그렇다면 작가나 하 땡땡 같은 사람들만 기록하고자 하는가?



sns.jpg
정소미 에디터의 SNS들

 

 

그럴 리가. 사실 오늘날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으로, 페이스북으로, 블로그로, 또는 다이어리나 카카오톡 프로필 따위로 기록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나와 하 땡땡을 포함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록에 집착하며 사느냐 하면, SNS는 개개인의 일상문화이자 자신을 소개하는 기본 프로필이 되었고, 다이어리는 매년 새로운 해의 숫자를 달아 판매되며, 이를 조금 더 아름답고 편리하게 다룰 수 있는 기능과 소품들은 매번 발전하여 새로이 등장하고 있다. 그만큼 수요가 많고 사람들은 더 높은 질의 기록을 원한다는 뜻이다.

 

그럼 이제 진짜 하 땡땡의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자. 아니, 그래서 왜 이렇게들 이것저것 여기저기 기록을 하고 싶어 하는 건데?


 

 

2. 영화 <더 파더>는 우리가 자꾸만 기록하려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더 파더 포스터.jpeg

 

 

알츠하이머병을 앓던 사람이 주변에 있었다면 정말 많은 생각과 감정이 보는 내내 일렁이는 명품 영화, <더 파더>. 나는 하 땡땡의 질문을 곱씹으며 번뜩 이 영화를 떠올렸다. 주연은 안소니 홉킨스로, 그는 ‘안소니’라는 이름과 85세라는 본인의 연령 그대로 등장하여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자신을 연기한다.

 

영화는 알츠하이머병의 정말 현실적인 증상과 시점을 거의 완벽하다시피 구현하고, 무너져가는 기억이 사람을 어디까지 나약하게 만들 수 있는가 보여준다. 또한 ‘알츠하이머의 증상은 단순히 [기억을 잃어가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한 번 보세요. 절대 그럴 수 없을걸요.”

 

<더 파더>는 85세 안소니가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건을 단순한 촬영 기법과 장면의 배치만으로 하나하나 철저히 분절시켜 그것들이 모두 독립된 조각이라 느끼게 만든다. 그러니까 ‘기억’의 최소 단위에 주목하고, 그것이 ‘잊히거나 왜곡되는 증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하여 관객이 본질적인 이해를 시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기억의 성격은 척추와 같다. 하나가 잘못되면 전체가 망가진다. 시간, 장소, 배경, 인물, 행동, 이 모든 조각은 하나의 사건이, 곧 기억이 되는데, 이 중 한 조각만 지워지거나 틀어져도 하나의 기억이 통째로 잘못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올바른 내용으로 교정이 되든 되지 않든, 결국에는 다음의 기억 왜곡과 중첩되어 더 큰 혼란을 불러온다. 내가 일전에 경험했다고 믿었던 사건은 왜곡된 것이었고, 전제해두었던 배경은 사실이 아니었으며, 잘못된 인지를 거친 나의 반응과 행동은 전혀 엉뚱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다는 모든 무서운 진실들을 한 번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안소니 홉킨스는 그때의 공포와 혼란, 스쳐가는 오만 가지 생각들을 단 하나의 노련한 눈빛만으로 정확하게, 훌륭하게 표현해낸다. 더불어 얼마 후에는 그 공포마저 잊은 듯, 아주 천연덕스럽게 다음에 이어지는 왜곡을 진실로 인지하고 행동하는 안토니는 우리에게 더욱 큰 충격을 연이어 안겨준다.

 


더 파더 메이킹 이미지.jpeg

 

 

또한 영화는 소재가 주는 혼란을 관객이 철저히 경험할 수 있도록 드문드문 사건의 개연성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삭제한다. 안소니의 집착과 의심을 돋우는 손목시계 외에는 사건의 순서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 역시 등장시키지 않는다.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사람들의 시간 감각을 반영하여 혼란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에 관객은 작중의 안소니와 함께 혼란을 쌓고 또 쌓아 나가며, 자꾸만 폭력적인 반전을 선사하는 진실에 종국에는 주어지는 모든 정보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정보들부터, 지금 당장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정보들, 그리고 그런 자신까지.

 

그리고 이 과정을 쭉 간접적으로 경험하다 보면, 밀려오는 감정들 사이에서도 가장 큰 한 가지가 반드시 따를 수밖에 없다. 바로 ‘두려움’이다. <더 파더>는 망각의 가장 두려울 만한 면을 끊임없이 비추며 인간은 분명히 망각 앞에서 무너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가 가진 어떤 것들과 모든 기억들은 우리의 삶과 함께 유한하다는 사실을 여과 없이 들춰낸다. 아무도 그걸 모를 리 없고, 그런 줄거리를 예상하지 못하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그런데 잠깐. 우리는 왜 뻔히 알면서도 <더 파더>가 선사하는 망각의 두려움을 고스란히 느낄까? 이후 내게도 같은 불행이 올 것 같아서? 삶의 유한함과 연관되어 있어서? 어쨌거나 분명한 건, 우리가 대체로 망각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3. 인간은 사실 잊을 수 있기에 살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예로부터 망각에 맞서기 위해 정말 부단히 노력해왔다. 벽화, 언어, 예술작품, 기계와 첨단기술 같은 기록을 향한 노력의 산물이 바로 그 증거다. 바꿔 말하면 인간은 무언가를 잊지 않고 쌓아나가기 위해 자꾸만 문명을 발전시켜왔다는 것인데, 이렇게 일종의 ‘회피 동기’가 되어 인간을 진화시킬 정도의 힘을 가진 망각이 반대로는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만들기도 한다면 쉽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

 


더 파더 엔딩.jpeg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잘못을 저지른다. 또는 피해를 입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거나 평소 좋아하던 주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등 언제든 슬픈 일을 겪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경험하는 감각, 생각, 감정은 곧 고통일 것이다. 원치 않는 잘못을 저지를 때의 감각, 나를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그에 뒤따르는 죄책감과 불안감. 피해를 입거나 슬픈 일을 겪을 때의 통증과 눈물이 흐르는 감각, 수많은 부정적 마음과 또 이런 불행을 겪게 되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 그에 뒤따르는 두려움과 의심 따위의 감정들까지.

 

여기서 우리는 한 사건의 감각, 생각, 감정 중 적어도 어느 것 하나는 잊어버릴 때 과거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내가 특정 누군가로부터 마음에 비수가 박히는 장면과 이야기를 보고 들었어도, 다시는 아는 척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상처 받은 기억은 잊지 못해도, 딱 그때 그 정도의 억울함과 분노 또는 슬픔 같은 감정은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어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곧 내게 ‘트라우마’라는 것으로 남아 다른 어떤 사람과도 어울리거나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만들 테니까.

 

그런데 매사에 있어 세 가지 고통을 모두 잊지 못하고 그대로, 평생 남겨둘 수밖에 없다면 어떨까? 우리에게 망각이 없어서, 죄를 저지르거나 슬픈 일을 직면하거나 누군가를 잃었던 어느 때의 감각과 생각, 감정을 모두 선명하고 완벽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뒷걸음질 치게 될 것이다. 종국에는 무언가를 경험하는 것 자체를 아예 멈춰버리려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잊을 수 있기에 살아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4. 기록은, 행복을 염원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도 아름다운 습성이자 문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기록에 집착하는 것은 참 현명한 일이다. 우리 스스로가 필연적으로 망각하고, 망각될 수밖에 없는 본질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이점만을 잘 활용하고자 하기에 할 수 있는 반응이 바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파더>가 알츠하이머병을 소재로 그리 특별한 서사를 풀어내는 것은 아님에도, 사실은 망각에 대한 뻔한 이야기를 전개함에도 관객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 것 역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파더>와 같은 비극을 경험하게 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두려운가. 나와 나의 노력, 성과, 마음 같은 어떤 것이 사랑하는 이들이나 세상으로부터 잊힐 수 있다는 것은, 나조차도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망각에 대해 두려움으로 반응하고, 기록에 집착하는 것이다.

 

기록은 어쩌면 불행해지고 싶지 않은, 행복에 대한 염원이 담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도 아름다운 습성이고 문명이지 않을까. 나는 하 땡땡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현명한 사람이라 그렇다고. 관심종자나 티를 내지 않고는 못 사는 사람 같은 게 아니라, 사소한 사건에도 인상적이었던 기억을 거듭 기록하며 자꾸만 발전해나가려 하는 거라고. 또, (이미 알고 있겠지만) 어제의 네가 어린 애나 다름없게 느껴졌다는 게 바로 그 결과니까 마음껏 사진 찍고, 적어놓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던 원하는 만큼 티 내라고.

 

이상, 85세 안소니 홉킨스가 아니었다면 지금만큼의 깊이로 탄생할 수 없었을 명작 <더 파더>와, 하 땡땡의 엉뚱한 질문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 어제오늘의 생각에 대한 나의 기록이었다. 이 감정이 가슴 한편에 고이 남아 영원히 내 마음에 기억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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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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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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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ㅅㅇ
    • 기록은 어쩌면 불행해지고 싶지 않은, 행복에 대한 염원이 담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도 아름다운 습성이고 문명이지 않을까. 라는 구절이 와닿네용 짱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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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ppyh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와닿는 부분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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