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근무태만 에피소드 [사람]

편의점에서 시간 죽이기
글 입력 2021.07.2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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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 전공 교수님이 물건들은 결국 문장들이나 다름없다며, 자신이 수집해 놓은 물건들을 보면 그 물건과 관련된 일화나 의미가 문장 형식으로 떠오른다고 이야기해 주신 적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편의점은 쓰나 마나 한 문장들로 가득 찬 공간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비슷한 물건을 사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주 이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손님들이 가져와 가판대에 부려 놓는 물건들을 보며 대충 사람들의 생활 패턴이나 라이프 스타일을 짐작해보는 건 나름 재미있는 일이다.

 

사람은 편의점 손님으로 있을 때 가장 매력이 없어 보이는 것 같다. 당신이 최고로 멋지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천장과 바닥이 새하얀 편의점 안에서 2+1 행사 중인 홈런볼을 두고 하나를 살지 세 개를 살지 고민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사람이 가진 신비와 낭만으로부터 가장 거리가 먼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학위가 몇 개든 나이가 몇 개든 모두가 그 고민을 하는 것 같다. 우리가 그런 치졸한 고민을 하도록 만들어졌기에 할인 행사가 생긴 건지, 할인 행사가 생겼기에 홈런볼을 들고 머리를 싸매게 된 것인지는 좀 생각해볼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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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일하는 편의점은 아파트 단지 내에 있어서 이용객의 9할이 인근 주민들이다. 평일 오전 시간이라 손님들은 보통 출근 시간 직장인들, 근처 관리소의 경비원분들, 빈집이 적적해 나오신 노인 분들, 하교 시간에 맞춰 애들과 함께 오는 애 엄마들, 이렇게 네 부류로 나눠진다. 원래는 아침에 학교 가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학교 수업이 전면 비대면으로 전환된 관계로 그들은 사라졌다. 매번 오는 사람만 오는 매장, 손님 얼굴이 절로 외워지는 매장은 뚜렷한 장단점이 있다. 장점은 한번 이 손님이 무엇을 사 가는지 외워 두면 미리 준비할 수 있어서 편하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만큼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자주 오는 손님이 사는 물건을 못 외우면 상당히 민망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담배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첫 한두 달은 담배 이름과 위치를 외우느라 꽤 애를 먹었다(사실 지금도 가끔 그런다.).

 

나는 이 손님이 어떤 커피를 마시는지도 알고, 무슨 모자를 쓰는지도 알고, 심지어 하교 시간 마다 함께 오는 손주 얼굴도 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피는 담배의 위치는 까먹는다. 그럼 이제 손님은 잠시라도 널 믿은 내가 바보였어.. 라는 듯 실망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격렬히 자기가 찾는 담배의 위치를 가리키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심전심 게임이다.

 

사실 손님들이 위치를 알려준답시고 담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행위는 내가 담배를 찾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 등 뒤로 담배 진열대가 있어서 손님은 저 멀리 카운터 앞쪽에서 팔을 들어 원하는 녀석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게 그분의 시점에서는 정확한 위치를 가리키고 있을지 몰라도 카운터와 진열대 사이에 있는 나로서는 그걸 보고 도저히 물건의 위치를 알 수가 없다. 대충 TV 중계로 농구 경기를 볼 때 화면의 각도 상으로는 꼭 들어갈 것 같이 보였던 슛이 완벽하게 빗나가는 순간을 상상하면 느낌이 전달되려나? 어서 담배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만 가중시킬 뿐이다.  손님이나 나나 참으로 불행한 시간이다. 그럴 때면 마음속으로 이 슬프고 민망한 시간이 어서 지나가길 빈다.

 

 

 

3.


 

매장 스피커에 연결된 컴퓨터에는 지정된 음악만 틀 수 있도록 메인 서버에서 관리하는 음악 채널이 저장되어 있어서, 해당 채널에 있는 곡 외에는 틀 수가 없다. 그런데 이 편의점 플레이리스트에 저장된 음악이라는 게 일곱 시간 동안 듣고 있기에는 좀 힘든 음악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매장에서 배경으로 트는 음악은 엄밀히 말하면 음악이 될 수 없다. 그런 음악은 일반적으로 냉장고 돌아가는 소음을 덮고 오디오를 채우는 용도라(손님이 물건 고르는 동안 할 일 없이 서있는 알바생의 어색한 침묵을 가리는 용도로도 좋다.) 적당히 귀에 걸리면서 존재감은 없어야 한다. 소음보다 살짝 낫고 감상할 만한 음악이라 부를 수 있는 수준보다 살짝 못 미쳐야 하는 것이니까.

 

매장 음악은 사람으로 치면 생기부에 교우관계가 원만하며 맡은 바를 충실히 함이라고 적혀 있을 법한 무난한 학생이다. 시험 성적이나 수행평가 성적이 월등히 높진 않지만 나름 준수하여, 쉬는 시간에는 물리나 수학 숙제를 해오지 않은 친구들에게 자기 숙제를 보여준다. 이런 친구들은 성격도 무난해서 동성 친구, 이성 친구 가릴 것 없이 학기 초부터 아이들에게 ‘성격 괜찮은 애’로 통하여 쉽게 호감을 살 것이다. 뜀틀이나 줄넘기 같은 실내 체육에는 두각을 나타내지만, 구기종목에는 약한 탓에 종종 축구 시간에는 스탠드에 앉아 축구를 하지 않는 아이들과 가벼운 수다를 떨기도 한다.

 

처음에는 당신 역시도 그 아이의 순한 성격과 서글서글한 말투, 또래 아이들에게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 특유의 여유로운 관대함 때문에 호감을 가지고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나 곧 자신과 그리 잘 맞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란 걸 알게 될 터인데, 같이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탁구를 치는 등 단순한 놀이를 하기엔 좋지만, 함께 전시나 영화를 보고 풍부한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타입은 아님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 이야기의 메시지나 영화의 교훈 등을 운운 할 것이고, 모든 대화는 높은 확률로 교육방송 식 결말을 내고자 할 것이다. 당신과 그 아이는 자연스레 멀어지다가 방학 때 연락이 끊기겠지만, 어차피 그 아이도 먼저 연락하는 스타일은 아닌지라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 친구는 반드시 졸업 후 소식이 끊겼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당신의 주변에도 연락이 닿는 동창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마 또 어딘가 에서 주변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맡은 바에 충실하겠지 하는 식으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한 떼자국처럼 몇 년에 한 번씩 당신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다가 언젠가 완전히 잊혀질 것이다.

 

그런 음악을 일곱시간 동안이나 듣고 싶진 않아서 얼마 전부터 블루투스 스피커를 가져가 내가 틀고 싶은 음악을 틀기 시작했다. 브로콜리 너마저 나 언니네 이발관 같은 홍대 인디음악의 고전들도 좀 틀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나 한영애, 윤상 같은 예전 가요 들도 좀 튼다. 손님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나름 그날그날의 날짜나 상황에 따라 맞는 음악을 트는 것도 은근한 묘미다. 4월 1일엔 딥 퍼플의 April을 튼다던가(4월은 잔인한 달이니까), 근무서는 중에 아라가키 유이와 호시노 겐의 결혼 발표 뉴스를 봤을 때는 축하의 의미로 두 사람이 부부로 나온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의 주제곡을 튼다던가, 담배 사러 오는 사람이 하도 많던 어느 날은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튼다던가. 제로 콜라를 마시며 담배를 사러 온 수많은 이들이 잠시나마 삶과 죽음에 대해 경건히 성찰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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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언젠가부터 플라스틱 바구니들을 쌓아 놓는 매장 밖 코너에 누군가가 항상 빈 박카스 병을 하나씩 두고 가기 시작했다. 아침에 출근할 때는 없었는데 점심 즈음 나가보면 놓여 있는 식이라 분명히 내가 근무하는 시간 중임이 분명했고, 심증이 가는 강력한 후보가 있긴 했다. 오전마다 오백원 짜리 동전 한 개와 백원 짜리 동전 세 개를 가지고 오셔서 딱 박카스 한 병만을 사가는 연세가 지긋하신 할아버지인데, 좀 난감했던 것은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또 사러 오셨을 때 계산해드리면서 짐작만으로 “앞에 병 버리고 가시면 안 돼요~” 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진짜로 그 분이 아닐 수도 있고. 방법은 현장 검거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또 오시면 박카스를 사자마자 얼마 있다가 바로 나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비칠비칠 할아버지가 느릿느릿 매장 안으로 들어온다. 냉장고에 갔다 와 오백원 짜리 동전 한 개와 백원 짜리 동전 세개를 내밀고 조용히 나가신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뒤를 따라 나갔다. 역시나 그분이 맞았고 나는 다가가며 생각했다.

 

혹시라도 나보고 치워 달라고 하면 그건 너무 귀찮다. 앞으로도 계속 두고 갈 뿐만 아니라 계속 알바생들이 치워 주는 줄 알고 그냥 가버릴 가능성도 있다. 때문에 다 먹고 나선 꼭 매장 내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려 달라는 명확한 권고사항까지 전달해야 한다.

 

“할아버지 여기다 병 두고 가시면 안 돼요.”

 

할아버지는 귀가 안 들리셨다. 내가 하는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들으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박카스를 사실 때도 말없이 동전만 내밀곤 하셨는데.

 

젠장!

 

담배 위치라는 극적인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나와 손님의 몸부림과 비교하자면, 이 경우가 훨씬 어려운 상황이다. 슛은 정확했는데 골대가 없는 상황. 등기부 등본과 통장, 인감도장, 신분증 등 서류 발급에 필요한 준비물을 다 챙겨서 집을 나왔는데 접수처가 마감한 것 같은 상황이다. 나는 어떻게든 할아버지를 이해시키기 위해 이번에는 이심전심 게임 대신에 몸으로 말해요를 시작했고(다시 말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몸으로 말해요다.) 할아버지는 가만히 보시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노을을 보며 언덕 너머로 사라지셨다.

 

어떻게 마임으로 의사전달에 성공한 것인지, 빈 병은 더이상 그곳에 놓이지 않는다. 그러나 박카스 할아버지는 여전히 자주 등장하신다. 그 분은 아마 새로운 무단투기 스팟을 찾았을 것이다. 공원 어딘가 일지 집 들어가는 길목 위일지는 알 길이 없지만, 뭐 내 눈에만 안 보이면 됐지. 어느 날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공용 비품 창고를 열었다가 빈 박카스 병 백 개가 우르르 쏟아지는 식의 엔딩은 아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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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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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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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던 행인
    • 필력 좋습니다 글이 잘 읽히는 군요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에디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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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읽는곰돌이
    • 담백하면서도 신선한 글이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접점이 없어보이는 글이었으나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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