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시, 활을 들다 [음악]

팬데믹 속 온라인 바이올린 수업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
글 입력 2021.07.24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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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킷리스트’. 듣는 것만으로도 낭만적인 단어다. 이 단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어디선가 내가 꿈꾸던 삶이 다가오는 느낌이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이 말을 굳건히 믿는 나는 비전 보드를 만들어 꿈꾸는 것들을 모았다.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기간인 휴학을 맞으며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이루어갈 일만 남은 줄 알았다.

 

그러나 꿈이 그렇게 달콤하게 이루어지지만은 않나 보다. 코로나19로 인해 나의 버킷리스트는 불투명해졌다. 필수적인 사회 활동을 제외한 많은 활동이 제한되는 시기에, 많은 꿈이 금지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코로나19가 앞당겨준 것이 있었다. 상상만 하던 모든 것이 온라인 플랫폼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무언가 배우려 할 때, 이동 시간까지 포함하여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은 대학생 신분인 나에게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온라인으로 대학을 다니며 온라인 환경에서의 공부에 익숙해지자, 시간상의 이유로 미뤘던 오랜 나의 꿈이 생각났다. 바이올린이었다.

 

바이올린은 초등학교 2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했던, 나의 오래전 친구 같은 취미였다. 하지만 미대 입시를 시작하며 붓을 드는 대신 활은 내려놓아야 했다. 오랜 시간 연락이 끊긴 친구를 종종 생각하듯, 수험생 시절에도 바이올린을 다시 잡고 싶은 마음은 늘 한편에 있었다. 중학생 시절 교내 오케스트라 세컨드 바이올린을 맡았던 시절 철부지 같던 아이들의 악기 소리가 겹쳐서 만들어내던 화음이 잊히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면 교내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리라 다짐했지만, 디자인과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케스트라는커녕 잠잘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기에, 자유를 가진 대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린을 다시 잡을 수 없었다. 전공에 써야 하는 에너지와 시간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바이올린을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해졌다. 나만의 언어를 하나 더 갖고 싶기 때문이었다. 문자 언어는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평생을 갈고 닦아야 하고, 시각 언어는 내가 전공으로 택했다면, 내게 자유로이 남은 것은 음악 언어가 유일했다. 음악으로 자유롭게 나를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커졌다.

 

그랬던 내게 온라인으로 무엇이든 배울 수 있게 된 것과 휴학 시기가 겹친 것은 기회였다. 온라인으로 정말 악기를 배울 수 있을까? 기대 반, 의심 반으로 찾아보았다. 온라인으로 선생님을 찾아주는 플랫폼이 있었다. 플랫폼에서 제안을 받은 다양한 선생님들께 시범 수업을 받아본 후 내가 추구하는 수업의 방향과 가장 닮은 철학을 갖고 계신 분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 수업을 받는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현재 네덜란드에서 석사 과정 중에 계셨다. 네덜란드에 계신 분에게 실시간으로 바이올린을 배우다니, 가능할까 걱정도 했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수업은 즐거웠다. 네덜란드까지 가서 바이올린을 더 공부하고 싶을 만큼 이 악기를 사랑하는 분에게 수업을 배우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선생님 덕분에 바이올린을 단순한 취미를 넘어서 깊고도 기쁜 고민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선생님은 테크닉을 지도해주실 뿐만 아니라 음악 자체에 대한 접근을 도와주셨다. 좋은 음악을 많이 들으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서 최근에 좋아하게 된 바이올리니스트 등 좋은 클래식 영상들을 자주 추천해주셨다. 좋은 음악을 많이 담아야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하셨다. 같은 악기지만 다른 스타일로 연주하는 영상들을 보며, 나의 연주는 어떤 소리를 보여줄 수 있을까 상상했다.

 

매주 수업이 재미있지만, 몇 주 전 수업에서의 연습이 인상 깊었다. 미뉴에트를 천천히 연주하는 연습이었다. 바이올린은 능숙하지 않으면 줄이 바뀔 때 약간의 어긋나는 소리가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실제 빠르기보다 천천히 곡을 연습하며 음을 부드럽게 잇는 연습을 했다. 곡의 경쾌한 멜로디와 리듬감이 귀에 익었기에, 마음속 멜로디를 무시하고, 느리지만 부드러운 음악으로 연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음이 악기에 닿는 순간까지 천천히 한음 한음 그려나가면 그저 머리속의 곡을 따라가기에 바빴던 때의 소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나왔다. 악기에 닿기까지 음을 기다려주고, 그 음들을 이어서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매개자가 된 느낌이었다.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표현을 빌려, “we don't start this piece, it's already started. 이 곡은 시작을 연주하지 않아요. 이미 시작되고 있어요.” 같은 느낌이었다. 연주자의 욕심을 내려놓고 음들을 기다려주자, 듣는 사람도 편한 음악이 되었다.

 

바쁜 일상에 치여 연습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채 수업을 들을 때도 있었지만, 일주일에 한 시간이든 매일 한 번씩이든 조금씩 바이올린을 잡는 일은 내게 큰 즐거움이었다. 바이올린은 인생을 대하는 태도도 가르쳐 주었다. 한 번의 좋은 소리는 단순하고도 지루한 수많은 활 긋기 연습 없이는 나올 수 없었다. 유연한 소리는 하다 보면 손가락에 쥐가 나는 연습곡을 몇 번이고 연습해야 얻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얘한테 힘이 생긴다니’ 하고 믿기지 않던 나의 새끼손가락도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자 연주할 때 제 몫을 할만큼의 힘이 생겼다. 한 음 한 음 활을 긋는 것은 언젠가 내가 내게 될 좋은 소리에 대한 믿음의 표시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최선을 다할 때 보이지 않던 것이 선명해졌다.

 

세상은 졸업을 앞둔 대학생에게 결과물을 내놓으라고 한다. 빠른 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보이라 한다. 그런 시기에 내가 바이올린을 집어 든 것은 느림의 예술을 나의 언어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아름다워질 나의 음들. 내가 그리는 그 음들에 매일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나의 일상이 가치가 생긴다. 청중은 나밖에 없지만, 나만을 위한 연주를 가다듬는 일은 힘이 된다. 눈을 감고 내가 만드는 음들에 잠기는 일은 아름답다.

 

언제까지 이 바이올린이라는 친구와 가까이 지낼 수 있을까. 코로나가 끝나면 꿈꾸던 대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들어갈 수 있을까. 복학하고 일분일초를 쪼개서 써야 하는 학교생활로 돌아가면 어쩌면 다시 소원해질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의 발걸음으로 이 친구와 함께할지는 모르겠지만, 언제 다시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오래된 친구처럼 바이올린과 함께할 것 같다. 오래 연락이 끊겼어도 어디선가 잘살고 있을 것 같은 친구처럼, 내게 언제나 힘이 되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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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정말로 친구처럼 정겨운 나의 바이올린.

 

 

마지막으로 공감이 되었던 바이올린에 대한 에세이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나의 글을 읽는 누군가가 코로나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바쁜 일상으로 희미해졌던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한번 들여다본다면, 그 꿈에 작은 소리라도 내어본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쁘겠다.

 

*

 

‘바이올린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악기이다. 연주자가 초보일수록 더 그렇다. 왜, 바이올린 연주를 들을 대 명연주자가 연주하는 것과 어마추어가 연주할 때 내는 소리는 다르지 않던가. 수많은 연습을 통하여 듣기 좋은 소리를 찾는 것, 익은 소리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현악기의 정체다. 음만 정확히 맞아도 안되며 단지 좋은 소리만 잘 내서도 안되는. 그래서 어려서 바이올린을 할수록 아이의 뇌가 일찍 열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위층에 사는 아이가 바이올린 연습을 하는 시간이면 바이올린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어설픈 소리이면서 계속해서 바이올린 켜는 아이에게 질문을 해대는 소리이기도 하다. 물론 신음소리에 가깝다. “이 소리가 맞아?” 아이는 듣지 못하고 활을 긋는다. “정말 이 소리여야 하는거니?” 바이올린은 끊임없이 아이에게 묻지만 아이는 아직 대답할 줄 모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어떤 식으로든 바이올린에게 대답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이올린의 물음에 주인이 대답을 하는 방식. 선명한 선들을 쌓아가는 방식.’

 

이병률, 「나에게 질문할 수 있으므로 나는 나다, 대답은 하지 않으면서」, 웹진 비유 38호, 2021



+부록처럼 첨부하는 존경하는 정경화님의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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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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