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영화 같은 서점의 하루가 주는 위로 -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도서]

글 입력 2021.07.19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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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 근처 시인이 운영하는 시집 전문 서점이라니. 심지어 나선 계단으로 이어진 2층의 서점이라니.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장소다. 그리고 이런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이 서점에 찾아오는 이들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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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딘가에 하나쯤>은 혜화의 시집 전문 독립서점 ‘위트 앤 시니컬(wit n cynical)’의 서점지기 유희경 시인이 서점을 운영하며 쓴 산문집이다.

 

1부는 서점 안의 가구와 소품, 2부는 서점을 드나드는 사람들, 3부는 서점의 계절, 4부는 서점의 이벤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각 산문은 하나의 단어를 중심으로 5~6페이지 정도로 짧게 쓰였다.

 

 


늘 마주하는 일상을 근사하게


 

우리의 뇌는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을 생략하고, 비일상적인 사건 위주로 기억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그렇기에 아주 처음 보는 것보다 매일 마주하는 것에 관해 쓰는 것이 더 힘든 일이 된다.

 

이 책과 꼭 같은 방식으로, 나의 일상을 이루고 있는 것들 하나하나를 호명하며 산문을 쓰고 싶다가도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면 쓸 말이 없어 멈추었던 이유다. 요즘 뭐 하고 사냐는 말에 “그냥, 집에 있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일상을 듣는 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어디서 무엇을 했다, 이건 어디서 샀다는 사소한 에피소드나 단상을 듣는 일만으로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특별한 것 없다고 생각했던 내 일상을 궁금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잔잔하지만 오래가는 행복을 선사했다.

 

저자가 들려주는 서점의 이야기가 위로를 주는 이유다. 아직 새벽 공기가 남은 어둑한 서점에 불을 밝히고, 커피를 내리고, 음악을 틀면 하루가 시작된다. 그곳에는 목수의 정성스러운 손길로 탄생한 세상 하나뿐인 책상과 이곳저곳에서 온 인형들, 시인의 애정이 담긴 구름 그림이 있다.

 

하나하나 의도를 헤아리다 보면 서점의 모든 것이 방문객이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치되었음을 알게 된다. 누군가를 대면하기가 어려워진 요즘, 서로의 일상을 나누던 대화의 순간들이 그리웠던 이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소소한 위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전구마다 불을 밝히고 커피를 내리는 것은 그 잠을 슬쩍 흔들어 깨우는 일일 것이다. 그런 다음 나는 작게 음악을 켜둔다. 그것은 무례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그때쯤 오전의 빛은 가늘어지고 나란히 꽂혀 있는 시집들의 책등은 환해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서점은 서점이 되려는 준비를 마치는 것이다. 기지개를 켜고 긴 하품을 하듯이. 나는 또 그런 서점이 예쁘고.

 

- p.34

 

 

 

서점은 장롱이고 머그고 우산이다



화면 캡처 2021-07-19 104101.png

서울형책방 #12 위트 앤 시니컬(종로구) 영상 캡처

 

 

위트 앤 시니컬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책방 ‘동양서림’의 2층에 자리 잡고 있다. 삐걱거리는 나선 계단을 올라가면 펼쳐지는, 시집으로 가득한 책장은 상상만 해도 아늑하다.

 

저자는 위트 앤 시니컬이 어린 시절 포근한 이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던 장롱을 기억나게 한다고 말한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밤의 서점, 그 어둑하고 서늘하면서도 기분 좋은 느낌 때문에 서점의 조명을 두고 많이 고민했다는 이야기는 서점 풍경을 생생하게 떠오르게 한다.


서점을 채우는 물건들은 서점과 서점지기를 닮아 다정하고 따뜻하다. 다른 이들과 나누어 쓴다는 점에서 서점은 머그를 닮았고, 비 오는 날 함께하며 손때가 묻고 애착이 생긴다는 점에서 서점은 우산도 닮았다. 산문 한 편의 중심이 되는 각각의 단어는 서점을 이루는 퍼즐 조각이다.

 

그리하여 책을 다 읽게 되면 독자는 서점은 완전한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고, 완성된 서점의 모습은 다시 부분을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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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때문에 지하철역 입구를 가득 메운 인파 속 혹은 두어 뼘 될까 말까 한 처마 아래 당신에게 이 서점이 우산이 되어주면 좋겠다. 수많은 우산 중 하나. 내 것. 알아볼 수 있는 것.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 때에도 곁에 기대어놓는 아끼는 것. 팔에 걸고 가방에 걸고 달랑달랑 흔들려 귀찮아도 무사히 데려가고 기꺼이 꺼내드는 것.

 

- p.168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위트 앤 시니컬은 이화여대 근처의 카페에 ‘숍인숍(shop in shop)’ 형태로 입점해 있다가 카페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혜화로 이전했는데, 이전할 당시 섭섭해하며 눈물 흘리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저자가 서점을 온 마음을 다해 가꾸면서도, 서점은 독자들의 공간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서점을 방문하는 이름 모르는 이들의 이야기는 서점을 채우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만큼 재미있고 소중하다.

 

독립서점의 매력은 책을 큐레이팅하고 들여놓는 사람이 고객과 직접 소통한다는 데 있다. 심지어 위트 앤 시니컬에서는 작가가 자기가 쓴 책을 직접 판매하기도 한다. 실제로 서점지기가 쓴 시집과 서점지기의 관계를 모르고 책을 계산해달라고 내미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 멋진 서점을 즐기며 서점지기와 친분을 쌓아 선물을 가져오는 단골이 있는가 하면, 이름은 몰라도 꾸준히 서점에 들러 책을 골라가고 인형의 안부를 묻는 단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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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지기는 같은 자리에서 서점에 방문하는 이들을 관찰하고 조용히 응원한다. 시의 세계로 빠져드는 이들이 시로부터 위로받기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시를 찾을 수 있기를. 스쳐 지나간 사람도 나를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힘내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 같다.

 

나의 이름은 몰라도 나를 기다리고 나의 안녕을 빌어주는 이가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은 있구나, 하면서 몸을 일으키게 만든다. 그 응원이 서점에서 온 것이라 책장에 단단하게 붙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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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서, 사두고 읽지 않았던 시집을 다시 꺼내 들었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스마트폰으로 숨어드는 대신 시를 필사해야겠다고도 결심했다. 소제목 페이지마다 푸른 그늘이 지는 이 책으로 이 계절을 기억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름에 알맞은 서늘하고 짙은 위로를 받았다.

 

 

[김채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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