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끌림 [도서/문학]

열정을 기록한 여행 노트
글 입력 2021.07.1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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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부한 감정을 담고,

담백한 문체에 녹인 끌림

저자 이병률 | 출판사 달 | 2010.07.01 출간 | 218쪽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도서관을 자주 다닐 때였고 주로 그때 발견한 끌림은 이런 표지가 아니라 짙은 갈색에 알 수 없는 무늬로 장식된 책이었다. 단순히 여행 사진과 남겨진 여행 기록이란 콘셉트가 좋아서 집었던 책인데 사실 전부 이해하진 못했다. 글에 담긴 감정과 문체, 표현을 음미한다기보단 책을 구성한 겉모양새에 홀렸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근처에 서점이 생겼고 우연히 점심시간에 들러본 서점에서 끌림을 발견했다. 새하얀 표지와 반투명한 종이로 둘러싸인 겉면의 재질이 좋아 매만지다 다시 읽어보고 싶어 구매했다.

 

이미 여러 번 완독했던 책이다. 처음 접했을 때, 끌림은 나에게 정말 생경한 감상을 주었다. 대학교만 가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한 나의 작은 세상을 꿈과 모험이 가득한 감성의 바다로 만든 책과 다름없었다. 그가 겪은 슬픔마저 멋져 보였던 어린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멋지다고 생각한 어느 포인트에 꽂혀, 지금까지도 <끌림>이 눈에 밟히는 게 아닌가 싶다.

 

몇 년마다 한 번씩 집어 드는 <끌림>은 읽을 때마다 느끼는 섬세함이 다르다. 눈길이 가는 구절도 다르며 시선이 꽂히는 사진도 다르다. 하지만 텍스트가 주는 감정의 결은 비슷하다. 어딘지 먹먹하다. 바깥은 주룩주룩 비가 내려 우중충한데, 활짝 열어둔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는 듯하다.

 

이따금 창문으로 들어오는 빗방울을 맞으며 서서히 일몰이 지는 하늘을 보다, 고개를 돌리는 기분이다. 아니면 분명 종아리까지 차올랐던 계곡물이 어느새 나의 허리를 넘어 어깨선까지 찰랑거린다. 책을 다 읽을 때쯤이면, 나는 안경을 벗고 흐리멍덩한 눈으로 시간을 보낸다. 덤으로 뻐근해진 목덜미를 주무르며 저자가 말하는 청춘을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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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사랑'과 '청춘'이란 단어가 자주 보인다. 실연의 아픔을 가지고 방방곡곡 쏘다니는 형태로, 사람을 등지는 게 아니라 나라를 등진 상태가 됐다는 그의 말마따나, 그는 실연을 잊기 위해 누구보다 힘찬 발걸음으로 각지를 떠돈다. 한 달이면 한 달, 짧게는 며칠이라도, 이곳이 내가 생각한 곳이 아니라면 바로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진 그는 나의 얽매여 매몰된 지난 시간과 대조돼 그에게 존경심이 들게 한다.

 

책 내용을 잘 기억도 못 하는 내가 실린 사진을 보면 기억이 날 만큼 기록한 여행은 잔잔하지만 울림이 있다. 그런데도 그가 전하는 의도는 뾰족하지 않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마음을 푹 적신다. <끌림>은 낭만적이고 솔직하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찍은 사진과 저자의 정제된 날것의 감상이 담백하고 자기 예쁜 대로 적혀있다.

 

당시 그의 나이가 몇이었을지 궁금할 정도로 그는 자유분방하고 주체적이며, 또 누구보다 나아갈 줄 안다. 또 자기 기준이 있어 자신이 뜻하는 대로 행동한다.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머나먼 타국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그곳의 무드에 맞춰 자신을 흘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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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여섯,

 

시간을 달라.

당신은 모든 것에 있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하는 시간.

약속 장소에 나가는 시간.

 

비디오로 본 영화가 끝나고 엔드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나서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당신은 스톱 버튼을 누르며, 심지어 전화받을 때도 벨이 다섯 번 이상 울린 후에야, 

겨우 받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그러니 당신에게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어쩌면 사랑하는 일에도 당신은 똑같은 속도를 고집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에게 시간을 달라.

나에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

 

 

-

 

 

<끌림>은 책 표지에 TRAVEL NOTE라 쓰여있고, 제목 아래로 이병률 산문집이라 적혀있다. 물론, 여행 기록이 맞다. 그가 지나쳐온 길거리와 카메라 렌즈에 담긴 행복하고 처연한 순간을 이 책에 담았다. 그는 도망치듯 여행을 했다, 혼자 하는 여행에 간혹 누군가가 동행을 하였지만 이내 다시 혼자가 되어 귀국하거나 아니면 다른 나라로 떠난다.

 

책 내용에서 볼 수 있는 단어를 보아 그때는 해외여행이 흔하지 않았던 시기 같은데, 아마 저자에게 질문할 수 있다면, 나는 정말 단순하고 가치 없는 질문을 할 것 같다. 이렇게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돈은 어디서 난 건가요? 이런 질문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머리를 짚고 기회를 이렇게 날나며 한숨을 내쉬겠지만,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저자에 대해 아는 정보 하나 없이 당장 물어보라면 여전히 나는 이 질문을 할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해 알아봐야지! 하고 조사를 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일단 필자라면 반년 만에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도망칠 용기가 없다. 텍스트는 오로지 그가 경험한 시간과 감정에 대해 말하지만, 이면에 볼 수 없는 현실적인 부분이 눈에 밟혀 <끌림>을 존경하는 것과 동시에 동경한다. 아는가? 도망치는 것도, 그니까 진심으로 도망치는 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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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지 말자.

가진 게 없어 불행하다고 믿거나 그러지 말자.

문밖에 길들이 다 당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주인이었던 많은 것들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던가.

 

 

-


 

사랑, 청춘과 이어 또 '열정'이란 키워드가 나온다. 한때 혜성처럼 떠오른 키워드지만 지금은 부정적인 면도 상당하다.

 

지겹도록 들어봤을 '열정'은 당신은 어떻게 정의하나? 나에게 열정이란 깊이 있는 인내를 뜻한다. 단순히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미련하게 모두가 불행한 아집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슬기롭게 나를 위한 속도로 깊이 있는 것을 창조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열정의 정의는 이렇다.

 

<끌림>은 누구에게 별로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말하는 열정은 상당한 용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 개인적인 견해다. 정확한 판단력과 결단력도 필요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 가진 패도 별로 없어 어떤 선택을 해야 좋을지 발을 동동 구르는 소시민적인 우리에게 가혹한 선택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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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나,
 

 

열정이라는 말.

열정이란 말에는 한 철 태양이 머물다 지나간 들판의 냄새가 있고,

이른 새벽 푸석푸석한 이마를 쓸어올리며 무언가를 끼적이는 청년의 눈빛이 스며 있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타고 떠날 수 있는 보너스 항공권 한 장에 들어 있는 울렁거림이 있다.

열정은 그런 것이다.

 

그걸 모르면 숨이 막힐 것 같은 어둠에 놓여 있는 상태가 되고,

그걸 갖지 아니하면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낯선 도시에 떨어진 그 암담함과 다르지 않다.

 

사랑의 열정이 그러했고 청춘의 열정이 그러했고 먼 곳을 향한 열정이 그러했듯,

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 것.

 

이를테면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에 맡겨 흐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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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열정을 결과로 말했던 나와 달리, 그는 과정으로 말한다. 나는 충분히 몸에 맡겨 흘러봤을까? 그렇다면 그나마 지금이겠지. 첫 장에서 이야기 끝까지 읽어본다면 이런 이야기 모든 것이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그는 어떤 경험을 마주했던 것인가, 비유가 단순한 나온다면 정말 당신은 천재라고 손뼉을 쳐주고 싶다.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낀 모든 것들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가치 있는 표현이 흐르듯 녹아 있다.

 

그는 좋아하는 것에, 그리고 하고 싶은 것에 몸을 맡긴다. 에필로그에서 그는 독자에게 자신과 같은 길을 함께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마무리한다. 이어 카메라 노트에선 책에 실린 사진을 찍은 장소와 짤막한 감상이 담겨있다. 그제야 여행 서적처럼 느껴지지만, 작가도 말하듯이 <끌림>은 단순한 여행 서적이 아니다. 그가 지나쳐온 시간의 기록이며 성장해온 감정의 굴곡을 담고 있다.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고 온갖 풍파를 맞이하며 커가는 마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담담히 서술한다. 온몸으로 그 시간을 맞이하고 부서질 두려움을 이겨내고 받아낸다. 그가 말하는 사랑의, 청춘의, 우정의, 모든 갈래의 열정을 말한다. 그는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 한다. 그렇게 질리도록 받아내다 어느 날 뒤돌아보면 다시 끌리는 것이 <끌림>이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어느덧 성큼 다가온 이십 대 끝자락에 다시 읽은 <끌림>은 내가 놓친 기회와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 아직도 먼저 다가가 잡을 용기도, 자신감도 없다. 무턱대고 뒷일은 생각하지 않은 채 잡아버렸으면 모를까.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 아직 무섭다. 바닷가에서, 아니 수영장의 물놀이도 아직 무섭다.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아서, 쉽게 차오르는 물 높이와 발바닥이 닿지 않는 공포가 나를 감싼다.

 

물이 젖는다는 게 불쾌해 발도 담그지 않았던 내가 그나마 발을 살짝 담그고 걸어가 무릎까지는 물과 마주해본다.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내가 무섭지 않을 만큼 서서히 깊게 들어가 본다. 나는 그렇게 인생을 마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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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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